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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 계절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뒤척이는 나무

박영택

나무의 몸체 안에는 무릇 유한한 생명체인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아득한 시간의 깊이가 있고 사계절의 풍상이 죄다 얽혀있으며 오로지 부동으로, 한 곳에서 받아낸 갖은 사연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오래 산 나무들은 경이롭다. 이런 연유로 옛사람들에게 나무는 큰 스승, 두툼한 책, 더 없이 미적인 존재로 추앙되었다. 선인들은 아름다운 나무를 완상하고 그것과 함께 생애를 보냈다. 우리 옛그림들이란 것도 결국 그런 자연 존재를 관조하고 궁구한 것이자 식물성의 존재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 덕목을 예찬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생생불식 하는 자연에 대한 경이의 시선을 보내고 그 시선을 물화해낸 흔적들인 셈이다. 그러니 한 그루 나무가 미적 대상으로, 관조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단지 외형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동양에서 아름다움이란 형식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정을 길러주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자연이 압축된 존재로 나앉은 나무 한 그루가 더없이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무가 정작 신비로운 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는 점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미를 최상으로 친다. 말없이 한자리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은 세월의 연륜이 쌓일수록 줄기는 더 늠름해지고, 가지는 더 넓게 퍼진다. 희한한 역설이다. 바로 이 점이 시간이 쌓이면 노쇠하고 종국에 소멸하는 사람과 다른 지점이다. 나무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늘상 늠름한 자신의 모습으로 회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존재다. 그것이 바로 나무의 '형성조직'이다. 이처럼 나무란 생명체는 늘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나무에서 태어났다는 이른바 우주목 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크고 오래 살며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은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기도 했다.




illuminate, 장지에 채색, 72.7×90.9cm, 2016


정다은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일련의 나무를 그렸다. 특정 나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나무/자연의 이미지로 보인다. 삶의 동선에서 접한 나무를 오랜 시간 관찰하고 난 후 그 느낌, 기억을 일련의 풍경으로 재구성한 그림이다. 우선 작가는 여러 계절과 시간 속에서 접한 나무들을 사진으로 저장했다. 자연의 운행에 따라 매번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지을 수밖에 없는 나무를 기억하고 그 순간에 보았던 나무에 대한 일련의 감정을 가능한 한 온전히 재현하고자 사진으로 건져 올렸다. 이후 사진들을 다시 재구성(편집)하면서 특정 순간 보았던 나무에 대한 감정, 기억을 되살려 이를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그 결과 다양한 각도(시선), 이질적인 시간, 매번 다른 기억과 감정이 교차한 나무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그로인해 계절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뒤척이는 나무이자 그 나무를 보고 있는 특정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그만의 복잡한 기억이 상호 길항하면서 포착한 나무이미지이자 숲의 풍경이 되었다.


작가는 친수성이 무척 강한 장지에 수 십 번에 걸쳐 색채를 올려놓는다. 그에 따라 깊이 있는 색면을 두른 바탕 면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이는 아득한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영원한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을 은유하는 방법론이자 시간의 깊이로 얻어지는 자연의 색채에 근접하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일 것이다. 이처럼 분채를 기본으로 칠하고 더러 구아슈를 섞는다. 장지가 전해주는 푸근한 맛과 비교적 두툼한 질감이 어우러진 바탕 위로 인접색상들이 단색 톤을 유지하면서 다소 강렬하게, 무수한 '레이어'를 형성하면서 채색되어 있다. 색채는 나무와 잎으로부터 연유하지만 실은 작가의 주관적인 시선과 마음에 의해 번안되어 풀려나온다. 무엇보다도 채색방법이 특이한데 마치 마블링기법처럼 퍼지고 번지면서 색면을 형성하고 그 사이로 다시 조각난 작은 색 조각들이 파고들어 유동하는 형국을 연출한다. 그것은 날카로운 경계선을 지닌 색면이고 파편화된 색채들이자 다분히 영상적인 효과(컴퓨터그래픽이나 픽셀이미지와 같은 효과)로 충만한 화면을 만들어 보인다. 디지털기술과 아날로그적 회화술이 결합한 동양화인 셈이다. 나무는 생명력(기의 운동)으로 충만한 거대한 물적인 존재로 몰려다니고 날카로운 태양 빛이 예리한 여백을 만들며 잎들은 바람에 의해 격렬하게 출렁이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며 약동한다. 아마도 작가는 매번 나무를 보면서 그와 같은 감정적인 체험을 겪고 그 느낌을 이미지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동시에 그 감정, 기억을 정확히 재현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온전히 묘사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면 다만 그러한 분위기, 바로 '그것'을 어떻게 보는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본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관자들에게 자신이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의 전달에 있어 보인다. 작가는 말하기를 관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자신이 나무(자연)를 본 그 순간의 그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을 공유하려는 것이 자신의 그림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그림이 관람자 스스로 제각기 자신만의 추억, 기억, 감상의 폭을 넓히도록 해주는, 그러한 열린 상태가 되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림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주어진 그림을 단서 삼아, 징검다리 삼아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 나무와 숲에서 접했던 그 체험, 기억을 더듬어 보라고 권유받는다. 따라서 그림은 매개로 작동한다. 선인들이 그린 산수화란 것 역시 그런 매개물이었음을 상기해본다.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은 기(氣)에 해당한다. 작가는 외부세계의 풍경(나무) 모티브에 내재하는 기운인 기의 미학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다.




illuminate, 장지에 채색, 60.6×72.7cm, 2015


전통적인 동양미술에서, 화가들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관람자에게는 감흥을 불러일으켜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거나 느끼게 하려 했다. 그 잠재된 것을 실제적인 힘으로 활성화하여 풍경 모티브 속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그려 넣고자 열망한 것이다. 결국 그림의 목적이 재현보다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있었다는 얘기다. 이른바 풍경이 부단히 '탈영토화'되지 않는다면 외부세계를 보거나 조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특유의 분위기로 응결된 풍경을 보는 순간 우리는 특별한 느낌이나 감각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좋은 화가는 친숙하게 영토화 된 풍경을 '탈영토화'하면서 특별한 감각, 충격 등과 비슷한 파괴를 감행하고자 한다. 그런 차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른바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바로 탈영토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모든 그리기는 확장해서 말하면 '탈영토화'에 해당한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이른바 감동이고 전율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기라고 부를 수 있다. 정다은의 나무/숲 그림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러한 탈영토화 된 풍경으로서 모종의 기를 지닌, 영성적인 나무 이미지는 아닐까?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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