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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적 효과를 지닌 낯선 얼굴들

박영택

오늘날 예술의 의무는 특이하고 가치 있는 것, 흥미로운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오래 전에 실러는 예술가를 '낯선 구조물'을 만드는 이라고 정의 한 바 있다. 이미 존재하거나 익숙한 것이 아닌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이후 삶의 풍경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온갖 물건들로 뒤덮이게 되고, 이는 일상을 온통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으로 바꿔놓았으며 자연스레 사람들의 의식과 감각도 변화시켜놓았다. 페티시즘과 오브제 미술은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익숙한, 익숙하지 않은 재료와 방법론으로 작가들은 '낯선 구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안기고 낯선 감각을 자아내며 기존 개념어로 규정된 사물과 세계를 죄 씻어내려 한다. 흔히 말하듯 예술이란 상식적인 삶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형식으로서의 삶을 사는 방식이기에, 또한 자기식의 인식지도 그리기를 통해서 세계를 재편하는 일에 복무 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몸과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진 미술작품은, 그 안에 담긴 사물과 세계에 대한 해석과 재현은 이미 존재했었던,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다. 실용적 차원의 물건과는 다른 차원에 놓인 낯선 구조물은 매 순간 특정하게, 우리의 감각이 흐르는 신체에 우리의 느낌이 만들어내는 기호를 그리는 것이다. 그러니 미술이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압도하고 직관에 대해 초과를 일으키는 모종의 현상이 된다. 따라서 좋은 그림은 개념적 대상의 대상성을 넘어서 순수한 현상의 현상성을 드러내며 나아가 보이는 것 안에 내포된 보이지 않는 것의 효과, 즉 시선의 역설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다. 미술작품의 현상성이란 우리의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시선 안에서의 보여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보여 지는 것이 나의 시선 아래 완전히 파악되지는 못한다. 아니 결코 파악될 수도 없다. 그러니 미술은 가시성의 영역 너머의 것을 지시하는 일에 관여된다.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의 길을 순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작품은 가시성에서 미끄러져 비가시성으로의 길을 설핏 열어젖히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불현 듯 떠올려주는 것들이다. 시선의 역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강경구, 김나리, 안창홍은 동양화, 조각, 서양화 장르에 속한 작가들이지만 사실 그런 장르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강경구와 안창홍의 회화작업과 김나리의 입체작업은 매체의 차이에 불과하다. 이들은 각기 익숙한 재료, 자신들이 잘 다루는 무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만들어낸다. 약간은 낯선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외형적인 공유성은 바로 인간의 얼굴(얼굴과 함께 연결된 몸) 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각기 자신의 감각적인 형상을 통해 사람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종의 그 얼굴 형상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재현의 수단이기보다는 어떤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실제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하고는 무관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존재와 자신의 내면과 현실적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형상을 품고 있는 그런 얼굴이다. 이들이 그리고, 만든 얼굴은 비교적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그 너머로 유인하는 통로가 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얼굴이야말로...건물과 사물의 외관이 모방해내지 못하는 마주함의 예외적 사건이 근원적으로 일어나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얼굴은 단지 외형적인 어떤 것의 다가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선으로 주어지는 것을 통해 일종의 (도움과 책임에 대한 부름 내지 호소로서의) 목소리로 나아가게 만들며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 즉 윤리적 책임으로 까지 전환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미술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면 작가가 만든, 재현한 얼굴형상이 단지 단순한 모방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타자의 얼굴을 대면시키고 떠올려주는 일이 된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일이고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윤리적 대응의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이른바 아이콘적 효과가 그것이다.


이들이 그리고 만든 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지만 특정인의 얼굴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이자 기호로서의 인간 얼굴이다. 그것은 외관이나 대상에 얽매이는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지할 수 있는 영역들이 무화되어버린 추상적인 얼굴도 아니다. 닮음 꼴에 치중한 구상화도 아니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미적인 얼굴은 더더욱 아니다. 이른바 바라보는 시선의 충만 아래 놓는 우상의 효과가 아니라 얼굴을 통해서 얼굴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키는 그런 얼굴 아이콘이다. 그 얼굴은 구체적인 삶에서 나온 얼굴들이고 작가 자신들의 얼굴이자 숱한 타자의 얼굴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 신체와 그의 삶을 떠올려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삶이란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얼굴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삶을 환기하고 발언하고 타자의 삶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소통하고자 한다. 그 익명의 얼굴과 응대하고자 하며 그 소리에 반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기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얼굴은 출현한다. 따라서 이들의 얼굴 형상은 단지 얼굴의 모방, 재현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하는 얼굴들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행해진 것, 만들어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강경구, 悲歌 2,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116.7x91cm


강경구의 흑백 그림 안에서 음각의 선들은 실루엣을 남긴다. 바탕 면을 긁어서, 비워서 만든 선이 벌거벗은 남자의 전신상과 여자상을 안겨주거나 사마귀의 형상을 남겨준다. 모필을 대신해 날카로운 도구가 표면의 물감 층을 벗겨내서 만든 유연한 선이 이미지/형상을 안긴다. 그 형상은 작가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동시대 인간존재에 대한(자신을 포함 한) 풍자와 비유를 함축한 표정을 짓고 있다. 흑백의 단순하고 힘 있는 색상대비 아래 거침없이 흐르는 단호하고 결연한 선들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감정을 산개하면서 지극히 편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만든다. 수묵화와 전각, 목판화와 모필 드로잉의 모든 형식과 매력이 두루 공존하는 그림이자 그로인해 두드러지는 선의 맛이 결정적으로 돋보인다. 기본적으로 모필이 바탕이 되고 수묵화의 경험아래 탄탄하게 조율된 흑백의 구성은 그 안에 전각과 목판화에 대한 작가의 내공을 두루 탑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재료체험이나 방법론은 동양화의 한정된 틀에 대한 작가의 의식적인 확장 내지는 새로운 소통의 차원에 대한 모색과 연동되어 있다. 모필이나 칼을 넘어 근작에는 뾰족한 도구로 각인한 결정적인 선으로 거침없이, 자연스레 그려낸 얼굴/몸의 형상은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과 인간에 대한 풍부한 담론의 서술에 기여한다. 모종의 아이콘 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얼굴 형상이다.



김나리, 길 찾기, 2016, Ceramics, 29x35x74cm


김나리는 흙으로 인간의 얼굴, 그 정면상을 정직하게 빚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은 오로지 얼굴 하나로 이 세계와 독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고독하고 결연하다. 그 얼굴은 한 인간의 전부로 나앉아있다. 보는 이들은 이 얼굴을 차마 외면하기 어렵다. 자신의 얼굴이자 타인의 얼굴이고 망각될 수 없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속해서 변형된다. 손바닥 안에 은거하거나 도깨비형상으로 변이되거나 불상과 겹치는가 하면 또 다른 존재와 혼거하고 있다. 다양한 변신이 이루어지고 혼성을 거듭한다. 구상적 형식에 초현실적인 전략이 교차하고 있다. 이 가변성은 작가가 얼굴에 부여하는 일종의 애도의 전략이다. 애도란 상실을 처리하고 슬픔을 견디며 메우는 일이다. 한편 현실에 대응하는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특정한 시선의 전제가 아니라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 시대라는 시각적 장을 응시하는 투사적 성격이 짙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얼굴 하나로 그는 자신의 시대, 현실,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눈을 떼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얼굴형상을 보는 이들은 역시 저 단호하고 깊고 또렷한 얼굴에 자기 얼굴을 올려놓고 싶어지거나 저런 얼굴 하나로 다시 살고자 한다.



안창홍, 떠 있는 얼굴, 1991, 아크릴 위에 아크릴 물감, 58x76cm


안창홍의 얼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의 전형적인 도상의 역할을 해왔다. 화려한 방법론을 통해 보여주는 그 얼굴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성된 창조적인 얼굴이고 존재하지 않는 얼굴, 그러니 작가에 의해 새롭게 존재하는 얼굴형상이다. 그로테스크하고 무섭고 흉측해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은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의 재현이라는 그간 미술사에서 관습적으로 재현되어 온 그 모든 얼굴을 뒤덮는다. 또한 유사한 방법론과 기술적 측면 역시 거침없이 망실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화려한 솜씨가 두드러진다. 이처럼 그는 기존의 미적이고 상투적인 아름다움에 저항한다. 그것은 소재와 기법, 모두에 대한 의도적 일탈로 자행된다. 작가는 얼굴 너머의 얼굴, 그리지 못하는 얼굴, 숨기고 있는 얼굴, 혹은 자신이 보고 만 얼굴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억압되거나 가려졌던 것들을 죄다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니 그가 그려낸 얼굴은 일종의 복원된 얼굴들이고 환생한 얼굴에 해당한다. 누구의 얼굴이 아닌 역사와 현실 속에서 망각되거나 문화와 문명 아래 억압됐거나 혹은 제도와 권력, 이성과 내면에 의해 감추어졌던 그 모든 얼굴들을 호명하고 있다. 얼굴의 종류, 사연만큼이나 그 얼굴들을 그려내는 그의 기법, 방법론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채로운 기법으로 등장하는 안창홍의 얼굴 형상은 이 속악한 현실로부터 발견한 인간 군상들의 초상이고 각자의 내면에 감춰둔 비밀스러운 얼굴이기도 하고 외면에 가려진 어둡고 눅눅하게 지워지고 불어터진, 그래서 차마 볼 수 없었던 저 안에 자리한 비가시적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이 홀연 가시적 상태로 출몰한 것이다.


늘상 예술가들은 시대의 불안정과 내면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치유하고자 해왔다.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어느 면에서 여전히 샤먼들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세 사람은 모두 얼굴 형상을 재현한다. 그 얼굴은 익숙한 얼굴의 재현과는 조금 다르다. 단지 도상에 머물지도 않는다. 형상은 보는 것에 달라붙은 쾌락이나 미적 즐거움을 동반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이들은 얼굴을 빌어, 그 형상을 통해 인간에 대해, 현실과 시대에 대해, 개개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모종의 내밀한 의식들을 선보이고자 한다. 얼굴이란 형상, 그 아이콘 적 효과를 지닌 얼굴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시대와 현실에 대한 나름의 의식(ritual)을 치르고 있다. 


■ 박영택


<낯선 얼굴: 강경구, 김나리, 안창홍> 전시서문

2016.10.21-11.20

갤러리 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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