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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 시간과 기억의 단면

박영택



김수지- 시간과 기억의 단면

 


김수지의 작업은 얇고 투명한 한지 띠를 한 겹씩 조밀하게 말아서 원형 혹은 사각형의 덩어리로 만든 것이다. 그 덩어리 안에는 다시 무수한 원형들 내지는 유기적인 선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반복해서 선회하고 있다. 중심부에서 밖을 향해 말려나가는 것들이 적당한 크기를 이루어 특정한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일정한 프레임에 의해 강제된 형태가 선험적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종이의 물성을 체적 화 시킨 작업, 이른바 조각적인 작업이자 오브제 작업에 해당한다. 동시에 납작한 회화적 화면을 유지한 것으로, 물감과 붓질이란 전형적인 회화적 매체와 방법론을 대신해 다양한 색상을 지닌 한지(레디메이드)를 선택해 그것을 확장시키고 일으켜 세워 벽에 부착해 놓은 평면 작업이기도 하다. 직립한 관자의 시선에 한지를 말아 이룬 형태의 윗면을 응시하게 해주어 생겨난 평면이 그림, 회화가 된 셈이다. 다시 말해 원형으로 말아놓은 한지 띠의 납작한 면이 회화적인 화면(색채와 선이 자리한)을 형성해서 보는 이의 시선에 풍요로운 시각이미지를 안긴다. 마치 나이테나 식물의 단면을 잘라낸 자리, 혹은 덩어리를 날카롭게 잘라내어 불가피하게 남겨진 자리, 바깥에 의해 감싸여지고 가려져 있기에 결코 바라볼 수 없는 내부, 가시적 세계와는 무관했던 그 심층의 자리를 순간 홀연히 노출시켜 내는 묘한 쾌감을 발생시킨다. 물론 그것은 잘라낸 단면의 자리가 아니라 단면처럼 보이는, 한지 띠를 감아 형성된 윗부분의 결이 불가피하게 만들어낸 자취다.

 

동심원을 그리며 치밀하고 다소 빽빽하게 밀집된 이 종이들은 크기를 달리한 원형, 사이사이로 개입한 다양한 색상의 한지들, 그리고 방향을 달리하면서 꺾이고 밀려서 이룬 다채로운 선들로 인해 변화무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들이 다분히 기하학적인 형태나 동심원 같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직하거나 명도가 같은 보색을 병렬시켜 색채의 긴장상태를 유발 내지 색채의 장력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옵아트적인 화면을 만들어 낸다. 그로인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거나 묘한 환각을 선사해준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한지 띠들의 겹침으로 인해 자연스레 만들어진 선/결로 인해서이다. 모필의 선을 대신해 한지 띠의 반복적인 겹침과 밀착,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선 말이다. 한지 띠와 그것들이 이룬 자연스러운 물결과도 같은 선으로 이루어진 이 작업은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재료 체험으로부터 연유하는 한편 그것의 확장된 결과로 보인다.

이 작업은 다양한 종이의 만남과 관계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얇은 종이의 단면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거나 불충분하다면 그것들이 여러 장 겹쳐서 일정한 볼륨을 갖게 되자 비로소 가시적인 존재가 되고 모종의 화면/회화가 되었다. 더구나 종이의 단면이 모여서 결/선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각기 다른 색상의 한지 띠들이 그 사이로 개입되면서 다채로운 색채들의 파장으로 이루어진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화면이 되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레디메이드를 활용해서 그것을 또 다른 존재로 변용하고 색다른 미적 감수성을 유발시키는 작업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색상의 차이를 지닌 한지들 간의 만남과 결합이 결정적이다. 색의 선택은 직관적이지만 유사한 색채들 간의 긴밀한 조화, 만남이 우선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러니 만남의 양상이 작업을 규정하고 만남이라는 조건이 만나는 것들의 발생을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만남은 만나는 것들을 산출하고, 그런 만남 속에서 어떤 변용을 야기한다는 얘기다. 어쩌면 작가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한지 띠들과의 만남, 다양한 색상을 지닌 그것들의 결합과 배열을 통해 발생한 변용을 감수성의 영역 안으로 흡수해낸다. 그 자연적인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작업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나로서는 바로 그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힘에 의해 밀려나는 자연스러움이 보다 두드러졌으면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 공예적인 틀에 갇혀버릴 수 있다.

작가에 의하면 이 얇고 가벼운 한지 띠를 지속해서 감고 있다 보면 마치 지난 시간과 기억을 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과 기억을 하나씩 감아낸다면, 감아낼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리지고 소멸한 지난 시간의 흔적들, 기억들을 차분히 감아내고 집적시켜 그것을 견고한 틀 안에 가두고 싶다는, 그러니까 지질 시대 나무의 진액이 굳어서 만들어진 호박 속에 갇힌 곤충들처럼 그것들을 온전히 간직하고자 하는, 봉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마도 현재의 작업으로 나온 것 같다. 한지 띠들을 감아서 만든 형태를 전일적 시점에서 내려다보면 흡사 지난 시간의 그 모든 자취를 한 눈에 조망하게 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게 집적시켜낸 기억과 추억은 매번 유사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유형으로 반복되고 재배열된다. 가지런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선과 주름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증식하는 온갖 상념들을 반복적으로 감아내는, 다분히 강박적인 행위를 통해 마치 잠수 시켜내는 듯한 이 작업은 다분히 자신에 대한 성찰적이고 치유적인 차원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자기 안에 담겨있는 그 무엇인가에 몸을 만들어주고 가시적 존재성을 부여하는 작업 이란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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