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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광칠 / 연잎으로 이루어진 유토피아

박영택

화면은 온통 초록의 연잎으로 가득하다. 연꽃 밭의 어느 한 부분을 앞으로 잡아당긴 화각이자 연꽃, 연잎 그리고 그 주변의 미세한 생명체들을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독대하게 해주는 화면 구성이다. 우산처럼 혹은 구름처럼 펼쳐진 연잎 아래로 꽃과 개구리, 새와 뭇 생명체들이 조심스레 공존하는 이 장면은 흡사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엿보는 선비들의 은거정황의 한 장면 또한 연상시킨다. 산수화가 옛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 공간을 가설하는 차원에서 그려졌다면 그래서 일종의 유토피아의식과 낙원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권광칠의 연꽃 그림 역시 모종의 그러한 공간에 대한 염원을 드리우고 있다는 생각이다. 연꽃이라는 도상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에의 이해와 그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마음을 환생하려는 의지들이 이 그림에 잠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니 그는 연꽃과 그 주변의 여러 생명체를 부적처럼 두르며 공들여 그리고 그것들로 자기 삶의 공간을 채워나간다.



然蓮(연연), 장지에 채색, 72.7×116.8cm, 2015


전통적인 유토피아의 핵심적 장소는 자연과 정원이다. 흔히 유토피아의 가장 오래된 예로서 정원을 꼽는데 장방형의 페르시아 전통 정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각각은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하늘, 땅, 물, 식물)를 표현하는데 그 중심에는 분수, 사원과 같은 신성한 공간이 있다. 여기서 분수는 사막지대의 불모성에 대한 항거의 표시다. 에덴동산이나 낙원은 모두 그러한 정원의 또 다른 버전으로 등장한다. 동양의 산수화 역시 그러한 낙원개념에 기반 했다. 인물산수화란 종국에 인간이 거처할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적 공간의 현시가 아닐까? 현실계의 대척점에 마련된 자리이자 실제 공간, 장소를 잊고 싶고 맞서고 싶다는 욕망의 소산이다. '몸의 슬픈 위상학'(푸코)을 던질 수 있는 장소의 마련, 영원한 자연 속에 고요히 은거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구, 현실계에서 더 이상 상처받거나 고통 받지 않겠다는 의지, 그래서 신선이 되거나 다른 장소, 다른 몸의 희구 등이 복합적으로 내재한 그림이기도 하다. 근대는 그러한 꿈과 욕망을 납작하게 문질러버렸다. 유토피아와 연결고리를 갖던 자연은 망각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된 장소성은 지워졌다. 자연으로부터의 급속한 이탈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도시 속의 다양한 공간들이 유토피아를 대신하거나 자본이 그 욕망을 대체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자연공간을 생의 조건으로 살아온 이들은 도시 공간에서 산 자들과는 다른 감각, 욕망, 장소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에 따른 일종의 유토피아에 대한 의식을 벼리고 있을 수 있다. 권광칠은 강원도의 자연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철원들녘과 초록의 나무들과 다양한 생명체들의 약진으로 울울한 자연 사이를 헤매고 다녔던 추억들이 그의 몸을 만들었고 기억을, 감각을 욕망을 형성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미감을 형성했으며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미학이 바로 우리 전통 미술이었다. 그의 그림 역시 그러한 전통에 기대고 있다. 


작가가 경험한 유년기의 자연은 원초적인 미의식과 색채감각을 안겨주었을 뿐더러 그의 심성을 주조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고향을 떠난 이후 도시에서 살면서도 그 시절의 자연, 녹색, 일종의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이를 그림 안으로 호명한다. 녹색의 무한한 변주를 지닌 자연의 색상은 그에게 원초적인 색채감각을 안겨주었을 것이며 그곳의 모든 생명체들은 우선적인 시각적 대상이었을 것이다. 삶이란 장소와 결합되는 것이고 인간의 정체성과 장소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바슐라르의 말처럼 '자아가 살고 있는 장소들을 탐사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然蓮(연연), 장지에 채색, 90×116cm, 2015


권광칠의 그림은 연꽃, 연잎과 청개구리나 작은 새가 등장하는 채색화다. 초록의 바탕 면에 몇 가지 도상들이 재배치를 이룬다. 장지에 분채를 공들여 겹칠 해서 이룬 견고하고 조밀한 그림이자 거대한 색채덩어리로 다가오는 그림이다. 맑고 싱그럽고 환하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초록으로 빛난다. 그의 기억 속 자연은 단호한 녹색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화면을 깊게 물들인다. 아니 화면 전체를 자연의 기억, 그 기억화 된 색채로 적신다. 이때 초록은 연잎을 빌어 착색된다. 그러니 연잎, 연꽃은 구체적인 대상인 동시에 자연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색채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매개가 된다. 다분히 심리적인 막으로도 기능한다. 물론 이 매개물은 자연 속의 또 다른 자연이자 전통미술 속에서 부여받은 상징적 의미망을 여전히 두텁게 두르고 있다. 연꽃은 고래로 '꽃 중의 꽃'이자 성스러운 꽃으로 인식되었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조금도 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자태로 꽃을 피워 내는 그 연꽃의 모습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으면서 욕심 없이 사는 선비정신을 엿보기에 즐겨 그린다고 한다. 더불어 연잎은 자기 안에 물이 어느 정도 고이면 버릴 줄 아는 것이기에 그 덕목을 내재화하고자 하는 욕구로도 그려진다. 권광칠이 연꽃을 그리는 이유는 이렇게 여러 의미를 거느리고 있다.


'연꽃이란 소재를 전통 채색화에 빗대어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 속에 생명력과 따스함이 묻어나고 일상의 한가로운 풍경 속에 우연히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개구리의 생명체가 연꽃과 잘 연계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작품을 하면서 知天命에서 耳順이 되니 이젠 연꽃에 빠져보고 싶은 마음과 군자의 자세로 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권광칠)


연꽃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연을 우리 전통미술, 문화의 문맥 체계 안에서 읽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그는 우리 전통미술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한다. 동시에 자연을 나와 분리된 객체로 여기는 게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들을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망 아래 사유하는 동시에 인간이 추구할 가치나 심성이 내재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이 역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자 보편적인 사유방식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그림은 전통시대에 그려진 연꽃그림의 도상학적 의미를 반추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선인들이 자연을 보던 시선과 마음을 현재 자신이 다시 반복하고 기억하면서 모종의 연결고리를 찾는 행위로 보인다.


연잎의 내부로 육박하는 구도와 전체적으로 균질하고 단일한 색채로 물든 색 면 추상과도 같은 화면은 지극히 평면적으로 다가온다. 그 내부는 치밀한 묘사가 공존하고 있다. 맑고 투명한 색채의 맛이 채색의 무거움과 불투명성을 가볍게 휘발시키는 편이다. 연잎의 형태와 줄기, 그 사이사이에 피어난 연꽃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자리한 개구리 혹은 작은 새들은 뭇생명체들이 혼거하고 조화를 이루는 거대한 생태계이자 그곳의 엄정한 법칙과 순환을 연상시키는 축소된 자연계를 암시한다. 식물계와 동물계가 공존하고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이 함께 하는 자연이다. 무엇보다 자연은 싱싱하고 활력적이며 청명하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수사는 모두 자연이 지닌 생명력과 연관된다. 그곳은 모든 생명체가 발아되고 회임되는 거대한 공간이다. 작가는 관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마치 자연 공간 속에 있는 듯한, 평온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의 그림에서 자연은 현실계의 저편에 자리한 일종의 유토피아로 자리한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이다. 그것은 연꽃이 가득한 정원을 마련하는 일이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관자들에게 선사하는 일이자 저 지치지 않는 녹색의 싱그러움과 생생함, 약동하는 생명체의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활력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 안에서 군자처럼 거하고 싶다는 작가의 생의 욕망이 새삼스럽다. 그 같은 욕망은 우리 몸 바깥에 자리할 유토피아를 희구하는 마음이고 그것이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고 간절함을 그는 정치한 채색으로 이룬 그림을 통해 일러준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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