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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삼 / 희망의 날개 짓

박영택

박동삼-희망의 날개 짓



몇 겹으로 두께와 깊이를 지닌 합판의 내부를 거칠게 공격적으로 파들어 간 흔적이다. 나무의 속살이 무참히 깎여지고 파헤쳐져 이룬, 움푹 들어간 네거티브공간이 새와 팔의 형상을 안긴다. 표면 안으로, 수직으로 들어가 깊이를 간직한 조각이자 서로 다른 단층들의 결이 여러 시간의 층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각이고 동시에 화면 스스로가 화면 안에 이미지를 잉태한 형국을 보여주는 오브제회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칼질과 망치로 때려내서 뜯겨진 살점 같은 나무의 내부는 처참하고 그만큼 강한 이미지로 응고되어 있다. 마치 독일신표현주의 작가들의 거칠고 뜨거운 나무 조각을 연상시킨다. 오래 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바젤리츠의 회고전을 보았는데 나로서는 평면회화보다도 그의 나무 조각이 무척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나무의 물성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정형화되거나 공들여 마무리된 흔적을 죄다 거두고 나무를 대책없이 깍고 파들어 간 자취가 그대로 힘 있는 조형언어였다. 나는 박동삼의 조각이자 회화, 드로잉인 이 나무판 작업 자체가 더없이 흥미롭고 강렬했다. 그것 자체로도 충분한 작업이자 매력적인 그림/조각이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 나무판은 틀이고 거푸집이다. 그는 내부로 들어간 구멍(형상)에 한지를 무수히 겹치고 배접 붓으로 일일이 두들겨 떠냈다. 그로인해 네거티브공간은 포지티브가 되어 표면에서 융기한 입체적 이미지로 환생했다. 이 캐스팅 작업은 거칠고 깊이가 다른 나무의 안쪽을 기억하는 부드럽고 온화한 한지의 얇은 막으로 전이되는 묘한 체험을 안긴다. 밝고 투명한 한지는 처참하게 파헤쳐진 안쪽의 공간 속에서 나온 새와 팔의 형상을 순수한 이미지로 감싸 안았다. 마치 화석을 보는 듯 하다. 그렇게 떠낸 단독의 새와 팔이 요철화 된 한지를 사각형 박스 안에 띄우고 박스내부에서 빛을 환하게 밝혔다. 순간 새와 팔은 조명 속에서 집중되며 그 자체의 존재성을 강렬하게 감촉시킨다. 한지와 빛을 통해 새와 팔은 흡사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위를 향해 날개짓 하려는 듯한 새(갇혀있는 새의 느낌)와 신체에서 분절된, 분리된 기관인 팔과 손목(기형적인 손)은 “기능적으로 마비되고 정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기형화된 현상을 대표”한다. 작가는 정형적인 모습들이 추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비정형적인 모습들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한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이 기형적인 손은 “본질을 상실한 외면적 눈속임에 현혹되기보다 내면의 진실된 모습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다. 그러니까 기형적인 손을 통해 왜곡된 진실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에게 새는 팔과 마찬가지로 인간존재를 표상한다. 작가에 의하면 이 새의 형태는 다양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데 새를 통해 그는 인종이나 계층 간의 갈등 및 고립, 여성의 상품화, 혹은 소외 계층의 삶의 공간 등을 표현하고자 한다. 보편적으로 새는 자유나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도상이지만 그에게는 사회의 모순과 이로 인한 인간의 고립 및 갈등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된다. 나무틀에서 한지캐스팅으로 떠내 만든 새와 함께 그는 부드럽고 유연한 철망을 눌러 새의 이미지를 요철화했다. 섬세한 압력으로 인해 눌린 미세한 자취, 얇은 스텐망 피부에 미세한 시각적 자취를 얹혀서 그 지각하기 쉽지 않은 요철로 부감되는 작업은 흥미로운 캐스팅 작업의 신선한 예다. 다소 어둡고 흐릿한, 발처럼 드리워진 그 주름진 피부에 기이하게 출몰하는 새때, 새의 유영을 보는 시각적 체험이 인상적이다. 그 철망작업은 공간에 설치되어 시선을 막아서는 벽을 안기고 그 설치된 벽은 보는 이의 조심스런 관여와 이동에 따라, 빛의 개입에 따라 새의 형상을 안겨준다. 그런데 무수한 새때들이 날아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대한 미사일 형태가 드러나는 반전이 기다린다. 작가에 의하면 미사일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나타내는 물체가 된다. 그는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후에 ‘소프트 플라잉’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사일이 물리학적인 법칙에 의해 날아가는 것처럼 사회현실을 움직이는 권력 역시 정해진 구조와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 반면 사회의 동력이 되는 힘 주위에는 그 힘을 둘러싼 수많은 개인들이 존재하고 그 개인들은 다양한 역할, 목소리를 내면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힘에 대항하거나 동조하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개별적으로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사일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수많은 새들은 개인의 자유의지 및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미지인 셈이다. 하나의 거대하고 단일한 미사일 형태와 그 안의 새 이미지는 결국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가지 종류의 힘들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하고 자연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듯이 흘러간다는 메시지다.
작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그리고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현대 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순을 경험하기에 작업을 통해 이른바 “불균등한 권력관계, 정형과 비정형, 가치와 효율성, 아름다움과 추함 등 모순이 내재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한 모순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사회 구조 안에서 비롯된 종속적 굴레의 관계성 안에 놓여져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한 메시지를 한지로 캐스팅 된 새와 팔, 철망 표면에 지각되는 새의 이미지와 거의 지각되기 힘든 미사일의 이미지를 눌려놓은 자취를 통해 발화한다. 나로서는 그가 말하는 주제, 부여한 의미보다 작업 그 자체가 좋다. 물론 그의 작업은 그가 대면한 사회와 현실에 대한 인식작용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그 인식은 보편적인데 반해 캐스팅 기법에 의한 이미지 표현과 독특한 방법론, 효과적인 설치를 통해 단순한 이미지를 강렬하고 공감각적으로 발산하는 그 지점에서 특이하다.

자본주의는 자기 주위에 놓인 모든 것들을 흡수하여 이를 자기 성장이 동력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이다. 21세기의 자본은 인간의 정신, 인지, 감정 등 비물질적 영역까지도 포획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은 삶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한다. 이러한 자본의 형태를 삶권력biopower이라고 부른다.(네그리와 하트) 이렇게 자본은 오늘날 인간의 삶과 세계 곳곳에 편재한다.
사실 국가에 개인은 없다. 특정 집단으로서 국가와 마주하는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특정한 존재뿐이다.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집단적 통일성을 보장해 주는 장치이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기능과 새로운 질서를 강제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그렇게 오늘날의 국가는 자본의 뒤에서 경쟁을 독려하고 경쟁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저항의 몸짓을 제거하는 일만 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도 사회도 이념도 이상도 실체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생존투쟁과 극단적인 경쟁구조만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존하는 지배적 가치를 재배치하고 재평가하며 재가공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개입이 가능하다. 기존의 질서에 못 박혀 있는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원동력이며 예술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박동삼 역시 그런 희망의 날개짓을 새의 형상을 빌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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