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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희 / 풍경의 맛

박영택

작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 매체가 지닌 역사적 과정과 전통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특정 매체를 다룬다는 것은 그 매체의 조건에 순응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로부터 연유하는 표현방법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일탈과의 긴장을 부단히 겪게 된다. 모든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매체, 물질을 화두 삼아 끝까지 가는 이들이다. 작업은 그로부터 발원한다. 이처럼 작가란 존재는 특정 매체를 다루는 이들이며 그 물질과 연장을 통해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작가의 작업이란 생각해보면 그가 다루는 물질과 연장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가능한 표현의 극대치를 모색해 온 모종의 결과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강승희는 오랫동안 동판화를 제작해온 이다. 그의 작가적 삶과 작업의 주제, 표현방법론 역시 그 동판화로부터 비롯되고 기원한다. 자신이 다루는 매체, 물질과 연장이 고스란히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반영하는 도구가 되고 인격적 공간과 내면의 깊이를 반영하는 수단이자 결국 자신의 또 다른 얼굴로 나앉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동판화란 기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 연장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매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 매체를 통해 그는 특정 풍경을 형상화했다. 그 풍경 역시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다는 선에서 연출된 풍경화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연에서 모티프를 취했지만 그로부터 파생한 이미지는 자신의 내면의 프레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모든 풍경은 결국 그 풍경을 본 이의 마음과 사유에 의해 번안되고 해석되고 걸러진 것들이다. 그와 무관한 풍경은 부재하다. 따라서 강승희가 그려낸, 찍어낸 풍경은 풍경을 빌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의 한 자락을 펼쳐놓는 것이다. 흡사 전통시대에 그려진 인물산수화처럼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간결하게 형상화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상하는 한편 군자적 삶의 희구를 열망하는 제스처를 간절히 각인했듯이 말이다. 강승희의 이 적조한 풍경 역시 광막한 우주자연에서 홀로 수신하며 그 광활하고 숭고한 자연과 교호하는 이의 마음을 조심스레 부려놓았던 인물산수화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부식동판화기법을 통해 금속에 저항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성에 의해 조율된 특정 상황으로 연출한다. 그는 금속판위에 직접 제작한 특수한 니들(송곳, 칼)로 선을 파고 새기고 점,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단호하고 견고한 금속의 납작한 평면에 상처를 입혀서 만든 구멍, 깊이에 물감과 압력, 시간과 여러 효과를 부여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금속판에 마음과 정신을 새기고 자신만이 접한 자연의 감흥, 분위기를 올려놓고자 한다. 대화 중에 그는 수많은 여행을 통해 자연의 맛을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흥미로웠다. “자연의 맛”이라! 우리는 맛이나 멋이니 하는 말로 아름다움을 칭했다. 그것은 단지 시각상의 세계, 감각적 층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에서 예술은 맛, 멋이었다. 이 총체적인 것을 지시하는 단어는 온 몸으로 관여하고 깨달은 경지를 칭한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비로소 궁구하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깨닫는 일이며 그로인해 이상적인 생애를 도모하고 그 자연과 조화로운 생의 길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인물산수화였다. 그 그림은 단지 풍경화도 아니고 자연을 재현한 것도 더더욱 아니다. 자연에서 깨달은 정신의 경지를 한 화면에 응축시켜 놓은 것이고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지를 부려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수신적인 그림인 셈이다. 더불어 자연의 그윽한 운치가 가득 그려져 있다. 고요한 자연 속에서 식물처럼 좌정하면서 주변 풍경에 눈길을 주는 가하면 흐르는 물을 관수하고 청음하면서 고독하게, 모든 인위를 지우고 있다. 깊은 산의 덕을 헤아리고 뭇생명체들의 인연을 떠올리며 모든 존재의 연기적 그물망과 자연이 자아내는 모든 색채, 기운, 활력과 소리를 온 몸으로 흡입해내는 이다. 우리는 자연을 그렇게 대하고 받아들이고 그것과 부단한 조응으로 뒤섞여 경계 없이 녹아드는 경지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 느낌, 맛과 멋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수 있느냐가 바로 미술의 문제이다.

아마도 강승희는 나이가 들면서 전통산수화의 세계에 더욱 깊이 공명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그의 심성이나 정서 자체가 한국인의 이 심상적 기억으로 유전되는 형질 속에서 강하게 배태되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고향 제주도가 그에게 각인해준 원초적인 자연 체험을 부단히 상기하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자연을 찾아 헤맨다. 무엇이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맛’이 있는 풍경을 찾아 떠난다. 더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우며 자신 속에 억압된 것들을 풀어주는 자연,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한편 깊은 명상으로 유인하는 그 자연의 어느 한 순간, 장면을 찾아간다. 우연히 그 정경을 접하면 이를 사진으로 담고 스케치를 해서 작업실에서 그만의 풍경화로 번안해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장면을 기억하고 스케치한 후 이를 자신의 마음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꺼내 간결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 맛이 유지되는 어떤 상황을 연출해내려 한다. 딱딱하고 견고하고 차가운 매체에 한없이 부드럽고 눅눅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마음의 자락을 문질러댄다. 금속의 피부를 파 들어가 새기고 그 위에 무념무상으로 점을 찍고/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찍어가면서 자신이 보고 온 그 풍경의 맛을 구현하려 한다. 흡사 수묵화처럼 짙은 검은 색채의 번짐과 응고, 여백처럼 비워진 공간, 간결한 구성. 몇 그루의 하얀 측백나무와 덩어리로 자리한 산과 섬, 검으면서도 푸르스름한 색상으로 얼룩진 구름의 자취, 판위에 바람처럼 남겨진 스크래치 등이 어우러져 어딘지 정적이고 고독한 자연풍경을 함축적으로 안긴다. 부식동판화기법으로 ‘동양화처럼 그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 동판화의 기법적 한계나 상투형에서 벗어나 표현과 기법의 또 다른 가능성과 효과를 공략하면서 이를 자신의 정서를 표현해내는 쪽으로 추려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수묵화와 유사해졌던 것 같다. 다소 클리쉐적인 이미지와 감상적인 드라마가 연상되는 상황성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의 풍경은 강승희 본인이 지닌 근원적인 정서와 취향의 세계를 구현하는 선에서 풀어내려는 것 같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감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만의 감수성이나 기질, 취향을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발설하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일 것이다. 좋은 그림은 결코 그 작가를 넘어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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