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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득- 상상과 환영을 빨아들이는 공간

박영택

  김호득- 상상과 환영을 빨아들이는 공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나는 김호득이 90년대 초반에 그린 자연을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 산과 계곡, 풀들의 형태를 슬쩍 빌어 그 생명체들이 마냥 뒤척이는 기미, 격렬한 떨림과 동세를 전달하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가능한 온전히 전하려는 모필과 먹, 간간히 개입한 채색은 대단한 테크닉과 통감각적인 맛을 안겨주는 것이어서 눈이 번쩍 뜨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그의 그림은 줄곧 자연이 소재였다. 그는 결코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 즉 자연을 떠난 적이 없다. 좁게는 산, 계곡, 물, 폭포, 들, 풀, 꽃에서 받은 인상인데 단지 형태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퍼득거리는 떨림이나 기미를 낚아채는 그리기로서 일종의 비시각적인 것의 가시화란 난제를 필획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본다. 사실 모든 그림이란 궁극적으로 가시성의 세계를 매개로 비가시성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지 않은가? 작가는 이후 바람, 빛, 속도와 시간, 문자, 혹은 움직임과 같은 세계로 적극 이동하였지만 이는 자연의 구체적인 형태를 매개로 하는 작업과 항시 반복되고 있다. 사실 이 둘 사이의 명확한 경계는 좀 애매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가 즐겨 그리는 <폭포>를 예를 들면 그것이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결국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형으로부터 애초에 떠나 있는 것이자 그것이 목적은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이른바 모더니즘에 입각한 추상은 아니다. 그가 평면성이나 물성, 극도로 환원적인 성격의 회화를 지향한 적은 없다. 극소의 필흔과 온통 먹으로만 채워진 종이나 수조작업 역시도 자연현상을 환기하거나 보이지 않는 자연의 미세한 기운과 관자의 신체를 상통하게 하려는 배려이기에 그렇다. 

 초기에 그의 작품의 모티프는 자연풍경이지만 결국 화면위에 남는 것은 선과 먹의 흔적이고 그것들이 요동치면서 자연의 한 순간의 생동함을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안기는 그림이었다. 폭포와 계곡, 세차게 흐르는 물, 시커먼 바위, 산과 나무, 풀과 꽃이었다. 그리고 구름과 바람, 먼지와 열기 같은 것들로 나아갔다. 그림 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는 뚜렷하지 않은데 작가는  하나의 물체를 표현함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요약을 추구하며, 좁게 끌어안으면서 그 본질을 건드리고자 했다. 그래서 자연을 보는 시점을 극단화하면서 관자의 눈과 몸을 대상의 내부로 ‘확’ 끌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매우 미시적인 접근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에 무서운 속도감이 있고 세찬 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바람이 불고 나무와 풀들이 뒤척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들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는 소리,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자연계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부산스럽게 피어오르고 흔들리고 살아나는 그런 소리, 모종의 기미와 운동과 호흡과 떨어댐을 작가는 몸으로 따라간다.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계의 안타까운, 조바심 나는 현전이다. 그림은 결국 한 작가의 몸의 더듬이가 포착한 세계상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예민한 감성과 몸, 신경으로 포착하고 떠낸 세계를 표현해내는데, 기술하는데 먹과 모필을 사용하는 이고 그 재료가 더없이 그 표현을 용이하게 해주거나 효과적이라고 보는 이다. 그리고 그 모필과 먹을 쓰되 좀 재미있게 질리지 않게 상투적으로 고정되거나 관습화되지 않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기도 하다. 이 점이 그이 돌올한 존재감이다. 동양화란 결국 선의 예술이다. 그 선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선이다. 단지 사물의 외형을 지시하거나 표현하는데 결코 머무르지 않는 그 선은 묘사를 뛰어넘어 어떤 기품의 경지로 내달린다. 보여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근원을 향해 마구 질주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먹이 모필에 의해 한지/광목의 표면(내부)로 잠식해 들어가면서 멈춘 어떤 상황성을 안기는데 그게 흡사 자연에서 받은 인상이 되고 자연과 생명현상의 장엄하고 신비하며 뜨거운 어떤 순간을 목도케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적 활력을 건드려서 고양된 정서와 쾌감을 준다. 그림이 표면이 아니라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디론가 활달한 정신적 비약을 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닌 궁극의 지향점이었다고 본다. 그림은 매개가 되고 고리가 되어 관자들은 이를 징검다리 삼아 저 세계로 비약하는 정신적 활력을 갖는 것, 따라서 그림은 망막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마음 안에서 요동치는 것 말이다. 

 그는 동양화 재료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기억되지만 여전히 지필묵이 중심이다. 먹의 깊은 어두움과 모필 내지는 먹과 물을 실어 나르는 여러 재료(일부러 망가트린 붓과 딱딱한 종이의 단면, 콩테, 손가락 등)를 가지고 한지, 광목천, 갱지나 캔버스 천위에 생생하고 격렬하게 더러 침잠되고 더없이 고요하게 흔적을 남긴다. 생천에 아교칠을 하거나 아예 그 천 자체에 직접 시술하기도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입자가 성글고 평평한, 이미 포근한 색 자체가 깃든 광목을 즐겨 사용한다. 광목은 일정한 두께를 지닌, 바탕 면 자체가 오브제로 가설되어 필과 먹의 얹힘을 종이와는 달리 보여준다. 광목은 흡수하기 보다는 뱉어내는 편인데 그것이 신체의 감각을 필선으로 전달하는데 용이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아가 한지를 뭉친 종이죽에서 먹을 머금은 한지를 구겨서 뭉쳐놓은 것, 종이죽을 계속 칼로 이겨서 도마 위에 찰떡처럼 붙여놓은 오브제나 먹물 묻은 종이를 구겨 응고시키고 나무판에 붙여놓아 수묵을 오브제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기보다 훨씬 촉각적이고 생생한 손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니까 손가락과 손바닥의 힘이 묘하게 조절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상황 아래 기기묘묘한 형태를 지닌 것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이후 공간으로 나아가 시각과 촉각의 공감각성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2009년부터 본격화되는 입체와 설치작업이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부터 그는 ‘측량할 길 없는 근원적 생명’이란 주제이 작업을 공간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나 마음의 흔들림, 그리고 우주의 기운과 삶을 관계 짓는 사이, 우연히 떠오른 생각 혹은 찰나적 깨달음 등을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보는데 이는 이미 오래전 전부터 그의 그림에 반영되어 나왔지만 이시기에는 그것이 공간에 설치화, 오브제화 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해 보인다. 일정한 크기의 광목이나 한지를 빨래처럼 널어 걸고 그 아래쪽에는 먹물을 풀어놓은 수조를 만들어놓는 식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을 보는 이들에게 고요히 목도하게 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느끼게 하는 등 주어진 공간에 있는 관중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라는 그 찰나의 시간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 치바 시게오는 “한지, 물, 먹 따위 한없이 비물질화 되기 쉬운 재료를 써서 공간의 움직임, 흔들림, 혼돈을 억제하여 시도한다.”고 평한다. 관자의 신체가 공간에 투여되고 여기에 놓인 오브제들과 공모관계로 엮이는 상황 설정이 작가의 의도인 셈이다. 이는 결국 물질과 비물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는 체험을 겪게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의 가능태로서의 공간, 생성태로서의 활성적 공간, 무한한 잠재성으로 들끓는 공간 연출이다. 지극히 얇고 어둡고 몇 개의 단서 같은 붓질이 던져진 것들 사이에서 마구 피어나는 활력의 미세한 흐름을 감지하게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 설치가 그의 그림과 같은 어법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번 갤러리분도에서의 작업은 2014년 전시와 거의 동일해 보인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그려낸 산수화의 변형그림은 흡사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연상시키는데 화면 가득 필세만이 차있다. 평면작업과 설치작업이 함께 선보이고 광목에 힘찬 필선 몇 개로 그려진 그의 대표작인 <폭포>도 빠짐이 없다. 치바시게오의 표현대로 “폭포의 형태가 아니라 폭포가 있는 공간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으로서 “어떤 형태가 되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움직이는 사물이 되고 있다.” 작가는 광목위에 검은 먹과 붓질 그리고 물을 가지고 모종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고 그 행위가 화면에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와 무관한 상도 아니다. 광목천의 표면위에 응고되고 스며들고 들러붙은 얼룩들이 그대로 매력적인 상황, 사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들은 기꺼이 누런 광목천 위에 먹물이 문질러지고 스며들고 번져나가거나 튕겨진 자취를 통해 모종의 상황을 연상할 수 있다. <폭포>라는 제목을 달았기에 이를 통해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물줄기와 그 굉음, 부서지는 물보라, 그로인해 움찔하는 내 몸이 감각들, 주변의 자연공간의 떨림을 추체험하게 된다. 화면은 무한한 생성과정을 가장 간소한 꼴로 보존하며 일종의 역동적 이미지로서 무한한 풍부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전략이다. 나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억을 반추시키고 꿈꾸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욕망을 짐짓 억누르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한다. 나는 이 폭포 그림과 같은 것이 그가 제일 잘하는 영역이라고 본다. 사실 그는 이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이전에 윤규홍의 지적처럼 그는 “자신의 패턴으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새로운 패턴이라는 역설”을 시도하는 작가다.  
우리 화단에서 많은 이들은 김호득을 “한국 동양화계가 처해있는 난관을 헤쳐 나갈 남다른 처방전을 가지고 있는 작가”(박춘호)로 인식하고 있다. 동양화를 동시대의 현대미술로 하고자 하는 욕망이 큰 그는 그런 시도를 지속해왔고 일정한 성과를 내왔다. 그러나 새삼 그의 90년대 초 이후의 작업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현란한 여러 시도들이 동시대 현대미술과의 여러 유사성 아래 풀려나오고 있음을 본다. 그의 독자성은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그만의 필력으로 전달하는 데서 나오는데 감각인데 그것이 이후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엿보는 유사한 설치, 연출 작업들과의 친연성 아래 풀려나오는 것은 다소 아쉽다.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통해 이미 익숙해진 타장르의 것들과 엇비슷한 것을 시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동양화작업의 현대화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동양화의 현대적 작업’이란 과제 같은 것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하여간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그의 득의작이라고 여기는 <폭포>(여전히 구체적인 자연이미지를 매개로 한)를 여전히 빼놓지 않고 선보인다. 나는 그 <폭포>가 시간이 지나고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아주 곤죽이 될 때까지 나아가는, 현기증 경지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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