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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이 / 추억의 자연을 호명하는 화면

박영택

추억의 자연을 호명하는 화면


회화는 평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 주어진 평면을 해석, 질문하는 일과 관련된다. 평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어떤 평면을 선택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하다. 바위의 표면이나 그릇의 피부, 나무와 천, 종이 등이 오랜 역사를 간직한 회화의 매체였다. 오늘날은 그러한 전통적 매체에서 벗어나 다양한 매체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천과 종이는 회화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이자 보수적이면서도 매번 새롭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매혹적인 평면, 재료들이다. 



自然回歸, 천·채묵·아크릴채색, 35.5×45cm, 2015



김경이는 흥미롭게도 메리야스나 면천을 바탕으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메리야스나 흰 색 티셔츠 내지는 순수한 면을 지지대로 삼아 그 위에 수묵과 채색으로 풍경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린다. 특정 옷의 형태에서 추출된 면이거나 옷감에서 일정부분 잘라낸 사각의 형태 안에 색과 선을 밀어 넣어 이미지를 안긴다. 작가가 선택한 천은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였던 비단(견)이 아니라 면이다. 인간의 신체에 가장 밀착되는 온화한 면천은 피부에 무리 없이 감겨든다. 작가는 그렇게 따스한 온기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질감을 지닌 면천을 바탕으로 그 안에 물기와 색채를 지닌 질료들을 삼투시킨다.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재료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더불어 작업과정은 일종의 염색과정에 해당한다. 천의 조직 사이로 스며든 물감은 물의 농도와 붓질의 힘에 의해 퍼지고 얼룩지고 겹쳐진다. 이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 해당한다. 부분적으로 희끗거리는 표면이 채 마르기 전에 다시 그 위로 몇 가닥 선과 점이 지나간다. 쓱쓱 그어나간 소박한 선에 쿡쿡 찍어나간 미점이 어우러져 고졸하면서도 소략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안겨준다. 부분적으로 색채가 또한 얹혀 진다.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화면에는 나무와 풀, 꽃을 연상시키는 흔적이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종이와는 달라 매끄럽게 이어지는 선들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끊어지거나 스친 듯한 자취가 어눌하면서도 매력적인 선을 남겨준다. 그 선은 나무나 줄기를 떠올려준다. 더구나 무심하게 찍어놓은 점들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풀이나 꽃처럼 보인다. 그 아래에는 점토를 이용한 작은 오브제를 은밀하게 부착했다. 역시 천으로 감싸여져있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했다. 이 그림은 특정한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기억된 장면, 상상되어진 풍경일 수 있다.



自然回歸, 천·채묵·아크릴채색, 34.5×31cm, 2015



작가는 말하기를 우연히 버려진 화분이 자신에게로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그림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그 화분 하나가 문득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려주었던 것이다. 아침이면 장독대로 감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곤 했다고 말하는 작가는 온갖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자연 속에서 자란 그 시간대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접하는 자연은 가축화된 자연들이 대부분이다. 전선줄에 칭칭 동여매어 있는가하면 가지마다 철사로 비틀어 묶어 놓은 분재 등이 그렇다. 본래의 자연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길들여지거나 기이하게 관리되는 나무와 화분을 보는 순간 작가는 슬픈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저 나무와 풀을 본래의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자 유년시절의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보는 상상이었다. 그러니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슬픈 감정으로 빚어낸 장면이자 유년의 자연공간에 대한 기억의 이미지화인 셈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경험했던 자연과의 추억, 시정이 안개처럼 퍼지고 햇살처럼 반짝이는 그림이 되었다.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깃든 풍경이다. 그렇게 해서 작은 화분, 나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슬쩍 들어가고 자연에서 받은 감흥과 시정은 아련한 색채로 천을 홍건하게 적시면서 퍼져나가고 희미하고 안쓰러운 추억의 이미지들은 간소한 선과 희박한 물성을 지닌 색상으로 응고된다. 그러고 보니 나무처럼 보이는 선은 식물의 줄기를 닮았고 작은 집처럼 보이는, 점토로 붙여놓은 물체는 화분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능한 화분은 화려한 색조로 치장을 했고 나무는 어두운 먹색으로 그려놓아 대조를 이루었다.


결국 그림을 보는 이가 이를 매개 삼아 자유롭게 연상하고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그림은 작가라는 주체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관자의 마음속에 자리하면서 새롭게 생성된다. 어쩌면 그림은 파편 같은 것이다. 관객은 그 파편을 길잡이 삼아 자신의 기억 속의 어느 한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는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 유년의 어느 날, 누군가와의 추억, 그 해 봄날의 꽃들과 바람, 그리고 맹렬하게 사리지다가 순간적으로 환생하는 숱한 장면들을 접하면 된다. 그림은 징검다리와 같아서 보는 이들이 그 작은 돌들에 의지해 어디론가 홀연 가면 된다. 생각해보면 옛사람들이 그린 동양화란 결국 그런 그림이었다. 몇 가닥 선으로 그려놓은 장면이 각자의 뇌 속으로 파고들어 실제의 장면을 연상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른바 통로, 매개로서의 회화다. 그림이 그려지는 화면, 바탕은 기억이 간섭하고 상상이 날개 짓하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이한 통로가 된다. 결국 문제는 주어진 바탕 면에, 화면에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도록 모종의 흔적을 잘 펼쳐놓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자연회귀’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림을 보는 이들이 자신의 화면 안으로 들어가 잊혀진 추억, 지난 시간의 기억, 자연과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을 잠시나마 체험하게 해주고자 하는 의지로 보인다. 허정한 화면 안으로 하염없이 보는 이들의 시선과 마음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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