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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 / 삶에 면면히 흐르는 생명력

박영택

삶에 면면히 흐르는 생명력


예술이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한 형태일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렇다. 일종의 알리바이란 예기다. 생각해보면 화가가 겪은 모든 고통과 체험은 전적으로 그의 것이다. 타인의 것이 되기 힘들다. 그러니 개인의 심리나 정신 또한 온전히 재현되거나 객관적으로 전달되기 힘든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전적으로 '나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들은 한 명의 개인으로서, 혹은 단독자로서 절대적 역할 앞에 서 있다. 그 길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길이다. 화가란 스스로 보는 이고 그렇게 혼자 느끼고 깨닫고 인식한 것을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으로 시각화 시키는 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나아가 화가는 더욱 고독한 자다. 키에르 케고르 식으로 말하자면 '멜랑콜리의 주체'들이다.


최경선의 그림은 자신의 삶의 동선에서, 문득 마주친 것들이다. 비근한 일상의 모습이면서도 그것이 명확히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모호한 이미지들이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몇 명의 인부들, 들에 불을 놓는 농부의 뒷모습, 길 위에 서 있는 이들, 뛰어 노는 아이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여인 등이다. 무심코 지나다 본 장면이고 먼발치에서 본 인간들이다. 화면 속의 인물은 특정한 공간에 자리한 인간들인데 그들과 공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집으로 가는 길, 캔버스에 유채, 45×38cm, 2015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산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탄생한다. 모든 공간은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인 셈이다. 인간의 감각활동의 하나인 예술 역시 주어진 공간에 제약을 받고 그 공간에서 파생된 삶의 체험과 감각, 느낌의 결정체를 말한다. 풍경을 다룬 이미지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 볼 것인가가 모든 예술행위의 근간인 것이다. 최경선은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남다른 시선으로 훑는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 마음으로 본 것을 다시 그린다. 그 그리기는 문득 다가와 박힌 것에 대한 복기이고 그 낯설음에 대한 의문이자 다소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남긴 것에 대한 상기다. 막막한 기억을 더듬는 일이고 그 잔상을 소재로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것을 정확히 무엇이라 칭하기 어렵다. 그저 '그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막막하고 막연한 느낌이자 기묘한 감정이고 순간의 이상한 분위기다. 작가는 오로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감정을, 그 분위기를 회화로,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고자 한다. 물감과 붓질, 색채와 형상, 그려진 부분과 나머지 부분, 구체적인 요소와 암시적인 부분이 공존하는 화면은 다소 모호하고 은유적이다. 분명 화면에는 구체적인 세계의 상이 들어와 있지만 그 장면,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색채와 붓질은 다분히 파편적인 장면을 암시한다.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알레고리적이라고나 할까. 상징이란 뚜렷한 의미를 지닌 대상화인데 반해 알레고리는 상징과 달리 애초에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대상화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사건과 장면, 그리고 인간의 형상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어딘지 애매한 순간을 보여준다. 명확히 지시되기 어려운 장소이자 상황이다. 그저 막연한 분위기가 화면을 점유한다. 그렇게 파편처럼 남겨진 것은 그림을 보는 관자의 몫이다. 관자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이미지를 맞춰나간다. 상상력이란 단편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결합하여 그림을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않은가?


최경선의 그림은 시원스런 붓질과 대담한 화면구성(그려진 부분과 여백의 강렬한 대비 등), 그리고 부분적으로 자리한, 매우 암시적인 인간의 형상이 어우러져 있다. 습성의 물감은 유동적이고 표면을 액체성으로 적신다. 평면성을 강조하면서 표면을 점유한 색채와 그 사이로 문득 떠오르는 재현적 이미지가 공존한다. 과감한 여백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놀이한다. 이미지와 물질,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은 서로 길항하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긴장을 암시한다. 문득 알 수 없는 어느 한 순간의 장면이 강렬하게 부감된다. 남겨진 흔적을 통해 모종의 상황을 연상하게 해준다. 아니 어떤 특별한 감정에 빠지게 한다.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빌려온 이미지의 파편을 통해 그 세계를 감싸고 있는 몇 겹의 분위기와 이면을 유추하게 해주는 통로로서의 그림이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적인 화면 연출, 표피의 층에서 발휘된다. 그런 면에서 최경선의 그림은 감각적인 화면연출, 다분히 영상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선사한다. 일반적인 재현회화와는 다른 구성과 연출로 인해 부감되는 표면의 힘이 있다. 다만 그 표면의 힘이 좀더 밀도가 있었으면 한다.


작가의 근작은 「흐르는 빛」이란 테마 아래 세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각각은 「회복의 방」, 「흐르는 빛」,「Birds」 등이다. 「회복의 방」은 이른바 치유의 공간성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투병으로 인해 병원생활을 하던 중 바라보던 창 밖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농번기에 농부가 논에 불을 놓는 이 장면은 봄의 새 생명을 위해 땅을 정화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병으로 인한 삶의 고통 가운데서 새 희망의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다. 더불어 「엄마의 세상」은 항상 병들고 연약한 동물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의 삶, 공간에 대한 관찰에서 기인한다. 다소 혼돈스러운 엄마의 공간이 실은 보살핌과 치유라는 가치가 발생하는 장소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흐르는 빛」에는 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는 작가의 항구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근작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회복된 자아'이자 '인간 본래의 자아'이며 가장 작가다운 자아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아이들의 형상은 '생명력의 주체로 회복됨을 상징' (작가노트)하고 있다. 「Birds」시리즈는 일상을 꾸리기 위해 일하는 우리네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들은 각자 현실에서 자신들이 기대를 현실화시키는 존재로 표현된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다 좌절 된 인간이 아닌 자연처럼 사는 존재, 그러니까 일할 때와 쉴 때를 아는 것처럼 삶에 순응하는 모습인데 작가에 의하면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영향력을 발하는 존재로 쓰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 친해지고 무질서와 질서가 공존하고 열정과 허무가 뒤섞인, 그러니까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갈등과 치유, 삶과 죽음, 어린아이와 성인, 자연과 인간, 그 사이에서 삶은, 생명은 흐르고 진행된다. 문득 찰나처럼 빛나는 생명의 떨림이 있는, 눈물겨운 장면을 작가는 포착하고자 한다. 그 안에는 죽음을 아우르는 삶에 면면히 흐르는 생명력에 대한 기록과 감사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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