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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미 / 어두운 심연위의 물고기 형상

박영택

유영미의 그림은 심연 같은 공간에 물고기가 떠있는 장면이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개인의 심리적 지도를 형성한다. 어두운 공간에 한 마리 물고기가 놓여 모종의 좌표를 그려나가고 있다. 모노톤의 추상적 배경을 뒤로 한, 은빛으로 부감되는 물고기의 구체적 형상은 비현실적인 생선이미지이면서 또한 사찰에서 접하는 목어의 이미지를 닮았다. 종을 때려 산천초목을 깨우는 종소리를 가능하게 하는 목어는 이른바 포뢰라는 고래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종의 표면은 포뢰를 두려워하여 소리를 지른다. 불교에서 물고기는 각성과 각오를 의미하기도 한다. 늘 깨어있음을 경고 하는 매개다. 아울러 작가에게 물고기는 깊은 심연에 고독하게 부유하는 자아의 치환이기도 하다. 그것은 몇 겹의 의미를 두르고 존재한다.

작가는 판넬에 비단 같은 섬세한 스텐레스 철망을 씌우고 그 표면에 그라운드를 처리한 후 아크릴과 석채를 발라 깊은 어둠, 심연 같은 깊이를 만들고 물고기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바탕의 스텐레스 철망은 연회색의 고운 비단과도 같다. 예민하고 날카롭다. 종이를 대신해서 철망을 씌우는 것은 보호막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얇은 막으로 감싸 타자로부터, 세계로부터 분리해내고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철망을 씌움으로써 작가는 다시 한 번 포장된다. 그렇게 판넬에 고운 철망을 덮고 아크릴 물감으로 철망과 바닥을 배접하듯 붙인 후 그 피부위에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판화용 끌로 조심스럽게 새겨 선을 그린다. 드로잉을 하듯 물고기의 형상을 새긴 것이다. 순간 부드럽고 불투명한 배경위로 질감을 지닌 물고기가 부유한다. 물고기를 이룬 선은 작가 자신의 내면의 감성을 각인한 선이자 심리적 파동을 기억하는 선이 되었다.

작가는 철망에 상처를 새겨 이미지를 그린다. 저부조로 솟아 오른 물고기 형상이 유동한다. 밀폐되고 단호한 어둠 속에 떠오르는 물고기는 다분히 고독하고 적조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물고기는 개인에 대한 은유적 성격을 지닌다. 어두운 먹색의 검은 바탕은 물속의 느낌을 주기고 하지만 실은 모종의 닫힌 공간, 내면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 공간은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심리적 공간이 되는 셈이다. 화면은 단일한 평면 내지는 몇 개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상호 연결 속에 조합된다. 추상적으로 마감된 각각의 평면의 화면 안에서 물고기는 자아의 실재감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종의 표정을 지닌 물고기는 작가 자아의 대리물인 셈이다. 그것은 작가의 초상이자 분신이다. 고통, 슬픔, 상실, 외로움 등의 감정을 자아내는 깊고 어두운 배경위의 물고기다. 작가에 의하면 이 어두운 배경은 절대적인 감정의 외침 이란다. 그림에서는 어두운 검정 배경에 은색, 흰색계열의 물고기가 대비된다. 그것은 어둠과 빛의 대비를 또한 연상시킨다. 분위기 있게 표현된 그림인데 재료의 연출과 마감이 좀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작품의 제목이 ‘자폐-我’다. 자폐는 작업의 키워드다. 스스로를 일정한 공간 속에 가두는 현대인의 초상이 이런 식의 그림으로 등장한다. 그 현대인은 결국 자신이기도 하다.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에 대한 질적인 결함이 결국 자폐이다. 자폐(Autism)는 자신(Autos)이라는 그리스말에서 유래된 용어다. 소통과 상호작용, 언어, 제한된 관심 영역 등의 문제를 가지는 발달장애의 한 종류란다. 작가는 현대인들이 스스로 만드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그 자폐적 삶을 이미지화하고자 했다. 자기 자신만을 향해 보며 스스로에게 닫아버리는 자폐적 현상은 어두운 공간으로, 자폐적 인간의 내면은 물고기 형상으로 떠올려 놓은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은 자폐 증세를 앓고 있는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내 자신이 스스로 닫아버린 현실의 삶을 자폐와의 연관성으로 고민 중에 현실에서 멀어지고 자기만의 내면세계에 파묻혀 있는 가상세계를 물고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작가노트)

작가는 일상 속에서 자주 접하고 관심 있게 들여도 본 어항 속 물고기에서 주제를 착안했다. 어느 날 제한된 공간에서 느리게, 끊임없이 떠도는 물고기의 자태에서 자신의 모습, 현대인의 보편적 초상을 본 것이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 그 폐쇄된 틀 안에서 닫힌 삶을 살아가는 생의 풍경을 본 것이다. 동시에 물고기란 존재는 항상 눈을 뜨고 있기에 견자, 깨달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존재가 되고 또한 역경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제한된 영역 안에서 자폐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눈을 뜨고 늘 깨어있으려는 물고기의 모습에서 자신과 동일한 운명을 엿본 것이다. 유영미의 그림은 결국 자신의 자화상이자 현실적 삶에 대한 은유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동시대의 풍경인 셈이다. 깊고 어두운 심연위에 고독하게 부유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이렇게 풍성한 의미를 지니며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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