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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주 / 유의미한 흔적 만들기

박영택


선사시대인들이 동굴의 내벽에 흔적을 남긴 이후로 '흔적 만들기'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행위가 되었다. 이미지는 결국 흔적이고 미술은 의미심장한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그 흔적에 대한 의미부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른 층위에서 작동되었다. 하여간 미술가들은 오로지 그 일에 전념하는 이들이다. 일정한 평면에 안료나 여타의 물질을 동원해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모종의 흔적을 제작하는 일은 조기주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원초적인 회화이고 본능적인 유희에 해당한다. 작가는 사각형의 캔버스 표면이나 변형화면(원형)위에 물감과 여러 이질적인 재료를 동원해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 나간다. 표면을 새로운 피부로 만드는 한편 그 피부위에 얼룩, 결, 암시적인 흔적을 내려놓는다. 그것은 그림이 물질로 이루어졌음을 실제적으로 증명한다. 이미지가 화면 위 안료의 퇴적물이라는 물리적 실재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작업은 관람자에게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직접적인 실재로서 캔버스에 물감을 쌓아 올리는 일이자 물질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이 흔적은 관람자의 경험에 실질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감을 비롯한 여러 물질들이 보는 이의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미지는 평평한 표면 위의 물감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한편 깊이감에 대한 어떠한 환영도 물리치겠다는 표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흔적은 상상으로 인해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여전히 일루전을 허용하는 화면인 셈이다.



조기주의 화면은 흥미로운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채로운 물질, 색채를 동원해 풍부한 표정을 만들고 있다. 표면은 물감들의 유동과 응고,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자국 그리고 씻겨지거나 긁혀진 자취들이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림을 이루는 물질들의 실질적인 조건과 시간의 흔적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한 작가의 신체적 결과들이 내려앉아 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물질들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채로운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현대미술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물질을 통해 영감을 얻고 그것 자체의 실제적 삶을 추구하면서 풍부한 상상력의 구상을 창안하고자 열망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물질들 안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고 무엇보다 예술과 삶, 예술과 물질을 통합하려 했다. 따라서 미술가는 자신이 선택한 물질과 함께 하는 이이며 그 물질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경험과 시간 안에서 가꾸는 이다. 조기주 역시 모종의 물질들과 함께 하는 생애를 그림 안에서 보여준다. 그림을 이루는 물질과 조건이 그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자체로 남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이른바 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회화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에 따라 작가는 화면을 덮고 있는 색채, 혹은 시멘트나 또 다른 물질들은 물감의 물질성과 색채의 존재성,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감과 색채가 그 자체로 생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 작업은 의도된 그림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우연적이며 제작과정 자체의 결과들이 고스란히 응고되어 있다. 특히 작가는 안료와 다양한 물질을 혼합해서 특별한 질감을 성취하고 있다. 흔적 만들기는 질감, 물질성의 자취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물질들은 동적인 세계상, 이른바 생성적인 화면을 질료화 시키고 있다. 죽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물질, 활력적이며 생성적인 존재로 충만한 물질의 순간을 암시적으로 방증하는 화면이다. 그로인해 무한한 상상력과 환영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분히 물질을 대한 동양적 사고관의 반영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를 화면의 '테마화'라고 말한다. 화면 자체가 테마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작가는 캔버스에 수많은 원형의 점들을 흑연으로 그렸다. 크기를 달리한 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다시 그 화면 위를 흰색으로 도포해서 일종의 막을 형성한다. 더러 흰 물감이 원형을 지우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덧칠되어 있기도 하다. 캔버스는 잇대어 져서 거대한 화면이 되어 마치 전시공간에 벽면을 대체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화면이자 보는 이의 신체를 수용하는 거대한 공간, 벽으로 설치되어 있다. 원은 시간이자 순환의 구조이며 완벽함을 상징한다. 또한 가장 추상적인 하나의 단위로 배열되어 있다. 점들의 크기가 달라지고 배열의 관계에 의해 추상적인 점은 마치 서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르스 부호처럼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처럼 등장하는가 하면 단호하게 칠해진 검은 흑연의 물질을 두르고 있는 그림 안의 그림, 또 다른 공간을 펼쳐 보여준다. 화면 안의 원들은 순환하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풍경을 선사하고 다분히 동양적인 순환론적 시간관 또한 연상시켜준다. 그 원들은 나선형의 회오리나 혹은 태극의 형상을 띄고 자리한다. 그것은 수많은 구조를 연상시킨다. 위에서 아래로 혹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이동한다. 작아지고 커지고,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다 점들은 잦아들면서 어떤 평상심을 보여준다. 이 평상심은 이른바 선禪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원과 연관된 영상작업과 애니메이션도 선보인다. 태극권의 손동작과 이를 바탕으로 표현하는 우주의 탄생, 빅뱅, 생명창조를 담은 영상은 모두 500여장의 드로잉을 연결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것들은 우주와 생명, 탄생과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전개된다.



작가의 또 다른 작업은 변형 캔버스 위에 흑연과 시멘트를 칠한 후 그 위에 우연적인 얼룩처럼 물감덩어리가 부착되어 있다. 마치 물감을 던져 넣거나 제작 과정에서 우연히 묻은 흔적과도 같은 자취들이다. 그 물감들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것들인데 작가는 그 그림 안에서 배제되고 화면 밖으로 나간 것들을 다시 화면 위로 호출해 내고 있다. 그것은 사각의 틀에서 제외된 것들인데 다시 그림 안으로 불려 들어오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버려지거나 그림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남겨진 잉여의 물질들을 재활용하고 하찮은 것을 환생시키고 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거나 재활용하는데 관심이 많으며 하찮은 존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 남겨진 얼룩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질이 모여 그림을 만들고 그것들이 의미심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소모되고 버려지는 주변의 것들에 순금을 덧붙이거나 부식된 구리판을 얹혀놓아 조화를 추구한다. 물질과 시간 그리고 흔적이 어우러져서 새로운 시간과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또한 작업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작업의 부단한 계기를 만든다. 그녀는 제작 과정중인 화면 안에서 순간 환시, 착시를 본다. 무엇인가가 보여서 그것을 환생시키는 과정이 작품의 과정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심안에 의존해서, 혹은 자신의 상상력에 지탱되어 단서를 만들어나가는 제작 행위를 말한다. 선험적이거나 목적론적인 그림이 아니라 생성적이고 진행형이며 결과나 목적도 없이 매순간 시공간에 충실하게 조응하는 과정에서 작품은 몸을 내민다. 결국 조기주의 작업은 주어진 시공간 속에서 모종의 물질과 함께 한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의 흔적이다. 그러니 조기주에게 흔적 만들기는 매혹적인 미술행위이자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생의 욕망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되고 있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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