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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연 / 낯선 도상들의 충돌과 번역

박영택

김태연 / 낯선 도상들의 충돌과 번역



애초에 이미지는 벽으로부터 발원한다. 직립한 인간의 시선에 조응하는 벽이 최초의 화면이 되어주었고 그 벽면에 그리고 새겨진 이미지는 당대 사람들이 기원했던 것들의 서사다. 문자와 책이 부재하던 시절, 벽에 그려진 이미지는 소통의 체계로서 기능하던 서술된 문장이자 기원의 도상이며 나아가 신화와 종교, 주술의 기호적인 이미지들이다. 고대인들의 일상의 기록이자 종교적 숭배의 목적으로 제작된 벽화는 기술되지 못한 지난 역사를 암시해주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상징들이기도 하다. 오히려 문자가 부재했기에 그 이미지의 힘과 절실함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동시대인들에게 그 텍스트로서의 벽화이미지는 아득한 지난 시간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간절한 생의 소망과 인간적인 욕망의 흔적들을 아련하게 보여준다. 상상하게 해준다. 경험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삶과 역사가 동시대로 내려와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블사(marvel社, 寺), 나무, 먹 , 31×18cm, 2014


김태연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시대는 물론 아잔타, 둔황 등의 벽화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이를 재현했다. 프레스코기법으로 이루어진 벽화기법을 재연했고 과거의 도상들을 빌어 그렸다. 이른바 흙 그림이다. 황토 흙의 질감과 속성, 색상이 채색 안료와 만나 이룬 부드럽고 푸근한 바탕이 매력적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결을 간직한 채 문득 과거의 벽화를 대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화면에는 천불도, 만다라, 삼존불, 12보살 입상 등 불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형식을 차용해 상징들을 뒤바꾸고 슬쩍 틀어버린다. 익숙한 형식 안에서 낯섦음, 차이가 발생한다. 심오한 상징의 세계로 구현된 불화는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서, 즉 가피력에 의해서 정각을 얻고자 하는 뜻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만다라의 정신은 마음자리를 바꾸면 수행자가 부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부처의 자리에서 부처의 경개를 그린다는 것이 만나라, 밀교의 정신이다. 만다라는 수행을 통한 성불의 의지를 가시화한 도상이자 질서이다. 그것은 예술적 성취와도 유사하다. 예술가는 수행자와 같다. 작가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저마다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름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것이 작가에게는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작가가 만다라나 불화 형식을 차용해 자신의 현재 삶에서 파생한 문제들을 삽입해 공들여 그려내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이 불교 도상의 재현은 과거의 도상, 벽화를 단순히 복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슬쩍 비틀어서 모종의 '사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재현이면서도 재현의 틀에서 미끄러져나간다. 작가는 과거의 벽화를 빌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그 틈으로 밀어 넣는다. 그것은 과거의 텍스트를 패러디 하는 일이자 그 맥락에 기생하는 일이다. 상이한 시간대를 동일한 지평, 공간에 혼거시키는 일이자 서로 다른 코드의 기호들을 충돌시키고 겹쳐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호, 도상들과 소통을 꾀한다.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는 것은 여행하고, 번역하고, 교환한다는 것을 말한다.'(세르) 그것은 과거 도상의 질서를 단순히 파괴하는 게 아니라 횡단적인 이동이고 그 도상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말을 건네는 일이다. 그렇게 상호교환적인 소통의 체계, 기호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집트인들의 생사관이나 신화, 혹은 그리스인들의 일상적 삶을 반영했던 벽화이미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 교리를 반영하는 벽화이미지를 차용해서 그 내부에 균열을 만들고 내고 있다. 얼핏 보면 오래된 벽화를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그 도상들은 본래의 맥락을 위반하는 이질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당시 시스템 속에 속했던 이들이 열망했던 가치의 도상을 지우고 동시대인들이 꿈꾸는 욕망의 도상을 밀어 넣는다. 작가는 일상의 낯익은 물건, 기호, 이미지, 통신, 과학 등의 문명의 기호들을 차용한다. 이러한 기호들은 마치 고대인들이 벽화에 등장하는 종교적 도상들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일상이자 숭배의 대상들이라는 얘기다. 천불도 각각의 얼굴에는 동시대 작가의 지인들의 얼굴이 들어있는가 온갖 형상을 한 천불도가 컴퓨터 바탕화면에 떠 있는 무수한 폴더로 존재한다. 저마다 아이폰을 들고 '셀카'를 찍는 보살들의 도상도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화면은 컴퓨터나 핸드폰의 바탕화면이 되었고 그 위에 화살표가 얹혀져서 언제든지 손가락만 까닥하면(클릭) 열리는 많은 창들이 떠 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통로이자 또 다른 욕망과 접속되는 장소가 된다. usb기호가 마치 부적처럼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옛사람들이 신성한 신과 접속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차원에서 그려진 종교적 도상들 마냥 오늘날 사람들은 인터넷에 접속되고 usb와 연결되고자 한다. 현대 작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분석하고 성찰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생겨나는 여러 상황에 좀 더 익숙해지고 좀 더 공감하면서 그 상황들을 대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한다. 이 그림은 무엇보다도 숨겨진 도상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안겨준다. 낯설음으로 인한 모종의 충격이나 예기치 못한 조우, 또는 거의 초현실적인 만남의 방법론이 쓰여 지기도 하고 도상의 수집과 배치, 전도 등으로 이루어지는 팝아트의 맥락과도 맞닿아있으며 수많은 도상들의 수집에 따른 오브제 미학의 차원에서도 이해해볼 수 있다.



수태고지 , 흙, 채색, 28×23×3.5cm , 2014


작가는 고대의 벽화이미지와 동시대의 삶에서 발견된 상징, 그러니까 현재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는 도상들을 수집하고 이 둘을 한 공간에 섞는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그려진 벽화는 과거의 것도 아니고 온전히 현재의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사라지고 소멸된 것들 위에 오늘날 욕망하는 것들이 혼거하고 있는 풍경이다. 인간세계에서 진리란 결국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도 소멸하고 종국에는 먼지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흙먼지가 되어 스러지는 것을 반영하는 그림이 김태연의 흙 그림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고대의 벽화와 벽화에 그려진 도상들은 그렇게 사라진 것들을 아련하게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 역시 동시대인들과 동일한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했으며 행복과 초월적 세계를 추구했을 것이다. 당시 벽화이미지는 그것을 생생하게 반영한다. 그래서 과거의 도상들 사이에 현대인들의 생의 욕망의 도상들이 부유한다. 겹쳐진다. 그러니 이것들 또한 일정한 시간의 경과와 함께 사라질 것들이다. 작가는 그 두 개의 도상 사이에서 자신의 생을 투영해본다. 그것은 덧없는 세계에 대한 성찰에 가깝다. '시공간과 문명조차 가상이고 상대적 개념임을 인식하고 가시적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작가노트)



화엄으로 link, 흙에 채색, 95×81cm, 2013


아득한 시간의 결들이 안개처럼 화면을 덮고 있다. 그 막은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삭제시키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한다. 흙 벽화기법으로 인해서 순화된 색채를 머금고 있는 화면은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며 사라지려 한다. 지난 시간대의 고정된 인식의 틀이나 믿음의 체계, 한때 확고했던 진리의 도상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의미해지거나 소멸됨을 퇴락한 벽화의 색상이나 박락된 표면효과를 이용해 가시화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역사를 진화론적으로, 진보적으로만 보려는 사고가 아니라 다분히 순환론적인 인식에 가깝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도상의 종교적 강제력이 무장해제 되는 틈 사이로 낯선 기호들이 충돌한다. 그 낯선 기호로 인해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열린다. 예술은 만드는 것이고 공간을 여는 것이다. 차이를 도입하고 그리고 낯섦을 발생시키는 전략이기도 하다. 기호를 탄생시키고 다르게 읽고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은 주체적일 수밖에 없다. 반역은 또 다른 주체성을 생성하는 에너지이기에 그렇다. 이 차용의 개념은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 번역이 된다. 이는 동화작용을 일컫는다. 서로 닮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러니 번역은 흉내 내기가 아닌 닮아가기와 비슷한 것이다. 작가는 미술을 통해 세상에 말 걸기를 시도한다. 옛사람들이 만든 도상, 기호를 차용해 이를 동시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그렇게 과거를 번역하고 새로운 문맥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로 인해 죽은 도상들이 환생하고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이 동일한 지평에서 서로 소통하며 넘나든다. 기이한 풍경이자 흥미로운 시간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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