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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화 / 감수성으로 빚어진 흐린 풍경

박영택

감수성으로 빚어진 흐린 풍경


자신의 신체를 둘러싼 외계가 풍경이라면 그것은 몸에 대한 상대적 거리 속에서 자리한다. 풍경은 내 몸과 한 쌍을 이루는 또 다른 몸, 타자이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몸을 가진 내가 내 몸 밖의, 저 몸에 대한 일종의 반응을 시각화하는 일이다. 반응은 일방적일 수 없기에 상호 참조적이며 관계적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 반응들이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게 얽혀 들어가며 이루는 일이다. 우리가 풍경을 본다는 것은 이미 그 풍경에 대한 일정한 지식,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입견과 모종의 상투적 관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풍경그림은 일정한 표상시스템에 따라 자연을 이미지로 재현한 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특정 대상을 자연이라고 규정하고 인식하는 일이자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표상되어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자연이라고 표상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바로 풍경그림이다. 



2015 박춘화 개인전 포스터


그런데 풍경은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자 작가의 세계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러니까 풍경은 중립적 대상이나 고정된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인식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부여된다. 동시에 좋은 그림은 틀에 박힌 표상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른바'드라마'가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학습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드라마 없이, 오로지 풍경을 그 자체로만 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세잔은 풍경을 '개처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눈처럼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바라보라는 말이다. 세계를 볼 때 학습된 눈으로, 선입견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험적으로 규정되고 학습된 것, 일정한 틀이 되고 규범이 되는 자연관을 의심하고 지우고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고정관념으로부터 부단히 탈주하는 것, 관습적으로 받아들인 세계에 대한 해석과 감정을 지우고 매번 그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좋은 그림이 피어난다.


박춘화는 자신의 일상에서 문득 다가와 박힌 자연 풍경에 주목했다. 그 풍경들은 특정한 계절과 날씨, 기후와 분위기에 절여져 있다. 다양한 계절의 흐름이 있고 나무와 풀들은 뒤척이며 그 사이에 몇몇 사람들이 돌처럼 박혀 있다. 그 장면은 명확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만이 경험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 지나치면서 접하는 무수한 풍경에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긴 어렵다. 작가는 바로 그렇게 언어화시킬 수 없는, 모호하고 난해한 감정을 유발한 특정 장소, 시간, 계절에서 느낀 감정을 어렵게 시각화하고자 한다. 장지에 아크릴로 그려진 구상화(채색화)지만 동시에 한 작가의 감수성에 의해 판독되고 내면의 감각으로 적셔진 그림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투명한 막에 의해 씌워진 효과를 주며 눅눅한 습성에 의해 가라앉고 있다. 흐릿한 윤곽, 중간 톤의 색채, 흔들리는 형상, 그리고 수수께끼처럼 박힌 점경의 인물들로 인해 그림은 구상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구체적인 풍경이면서도 문득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자신이 접한 풍경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번짐, 그 위로 겹쳐지는 이전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여러 감정의 흔들림을 마주하고는 '그것'을 그리고자 한 것 같다. 자연/타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다. 그것이 어느 날 자신에게 다가와 감정의 파문을 일으키는가 하면 익숙한 세계에 구멍을 내고 파열음을 만들어낸다.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 다가옴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강한 힘을 발산한다. 낯설음이란 특정한 외부의 경험에 의해 생성된 내적인 심리상태를 지칭한다. 


박춘화가 그린 그림은 분명 특정 풍경이고 숲이나 나무를 연상시키는 흔적이지만 동시에 화면을 덮고 있는 물감의 층위이고 색채를 머금고 있는 활성적인 물질이자 촘촘한 붓질을 전달하는 신체성의 기록이고 자연에서 경험한 인상과 기억의 목록이자 자기 몸의 반응을 기술한 텍스트다. 자신이 대면한 세계에 대한 반응을 촉각적인 물질로 성형한 것이다. 모든 재현이란 결국 '그것'을 그린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언어와 문자로는 규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전달해 준다. 우리는 그 사람만이, 그 작가만이 세계를 접하고 만나 문득 깨달은 그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본 자연을 가능한 한 상투적이고 관습적 시선이 아닌, 그것 자체로 생생하게 접촉할 때 생기는 생소함을 그리고자 한 것 같다. 동시에 충만한 감수성으로 '느낀' 자연을 그리고 있다.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어 자신의 감정으로 덧칠한, 그렇게 새롭게 환생한 자연을 다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자 풍경은 비로소 의미의 대상이 아닌'의미의 주체'가 된다. 알려진 모든 선입견과 편견이 지워진 지점에서의 풍경과의 우연한 만남, 맞닥뜨림, 그리고 이로부터 출현한 또 다른 가능한 세계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 좋은 풍경화다. 박춘화가 그린 그림은 분명 여기, 이곳의 풍경이지만 동시에 이곳에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 있는 묘한 풍경이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시각과 비시각,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 위치한 모호한 풍경이 되었다. 결국 작가가 그린 풍경은 특정 대상의 외양이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내부의 온갖 것들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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