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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 그것이 전부다!

박영택

그것이 전부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 그리고 고적함이 빈들에 가득한 까마귀 소리와 뒤섞여 떠도는 날이다. 아직 아침 햇살은 찬란하고 따스해서 겨울이 오기까지의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주긴 하지만 이 계절의 농촌은 분명 쇠락의 기운으로 잦아든다. 그만큼의 고요와 또 그 무게만큼의 덧없음이 땅으로 밀려들어가는 시간에 나는 박정애의 작업실에서 그녀의 근작을 보았다. 이곳 양평군 지평면 옥현리로 이주한지 십 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작가의 작업도 이전과는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작업실 바깥에서는 까마귀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낮잠 A Midday Nap_패널에 투조, 아크릴채색


근작은 대부분 합판을 이용해 그 위에 선을 새기거나 구멍을 뚫은 흔적들이다. 더러 동을 용접해 형상을 이룬 것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또한 원형과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그림을 그려 보이고 있다. 12mm 두께의 합판위에 밑칠로 젯소를 2~3회 칠하고 뒷면 또한 처리를 했다. 합판은 흡사 캔버스가 되어 이미지를 받쳐주고 있다. 평면은 분명 회화적 공간이고 이미지가 서식하는 본연의 장소다. 반면 조각은 공간에 자존하는 물질들이며 공간에 사물을 밀어 넣거나 물질의 물성을 하나의 시각적 볼거리로 만드는 일이 조각하는 일이다. 물론 부조의 예처럼 조각 역시 표면에 시각적 환영을 만들거나 주름을 잡아왔다. 박정애는 동이나 철 대신에 식물성의 나무를 대상으로 그 표면에 이미지를 새기고 투각했다. 그 이후에 표면에 채색을 했다. 회화적 공간에 기생하는 작업이자 그 표면에 여전히 조각적 행위를 시술하고 있다. 부드럽고 중성적이며 온화한 단색조의 색감은 나무의 표면을 적시고 합판의 존재를 색채덩어리로 만든다. 해서 마치 색채를 지닌 물질의 피부에 난 이미지를 손금을 보듯 내려다보게 한다. 손금은 손바닥에 난 상처/주름이면서 무한한 독해가 가능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한 인간이 모태 속에 자리 잡는 순간에 형성되어진 운명의 선들이다. 손바닥을 여러 방향으로 긋고 지나가는 선, 손금의 자취를 헤아리는 일은 흥미롭다. 그것은 스스로 움켜쥔 힘에 의해 배태된 자국일까?


박정애가 긋고 파고 떠낸 자취는 나무의 표면에 선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그려낸 형상들과 선들이 나무의 피부위에서 자연스럽게 응고되어 있다. 마치 눈 속의 발자국 같은 것,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연상시키는 선들이다. 동시에 사람의 형상과 개와 새, 눈물의 이미지가 있고 낮잠을 자고 있는 이나 술자리에 앉은 여러 사람들의 자취가 있다. 문득 삶에서 마주친 것들의 형상화이자 그것들을 가슴 속에 담아둔 사연이나 상념들이다. 애초에 박정애의 모든 작업들은 일상에서 깨달은 것들을 시어처럼 단출하게 잡아채어 이를 응고시켜왔다.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힘 있는 형상과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의 연출은 이 작가의 매력이다. 더구나 삶의 반경에서 접한 모든 것에서 작업을 견인해내고 현상 너머를 굽어보는 예지랄까, 맑고 따스한 마음의 결이 감촉되는 점이야말로 의미 있는 지점이다. 작업을 삶과 분리시키거나 특정한 미술의 담론에 국한시키는데서 벗어나서 자기의 생 자체에서, 삶의 수행에서 자연스레 작업의 실마리를 잡아내고 있다. 동시에 일상을 소재로 한 무수한 작업들이 지닌 소재주의나 얄팍한 감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빛난다. 좋은 작업은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의 맑음에서 풀려나온다.


끌과 조각도, 칼과 여러 기계의 힘을 빌어 합판의 표면, 내부에 상처를 내면서 깊이를 만들어 보인다. 표면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수직의 층들이 여러 시간의 결을 안겨주는 한편 그 상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한 눈에 조망시킨다. 그래서 보는 이들은 그 화면을 깊이로 받아들이고 부재(무)가 이미지로, 내용으로 다가오는 역설의 체험을 만난다. 납작한 평면의 합판은 일정한 두께를 지니고 있어 비교적 깊이 있는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나무가 이룬 두께, 깊이의 내부로 들어가 모종의 흔적을 만드는 일은 회화이자 동시에 조각의 일이기도 하다. 두꺼운 나무의 속살을 파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더 나아가 합판의 깊이 자체를 소멸시키는 투각, 구멍 뚫는 일은 그리기의 극한, 조각 행위의 바닥을 드러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들판의 幻 Illusion on the Field_철, 동


「새벽」이란 작업은 투명한 블루 톤으로 적셔진 화면에 마치 한 획으로 그어진 듯, 무릎에 손을 얹혀 놓고 상념에 잠긴 듯 한 이의 측면 실루엣이다. 얇은 깊이를 가진 이 음각의 표면은 홀로 있는 이의 고독과 그 고독으로 인해 가능해진 투명한 경지를 선화처럼 안긴다. 모종의 선미가 감도는 이미지이자 깊이를 지닌 선의 맛이 일품이다. 나무의 피부에 새긴 드로잉이자 음화이며 동시에 판화이기도 하다.「길고 긴 풍광」은 합판의 표면에 거칠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사선을 상처처럼 남겨놓은 작품이다. 비/빛의 이동, 시간의 흐름, 혹은 유성의 추락이나 생멸의 소멸을 은연중 떠올려준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흐름, 사라짐, 흘러감을 은유화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들 저렇게 사라지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바깥에서 영원히 순환할 것이다. 공존할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이다. 유사한 작품으로「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인」이 있다. 수직으로 내리는 선은 비처럼, 눈처럼 보인다. 혹은 눈 위에 생겨난 발자국을 연상시키는 구멍, 상처다. 음각의 깊이는 시선을 헛디디게 하고 빠지게 한다. 구멍으로 파 들어간 칼의 힘과 그 칼을 조율했던 작가의 신체가 공존하는 순간이 그 위에서 어른거린다. 종내 합판의 두께를 거둬버린 작품도 있다. 사람과 개, 코뿔소의 형상은 지워지고 구멍이 뚫려있다. 실루엣만 남고 내부는 사라지고 비어있다. 그 자리에 들어 있었던 것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남아 그 몸을 한 것들은 지속해서 유전할 것이다. 생의 이치가 그럴 것이다. 술자리에 둘러앉은 이들의 몸은 구멍(무)이 되어 사라지고 버려진 듯 남은 식탁과 음식들만이 자리하고 있는「그리고 집으로 갔다」는 떠들썩한 술자리가 파한 후 모두 집으로 가버리고 남은 빈자리를 통해 인간 존재의 허무함이나 우리네 삶의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여전히 반복되고 이어진다. 박정애의 근작은 심각하고 쓸쓸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유머와 여유로 받아들이고 사는 이의 깨달음이 묻어난다. 그리고 보는 재미가 있다.



양평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간동안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더없이 헐거워지고 부드러워졌다. 모든 것을 그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 앞에서 생사와 소멸의 섭리를 그대로 허용하고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 앞에 묵묵히 자기 생을 이어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애도와 그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이 묻어난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우리는 무한한 시간의 흐름 위에 잠시 머물다 소멸하겠지만 그 소멸과 동시에 또 다른 흐름, 시간의 바깥에서 영원을 살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단상을 단호한 합판의 피부위에 자신의 온 몸을 극진히 밀어내면서 이미지, 구멍으로 새겼다. 빈자리가 역설적으로 모종의 이미지를 안겨주었다. 구멍, 빈자리로 생겨난 저 형상은 무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우리가 무에서 태어나 무로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 부재의 자리는 있음의 소중함을 정성을 다해 기술하다 자진하는 자리다. 나는 이 깊을 대로 깊은 가을날 그 자리를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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