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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 / 사진의 주체에 대한 질문

박영택

작가란 저마다 자신이 다루는 물질과 삶을 산다. 특정한 물질을 지극히 편애하면서 산다. 그 물질에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간다. 그런데 그 물질을 적절히 공략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서는 모종의 연장, 도구가 필요하다. 어쩌면 작가란 존재는 그 연장과 함께 늙어간다. 물질과 연장은 구분없이 섞여있고 작가의 몸, 감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작업실을 다닐 때 마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연장, 도구 보기를 더없이 좋아한다. 작품 자체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은밀히 독대하면서 즐기고 있다. 아득한 시간과 그 시간과 함께 한 헤아릴 수 없는 작가의 몸놀림, 노동의 흔적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실존의 깊이가 구덩이 처럼 선명하게 드리워져있다. 고민과 사유, 굴곡심했을 감정의 경로도 눈에 밟힐 듯 하다. 그 작가의 신체적 하중과 앙력과 지문, 수없는 마찰을 통해 반들거리는 피부는 더없이 아득하다. 사진작가 역시 특정한 연장들과 함께 생을 사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은 카메라와 렌즈와 삼각대를 위시한 여타의 장비들, 도구들과 함께 산다. 카메라잡지를 보면 특정 사진가의 가방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 연장들을 보여주고 한다. 우리는 작가의 작품 못지않게 그의 연장을, 도구를 궁금해한다. 한 개인이 다루는 물건에는 여러가지 사연과 의미들이 촘촘히 털처럼 박혀있다. 물론 사진가가 다루는 카메라 등의 도구는 미술인들이 다루는 물감과 붓과는 조금 성질이 다르다. 누구나 유사한, 동일한 카메라를 가지고 다루며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카메라의 종류에 따라, 연장의 차이에 따라 사진도 다를 것이다. 일단 피사체를 보는 시선과 그 대상을 선택하고 프레밍 하는 의지와 결정, 판단 등이 동일할 수 없는 이유이고 그 다음으로는 불가피하게 기계를 조작하는 차원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점 및 그 저간에 드리워진 보다 넓고 깊은 인생관, 취향, 기호의 차이, 그리고 인문학적 감각의 층들이 저마다 다를 것이고 그에따라 작품 역시 편차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진은 누구나 간편하게 다루고 원하는 이미지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기계로 인식하고 있다. 사실 누구나 카메라렌즈에 눈을 대고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면 별 차이없는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이미지는 가능하다. 카메라는 분명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연장, 도구를 다루는 주체의 자리는? 이성준은 카메라와 이를 다루는 개별 작가의 관계에 대해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해명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얻기 위해, 혹은 그런 인식을 실험(?)하기 위해 사진작업을 한다. 그러니까 그는‘카메라는 나의 생각의 표현도구일 뿐’이라고 보는 그 유기적 관계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를 묻는다. 카메라라는 도구의 경우에도 작가는 그 도구를 이용한 작품에 있어서 생산적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동일한 대상을 자신과 자신의 딸이 동시에, 함께 촬영하는 것이다. 결국 사진의 주체가 누군인지를 질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9살짜리 딸아이에게 35mm 자동카메라를 주고 본인은 그 자동카메라와 같은 2:3 포맷에 유사한 화각을 가진 120mm 중형카메라로 찍었다. 이른바 홈스쿨을 하는 그는 딸아이와 함께 하루를 온전히 보내며 지낸다. 다소 산만한 딸아이를 구슬려 야외에 나가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진 찍기는 9살 딸아이에게는 그닥 재미가 있거나 흥미로운 일은 못될 것이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이 더 재미있을 시간에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특정 대상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들이 선택한 대상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들이다. 나무와 산, 하늘과 벌판 등이다. 자신들의 일상적 삶이 환경 주변에 그렇게 펼쳐져있는 주변 공간을 눈가는 대로 잡았다. 작가는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 인공적인 대상일 경우 그 대상 자체에 이미 의미(존재목적)가 존재하므로 가급적 배제하려고 하였고,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지역 주변의 일반적이거나 자연적인 대상을 찍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비근한 자연풍경이다. 나무와 풀, 산과 하늘, 구름과 들이 펼쳐져있다. 대상의 선택은 작가/아버지가 결정하고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춰주면 딸아이는 셔터를 누른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대상을 선택하고 그 대상 앞에 삼각대를 세워 두 대의 카메라를 설치하면 아이와 아빠는, 둘이 동시에 셔터를 누르는 것이다. 더러 작가는 손에 들고 찍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사진 두 장 중 아래의 사진은 딸아이가 찍은 것이고 위의 것은 작가 본인이 찍은 것이다. 얼핏 봐서 이 두 장의 사진은 하등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좀 더 공들여 들여다봐야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렇다해도 사실 큰 차이는 없어보인다. 사실 이미 찍어야 할 대상도 결정되었고 그것이 카메라프레임에 걸려드는 구도 역시 고정되어 있는 편이기에 렌즈에 눈을 갖다대고 셔터를 누르는 주체의 의지나 결단이란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그렇게 둘이 사이좋게(?)촬영을 하고 난 후에 그 결과물을 보니까 무척 흥미로웠다고 한다. 이미 어느정도 예상한 바지만 사진은 거이 흡사하다. 사진을 함께 찍어보니 그것은 이안 반사식(Twin Lens Reflex) 카메라의 렌즈가 상하로 배치된 구조와 같아보인다. 재미있게도 어른과 아이의 눈높이의 차이로 인해 위, 아래 나란히 놓인 두 대의 카메라가 상하로 배치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사실 이 사진은 결과물로서의 사진 자체는 큰 의미는 없어보인다. 이 사진의 내용이나 메시지, 특정한 개념은 사실 부재한 편이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른 카메라로 다른 존재가 찍었을 때의 그 결과물을 곰곰히 생각해 본 그런 사진작업이다. 특히나 작가는 딸아이의 홈스쿨을 하는 과정에서 그 애와 함께 할 수 있는 사진작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사진은 정밀하게 그린 그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눈으로 구분할 수 없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회화와 달리 사진작가는 오차 없는 기계적 매커니즘, 즉 카메라에 의존하여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의식’과는 큰 상관없이 사진을 찍는 시간과 장소와 대상이 같다면 다른 누군가가 찍더라도 그 결과물은 분명 유사한 사진이 생산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진이 지닌 매커니즘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앞서아 같이 딸아이와의 사진작업을 통해서도 새삼 확인되었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대상을 선택하고, 카메라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은 작가의 역할이다. 동시에 실제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셔터, 조리개, 렌즈 등과 같은 요소들의 복합체로 이루어진 기계적 관계, 즉 카메라 매커니즘이다. 이런 매커니즘적 사진이 작가의 의식을 ‘오차 없이’ 담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지도 모른다. 나의 작업은 이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사진에 찍히는 대상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대상을 그려내는 주체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와도 같은 것이다. 그 주체는 작가일까 카메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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