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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성 / 왜상의 산수화

박영택

왜상의 산수화



조종성은 배접한 장지에 농묵으로 산수를 그렸다. 수묵으로만 이루어진 이 산수화는 조감의 시선에 의해 아득한 거리에서 포착되었다. 그래서 미세하고 복잡하다. 그것이 익숙하면서도 무척 낯선 산수, 재미난 산수로 다가온다. 먹과 모필이 어우러져 핍진한 산수화의 맛을 분위기 있게 우려낸다. 무척 조밀하고 정치하다. 우선 디테일한 묘사의 완성도와 단색의 계조로 이루어진 풍부한 먹 맛, 그리고 바위산과 나무의 질감 표현, 이른바 촉각성이 느껴지는 듯한 처리가 돋보이고 흥미로운 구도가 시선을 잡아끈다. 높게 솟은 산봉우리와 거친 돌/바위, 그리고 수직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이 풍경은 가득한 운무를 사이에 두고 첩첩한 산중의 웅장함과 장대한 자연의 위용을 부감으로 가시화한다. 대관산수가 지닌 웅혼한 맛이 가득하다. 현실계가 아닌 이 산수화는 옛그림들에서 발췌해온 부분들을 조합한 그림이다. 이른바 콜라쥬산수이다. 산수화의 일부를 차용하고 뜯어 와서 다시 그린 것이고 상상력을 동원해 보완한 그림이다. 특정 산수화를 임모한 것 같지만 실은 여러 산수화를 조합한 가상의 산수화다. 전통산수화가 지닌 모든 소재들이 다 들어있지만 사람은 부재하다. 산과 돌, 나무와 집, 다리와 물, 그리고 구름이 반복해서 이어지고 배열되어 있다. 그림의 중심이나 주변의 구분은 모호하다.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보는 이들은 화면을 훑어나가면서 부분적으로 뜯어먹으면 된다. 따라서 이 그림은 관자로 하여금 화면 속을 배회하고 소요하게 한다. 그림 속으로 거닐어보라는 것인데 사실 그러한 전략은 이미 옛산수화에 당연하게 들어있던 내용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조종성은 이를 좀더 강조하고 있어 보인다.



그는 산수화에 내장된 다양한 시점을 강조하는 구도를 구사하고 있다. 원근이 아니 이동시점과 다양한 시점이 공존하는 화면이다. 아마도 작가는 산수화가 지닌 시점의 이동에 강한 흥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와 함께 작가는 여백을 거느린 산수화의 한 부분을 잘라낸 듯이 화면 가운데 부분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되 나머지는 흐릿하게 윤곽만을 그려서 마치 지워버리듯이 은폐했다. 그러자 화면에 강약의 구별이 두드러진다. 많이 그려진 부분과 적게 그려진 부분, 보이는 부분과 잘 보이지 않는 부분, 진한 부분과 흐린 부분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 특정 시점에 잡힌 풍경과 그 배후, 이면에 가려진 풍경 혹은 실제의 풍경과 보이지 않는 부분의 풍경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듯도 하다. 그러니까 한 화면에 풍경의 여러 측면이 공존하고 다양한 시점이 개입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산수화에는 고정 시점, 특정 시각에서 바라다본 대상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시각에서 느끼는 기(氣)의 흐름을 형이상학적으로 추상화시키는 방법론이 원용되고 있다. 그것이 전통 산수화에서 추려낸 내용이다. 따라서 다양하고 종합적인 이해인 산점투시가 쓰여 지며 여백이 가득하다. 그것은 이른바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이기도 하다. 유한한 것을 통하여 결국 무한한 것을 묘사하고자 한 그림이 산수화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눈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심안으로서 관조'하는 것이자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고자 한 조종성의 산수는 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보는 이의 상상력과 지각작용을 독려하고자 한다.



한편 그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산수화에 으레 등장하는 점경의 작은 집의 형태가 화면에서 나와 공간에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연출이다.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집의 모형이 입체(조각)가 되고 오브제가 되었으며 바닥에 놓이면서 벽에 걸린 그림과 상호작용을 한다. 그 작은 집 또한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른 양태를 지니는 것처럼 왜곡되게 만들어졌다. 투시법에 맞지 않는 집인데 흡사 보는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관찰되는 집을 산수화의 시점을 응용해 안겨준다. 이른바 왜상으로서의 집인 셈이다. 산수화와 설치, 회화와 집의 모형, 그러니까 그림과 건축, 이미지와 오브제가 공존하면서 서로 길항하는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화면 속의 집과 화면 밖의 집이 겹쳐지고 집 안에서 본 풍경, 집 바깥의 풍경이 그렇게 스친다. 


알다시피 산수화란 당대의 유토피아를 시각화한 그림이며 군자가'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산수를 소요하고 바라보며 산수를 그리고 완상하는 이유는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일종의 수양과 수신의 과정이었다. 풍치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검소한 생계 수단에 의지하여 사는 은자/군자의 삶을 꿈꾸는 것이 산수화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유교적 이념들 및 도교와 불교의 신비주의를 어느 정도 혼합한 이념적 체계의 결과물이다. 일종의 종교화다. 자고로 군자를 꿈꾸는 선비라면, 나아가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이미지이자 삶의 공간에 어떻게 거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안기는 그림이다. 인간이 꿈꾸는 지극한 열락의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던 그림이자 그런 삶을 열망했던 이들의 보고자 했던 환각적인 장면이 산수화인 셈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 세속적 삶의 의무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끊임없이 긴장을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자정역할을 가능하게 해주는, 추스려 주는 힘이다. 이런 시선과 태도가 오늘날 산수화에서는 어떻게 자리할 수 있을까?



또한 산수화는 읽는 그림이자 더듬고 그 사이로 헤매는, 가상의 소요 체험을 상상하게 한다. 그림은 책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미술의 시각양식은 자연세계와 그 회화적 표면 사이의 대칭적인 관계를 강조하는데 반해, 동양화의 지배적인 양식은 비대칭적이며 그려진 이미지와 관찰된 세계 사이, 그리고 그려진 이미지들 자체 사이의 은유적 연계를 강조한다. 동양인들은 그림이 실재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았다. 사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따라서 동양의 그림은 실재를 추구하기 보다는 정신적인 활력을 통해 외부세계를 체득하는 그 어떤 통로로 그림을 대했다. 그림은 그저 종이라는 단면에 올려진 먹과 붓질이 만들어놓은 흔적일 뿐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일종의 허구이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세계를 내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고 감상하고 오랫동안 응시하기 어렵다. 산수화는 실세계를, 자연의 진면목을 가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그림,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그림은 다른 세계로 이행하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징검다리로서의 그림말이다. 그것은 '그리기'라기보다는 '상상하기'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사물자체에 내재한 정신성과 기운이 발현되어야 보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산수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대상을 보는 이의 사상과 감정, 의도, 철학 등이 화면 안에 반영되어야 했다. 결국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눈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심안으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 바로 산수화다. 산수화를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그의 상상력과 지각작용을 독려하는 것이 산수화였다.


서양의 회화가 외부세계를 재현함으로써 이를 소유하고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키워왔던 것, 그래서 소유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으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에서 나왔다면 동양은 애초에 그런 재현의 욕망이 있을 리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전통화에 내재된 탈근대적인 요소를 만날 수 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오늘날 환생시킬 수 있느냐가 핵심적인 과제인 셈이다. 조종성의 산수화는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산수화에 내재된 여러 의미를 흥미롭게 독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그려나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오늘날 상당수 작가들에 의해 전통 산수화는 라면으로도 만들어지고 종이로 입체화하고 고무나 컴퓨터상에서 사진이미지로, 혹은 동시대의 도시풍경과 습합되어 유동한다. 그것은 전통을 오브제화 하고 하나의 탈문맥화된 기호로 다루면서 자의적인 이미지의 배열 안에서 순환시킨다. 그래서 마치 팝아트의 도상들처럼 다루어진다. 이처럼 오늘날 전통은 간편한 소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것이 산수화의 현대적인 계승내지는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여겨지긴 어렵다. 산수화가 전통이기에 그것을 '다시' 그린다는 것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문제는 '전통의 현대화'란 수사가 아니라(그것도 잘못된 말이지만) 매 순간 한국 동양화단에서, 미술계에서 도대체 전통이란 것이 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호명되고 의미를 부여받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전통을 박제화 시키고 그것을 오브제로 여기지 않으려면 전통에 대한 모색과 논의가 다른 차원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전통이 이런 것이다' 라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통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전통은 어떻게 호명되고 만들어지는가, 어떤 필요성에 의해 호출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아울러 그 당시에 그림이 그렇게 그려졌으며 어떤 문맥에서 제작되고 이해되었으며 조형적 방법론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깨달아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미술에 대한 의미심장한 요소들, 그러니까 서구미술을 넘어설 수 있는, 탈근대적인 내용들을 부단히 찾아내어 환생시키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시선의 문제, 프레임, 그림과 문자의 관계, 시간, 유토피아 의식, 이미지와 삶과의 관계, 이미지의 주술성, 그림의 가설방식, 정신적 활력 속에서의 그림감상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여러 흥미진진한 부분들이 잠복해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산수화는 여전히 거대한 광맥이다. 조종성은 바로 그 광맥을 조심스레, 흥미롭게 건드리고 있다. 간편하게 패러디하거나 유희적인 기호놀이로 다루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의 농묵으로 이루어진 이 조밀한 산수화와 오브제의 연출이 좀 더 극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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