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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상징 오브제, 달 항아리 - 최영욱

김종근

일찍이 <Big Pot>이라는 화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쟝 피에로 레이노는 집 창고에서 흔하게 뒹굴던 화분을 보고, 화분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그릇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분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상징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레이노는 화분에 시멘트를 채우고 그것들에 흰색 빨간색 금색 등을 칠하는 예술적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공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영욱의 <달 항아리>로 가득한 커다란 작업실을 보면서 먼저 떠오른 작품이 장 피에로 레이노의 <화분>이었다. 명백하게 <화분>과 <달 항아리>는 오브제 성격에서 다르고, 이들이 다루는 출발점과 표현양식에서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레이노는 <화분>을 통하여 자신의 고뇌를 풀어내면서 삶과 죽음에 모습을 확인했고, 최영욱은 <달 항아리>를 통해서 자신이 행복해지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치열하게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달 항아리는 무엇인가 ? 빈번하게 인용되는 그의 작업노트를 보면 “도자기의 선은 인생의 여러 길 같다. 갈라지면서 이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 하나로 아우러진다.” 이어서 “삶의 질곡과 애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결국엔 그런 것들을 다 아우르는 어떤 기운...”이라고 고백 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달 항아리에서 그가 고민하던 인생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그것을 예술적 화두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한 때 현실생활에 부대끼고 지칠 때 새로운 예술창작에 결연한 의지를 위해 뉴욕 근교 뉴저지로 향했고 거기서 달 항아리라는 절대적인 오브제에 매료당하면서 그것을 회화적 모티브로 삼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달 항아리>는 무엇일까? 왜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이 <달 항아리>에 매달리며 그들의 예술열정을 쏟아 붓는 것일까 ? 달항아리의 예찬론을 한번 짚어 보자.  

달 항아리를 만드는 작가 권대섭은 “단순하고 소박하다는 얘기로는 달 항아리를 설명할 수 없다”. 고 잘라 말하며 달 항아리의 형태성과 조형미의 불가해성 매력을 주장 했다. 수화 김환기도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라고 극찬하며 도자기를 주제로 한 걸작들을 남겼다. 도상봉 이후에도 강익중, 사진작가 구본창 등이 달 항아리를 테마로 작업을 하면서 메시지와 감정을 달 항아리에 기대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찬미했지만 나로서는 달 항아리를 가장 먼저 칭찬한 영국의 도예가이자 컬렉터인 버나드 리치(Benard Leach)가 남긴 한마디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1935년 한국을 방문 후 달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라는 한마디였다. 이 행복이라는 말 한마디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현재 대영박물관의 한국관에 전시되어 있는 달 항아리를 칭찬한 또 다른 영국의 여배우 쥬디 덴치(Judo Dench)는 “박물관에서 가장 맘에 드는 한 점을 고르라면 달 항아리인데 '하루 종일 이것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라고 했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 달항아리가 가지는 진면목을 모두 아우르는 발언인가? 나는 이 고백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최영욱이 달 항아리를 그리는 이유도 버나드 리치나 쥬디 덴치처럼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행복 해진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그림 그리는 작업과정을 주의 깊게 보면 이런 그의 본질적인 의도는 쉽게 이해된다. 


최영욱은 이 달 항아리를 위해 젯소 칠에서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사포질을 통하여 화면을 다듬은 후 , 릴리프적인 마티에르 위에 무수히 많은 빙열의 선과 풍경들을 내려놓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이런 번거롭고 정밀함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작업은 단순하게 형태를 만들고 다시 선을 그린다는 <기억을 이미지화 한다>는 행위는 삼차원의 백자를 이차원의 평면에 옮겨 놓는 행위 이상의 외롭고 지난한 시간을 요구한다.
 실제 그의 작업에는 다양한 색채도 , 드라마틱한 형태의 변화도 스토리도 없을 정도로 정적이다. 그 작업을 그는 10여 년째 해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갈라지면서 이어지고, 끊겼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선처럼 우리의 인생도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 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고 했다. 그렇게 백색의 공간에 드러난 흰색의 달항아리가 마침내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을 바이러스처럼 전해 주는 것이다. 일견 외형적인 시선에서 달 항아리가 색채와 선, 형태라는 아주 기본적인 조형요소들에 대한 탐구인 것처럼만 보이지만, 엄밀하게 이것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려 나가는 구도자의 수행의 흔적들이다. 처음 최영욱이 선택한 달 항아리가 일상적인 오브제에 불과 했지만, 이제는 달 항아리를 통하여 참선에 이르러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여정에 달 항아리가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작가는 아주 고집스러운 형태를 통하여, 빙열의 주름을 통하여 깊고 그윽한 인생의 아름다운 변주곡에 무한한 시간성을 올려놓는다. 그는 이 오브제를 통하여 달 항아리가 가진 단순미의 절정에서 전율하는 순간들을 향유하는 것이다. 즉 극도로 절제된 단순화 형태와 백색 모노톤의 고졸한 색조에 풍경을 풀어내며 행복해 한다. 20세기 근대회화의 거장 조르죠 모란디(1890~1964년)가 병을 모델로 삼아 그 위에 쌓인 먼지까지 그리면서 “가시적인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공간, 빛, 색, 형태다”, 라고 했던 것처럼 최영욱이 바라보는 것은 형태, 빙열 그 시간 너머에 찾아오는 예술가의 행복 같은 것 이다.

그러므로 단순함과 고요함 속에서 예술을 통해 행복을 찾아 떠나는 그의 작품이야말로 인간 삶의 생명을 키워내는 가장 상징적인 영매 같은 존재이다. 희망을 잃은 우리시대의 절망 앞에 그는 순백의 커다란 달 항아리로 답함으로서 그림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볼 것을 일관되게 권유한다. 분명 최영욱의 작품들은 눈을 감고 손으로 만져보는 그런 작품이다. 마치 레이노가 결국 “예술은 결국 하나의 언어로서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하였듯이 그에게 달 항아리는 삶의 고뇌를 풀어내는 하나의 훌륭한 도구이자 해법이며 그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 가면서 행복한 삶에 도달하는 최고의 언어이다. 그것은 어쩌면 조선 시대 도공들이 항아리를 만들면서 함께 꿈꾸며 영혼을 나누며 머물고자 했던 간절한 소망과 무엇이 다르리. 

그만큼 최영욱의 달 항아리는 고요하고, 지적이며, 정적이며 명상적이다. 작가에게 달 항아리는 삶에 대한 성찰이자 일탈의 오브제임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달 항아리의 형태와 색채를 단순히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서길 나는 기대한다. 그것이 그가 10여 년째 이 조선의 달 항아리를 물고 늘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인연일 것이다. 작품 제목에 <Karma>란 사실도 “그 달 항아리 안에 선들은 도자기의 빙열이 아니라 만났다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인생길을 표현” “나는 그 운명, 업, 연(緣)을 선으로 표현했다. 그 선을 긋는 지루하고 긴 시간들이 나의 연을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그의 행위가 이렇게 “구도의 몸짓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해방의 몸부림” 이란 평가와 지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에 들어서 최영욱의 달 항아리 그림은 보다 ‘미니멀’해지면서 동시에 다양한 도자형태의 구성과 변화가 도처에서 감지된다.  이것은 일상에서의 아름다움을 더욱 차원 높게 승화하려는 작가의 아주 중요한 변화로 읽혀진다. 물론 최영욱의 달 항아리가 “언제까지 인가 ?”라는 작가가 가지는 고민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달 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구도의 과정에 만나는 것이 일그러진 달 항아리인들, 고려청자인들, 막사발인들 그것 또한 인생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빌 게이츠 재단에서 그의 작품을 냉큼 구입한 뜻은 마음을 비우고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한 붓질이 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공명했기 때문이지 이 <karma 가르마>가 단순하게 꼭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주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비선재를 통한 이번 27번째의 달 항아리 개인전은 그래서 주목 할 만 하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고양국제 플라워 비엔날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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