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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 너무 어두운 화면에 출몰하는 검은 징후들

박영택

 김명진-너무 어두운 화면에 출몰하는 검은 징후들 



 아주 까만 바탕 화면에 희미한 윤곽, 선들이 점등한다. 그것은 시선에 마지못해 보여 지다 이내 어둠으로 묻히기에 망막은 이내 조바심을 낸다. 이 희박한 장면은 검정과 흰색, 아니 그것들이 뒤섞여 자아내는 이름 지을 수 없는 중간 톤의 색채를 거느리며 침잠한다. 극도로 절제된 색채는 먹색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제한된 색 안에서 금욕적으로 조율되고 반죽된다. 동양화 전공자로서 먹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시연하는 차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냥 캄캄한 배경에서 불현 듯 포착되는 기억, 장면, 무의식의 이미지를 출몰시키는 그림이기에 그런 색채가 요구되는 듯도 하다. 그러니 이 검은 배경은 우선 작가의 이미지가 배양되어 나오는 마음, 기억의 공간, 무의식의 지층, 이미지의 정원 등인 셈이다. 그림이란 애초에 명확한 것의 재현이라기보다 애매하고 잘 보이지 않고 결코 재현되기 어려운 것을 애써 포착하려 하는 일이자 막막한 ‘그것’을 포착하려는 절박한 시도이기에 저 검은 배경에서 기를 쓰고 나오는 그 무엇이다.  


 김명진의 그림에는 마석(자연)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며 사는 일상의 장면이 들어있고 작은 정원에서 키우는 나무들과 보낸 시간, 함께 사는 사람과의 내밀한 심리적 관계,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비극, 유년의 추억과 순간순간 출몰하는 다양한 생각들, 무의식의 지층에 깔려 있는 것들의 출현 등 역시 혼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것은 자신의 정원 안에서 자란난다. 이 ‘눈먼 정원’은 중의적 의미를 거느린다. 하나는 볼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무의식과 기억 등의 탐사와 발굴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한 것인데 우리에게 타자는 결국 미지와 무지의 것이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가 삶이고 사랑이라면 그것은 ‘눈먼 정원’에서의 삶일 것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와 수묵작업으로, 그러나 조금은 색다른 방법론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는 캔버스 표면 위에 한지를 밀착시킨 후 그 위에 탁본한 화선지를 콜라주하고 다시 회화적 성형을 덧입혀 모종의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이 출현하는 어두운 바탕은 심연 같고 혼돈 같아 모든 것이 은닉되고 매몰되어 있는 공간을 암시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회임하고 있는 거대한 기원이자 자신의 의식이 출몰하는 무의식의 바닥일 수도 있고 아직 몸을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 탄생하기 이전의 혼돈된 원초적 공간, 혹은 식물이 자라나는 대지의 바닥, 모든 것들이 발흥하는 마음의 자리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검은 바탕에서 이미지를 하나씩 건져 올리고 특정한 형상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를 길러내는 농부의 손놀림을 닮았다. ( 근작에는 자연에서의 삶의 체험이 반영된 나무를 가꾸거나 옮기는 장면,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우선 탁본한 자잘한 종이 조각, 그 편린들이 모자이크처럼 조밀하게 붙여지면서 화면을 채운다. 농담의 차이에 따라 먹물을 머금은 여러 종이들, 특정 사물의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져 나온 탁본의 자취들이 조심스레 표면으로 불려와 부착되면서, 명암에 의한 차이에 따라 얼굴과 의복, 가느다란 선을 드러낸다. 손으로 찢어낸 거친 조각들은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탁본된 것/선염된 것들이라 먹물의 스밈과 번짐, 농묵의 편차가 그만큼 다채로운 것들이기에 그것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은 다분히 작위적/우연적인 결합으로 인한 연출에 해당하고 나아가 무의식적인 조우, 배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먹물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화선지 바탕 그 자체를 그대로 유지한 부분을 조심스레 배치하고 다시 붓질을 가해 형태를 어느 정도 추슬러 나가는 과정의 반복, 그러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근거에서 나온 조각들이, 의도되지 않은 먹물의 상황이 우연히 어우러져 빚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작업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유심히 그림을 살펴보면 이 자잘한 조각들이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조각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듯 구축해서 이미지를 만들고 먹의 농담변화와 칠해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과의 섬세한 차이를 고려해 원하는 장면을 구성해나가는 시도는 장인적인 기술에 의지해 있다. 기존 동양화 작업이 보여주는 모필의 구사, 붓질을 대신해 콜라주를 통한 손의 직접적 운용이란 직접적인 신체적 행위의 소산이고 이는 다분히 조각적 방법론이다. 붓으로 그리는 일보다 종이를 찢고 이를 표면에 밀착시켜 저부조의 깊이와 촉각적인 피부를 만들어내기에 그렇다. 특히나 얼굴 부분을 보면 매우 입체적인 느낌, 마치 흙으로 두상을 빚듯, 종이 조각들을 점토처럼 다루며 하나씩 붙여나가 입체감을 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자개의 끊음질 기법’을 연상시키는 가는 선의 부착은 드문드문 이어지면서 어둡고 정적인 화면에 생성적이고 활력적인 기운을 비춘다. 이 가늘고 예민한 선은 무척 감각적으로 반짝인다. 그것은 일종의 선이자 끈이고 실뜨기의 실, 그네의 줄 또는 타인과 접속되는 관계의 연결고리인가 하면 수면의 파장을 암시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등장한다. 붓으로 긋는 일반적인 선과 달리 얇은 화선지가 표면에 달라붙어 자기 존재를 희박하게 그러나 간절하고 질기게 구현하는 방식은 그것이 그림이자 그림 그리는 작가 자신의 존재론적 성찰로 이어지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지게 한다. 화선지의 콜라주 작업에 해당하기도하는 이 선 역시 전체적으로 자개기법을 연상시킨다. 결국 그의 방법론은 먹물을 머금은, 붓질을 통해 선염으로 채우거나 탁본으로 마련한 조각들을 단호하게 어두운 배경에 조심스레 올려놓아 부착하는 일인데 이는 평면에 촉각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부조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화면에 올라와 붙은 조각들은 까만 어둠에 순간 섬광처럼 출몰하는 빛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의식의 저편에 가라앉아있었던 혹은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던 기억이나 일종의 트라우마라 불릴 만한 것들이 서서히 출현하는 형국일 것이다. 다소 공포스럽거나 ‘언캐니’한 이 이미지는 그네를 타고 있는 어린 소년과 소녀로, 식물에 물을 주는 여자로, 어른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어린아이로(성인이 된 지금이 나를 여전히 지배하는 유년의 기억?), 눈을 가린 체 이상한 구조물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으로(사랑은 일종의 눈이 먼 상태), 실뜨기를 하고 있는 소녀로, 말에 올라탄 남자와 여자로, 땅이나 물위에 부양하고 있는 이들(현실로부터 유리된 혹은 뿌리 뽑힌 삶)로 출몰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마치 무언극의 배우들처럼 무엇인가를 연기한다. 과거의 공간이나 이상적인 상황, 혹은 잔인한 현실을 넘나들며 그리고 너무도 적막하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꼼짝없이 고립되고 정박당한 체 멈춰있다. 지독한 고요함과 기이한 환상성, 상징성으로 가득한 검은 장면, 이상한 징후들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명멸하면서 출몰했다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자꾸만 보였다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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