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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열 / 서울 산수화

박영택

조선의 수도 한양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천하제일 명당이라고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이자 한강이 동북쪽에서 흘러와 남쪽을 휘감아 돌며 바다에 이를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계곡과 맑고 깨끗한 물, 숲과 수목이 어우러져 천하절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 아름다운 한양의 풍경은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겸재는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한양 서울 곳곳을 진경으로 사생해 남겨두었다. 그가 살던 공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결실이다. 대부분 사방 30cm 이내 크기의 작은 화면에 담긴 그 풍경들은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겸재가 몸소 다니고 거닐고 유람하며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그려낸 풍경들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정한 공간에서 나서 자란다. 따라서 한 개인의 인성과 심미성의 근원은 바로 그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화가란 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생이 거하는 특정 공간을 사유하고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해 왔다, 그것이 조선시대 진경산수이기도 하고 동시대 도시풍경이나 도시산수이기도 하다. 

윤세열은 자신이 30여년 넘게 생활하고 있는 서울 공간을 동양화 재료로 그려내고 있다. 이전에는 수묵으로 자신의 작업실 주변인 서울 도심의 정경을 사실적으로, 기록적으로 재현해왔었다. 수묵의 질펀한 농담변화와 흑백 톤의 대비를 섬세하게 조율해 그린 그 서울풍경은 거의 사진처럼 사실적이어서 환영을 가득 불러내는 그림이었다. 특정한 공간과 특정 시간만이 기재된, 즉물적인 차원에서 도시의 일상이 그림 속에 숨죽여 응고되어 있었다. 그 작업은 수묵의 쓰임새를 기존 동양화작업과 달리하는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자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도시공간을 실경적 차원에서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이후 그는 먼 거리에서 서울 풍경의 전모를 살펴보면서 모필의 필획을 살려가며 더듬고 있다. 산수화적인 분위기랄까, ‘도시산수화’라고 부를 만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공간을 산수화처럼 다루고 있는 작업이다. 
비단의 본바탕이나 혹은 오랜 시간의 더께를 연출하기 위해 오리나무열매를 달인 물로 염색한 비단을 사용한다. 사실적 묘사, 재현에서 벗어나 필의 맛을 살려가면서 선을 화면에 전면적으로 시술하고 있다. 무척 구체적인 풍경의 재현인 것 같지만 실은 필선의 집적에 다름아니다. 그 모필의 맛이 흡사 쓰기와 그리기의 혼재로 이루어지고 그러한 구분 없이 화면을 채우는 형국이었다. 익숙한 서울의 특정 공간을 지시하고 그 안에 빼곡하게 자리한 건물과 뒤로 병풍처럼 둘러 처진 산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만 실은 그 형상들은 온통 필촉과 붓질, 특정 문자(한자)꼴로 가득하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도시풍경으로 다가온다. 시간과 거리의 차이에 의해 달리 보이는 그림이기도 하고 달리 생각해보면 ‘서화동원’의 전통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놀이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마치 문자꼴로 옛산수화를 방작 하는 듯한 작업(유승호)이나 산, 나무, 물, 돌이란 한글이 모여 산수풍경을 그려 보이는 작업(김호득) 등을 떠올려준다. 그것들은 모두 문자와 이미지 사이에서 놀이하고 그 둘의 완강한 구분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울러 전통시대의 서화의 관계성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사실 우리의 경우 근대기에 들어서 전통 서화는 서와 화의 날카로운 분리를 통해 해체되었고 이후 그 두 영역은 별개의 것으로 떨어져나갔다. 아울러 전통 산수의 맥락 역시 서구 풍경화 장르로 전이되면서 재료만 동양화 재료를 구사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당연히 세계를 보는 시각과 그것의 인문적 사유와 이의 형상화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통해 산수화를 그린다 해도 그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그림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와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이 도시 공간을 문제시하면서 이를 다양한 방법론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른바 도시풍경이 하나의 주된 장르화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동양화 재료를 다루는 이들 상당수가 산수화에 도시풍경을 뒤섞거나 과거의 현재의 장소를 동일 화면에 올려놓는가 하면 전통산수화에 깃든 여러 맥락을 당대 도시 풍경 속으로 호출하고 있다. 선비들이 지향했던 탈속적 생의 열망을 반추하고 자연과의 총체적 조화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이상적인 삶을 꿈꾸었던 자취를 상기하고자 하는 지도 모르겠다. 혹은 패러디 차원에서 전통산수화의 도상을 차용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작가는 횡으로 활짝 펼쳐진 비단에 먹으로 촘촘하고 조밀하게 원경의 도시를 담아내고 있으며 구도는 대부분 공중에서 내려다 본 시선이거나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관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넓게 자리한 하늘과 여백으로 남겨둔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는 시원한 공간감과 함께 저 멀리 위치한 도시로부터 벗어나 한가롭고 편안한 소요 내지는 소일을 일삼고 싶다는 은근한 욕망을 야기하는 구멍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여백이나 거리감이 정작 작가의 의도인 듯 하다. 그는 선인들이 산수화를 그리고 완상한 이유를 환기시켜준다. 이른바 ‘격수’와도 같은 맥락에서 한강을 가운데에 두고 저 멀리 서울을 위치시켰다. 저 뒤로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오면서 지속적인 변화와 변모의 과정을 거듭하고 있는 현기증 나는 서울의 실체가 바글거린다. 팽팽한 비단 결 위로 모필의 탄력적인 힘이 점과 선을 만들고 이어가면서 서울 풍경을 만든다. 소밀한 붓놀림이 빽빽한 도시의 속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한편 그 봇질이 그리고, 쓰고 있는 문자들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본인의 그때그때의 감정, 또는 고서에 등장하는 문구를 보여준다. 그러니 그는 쓰고, 그리고 있다. 도시풍경을 그리고 그 풍경으로 인해 야기된 감정을 기술하고 선인들의 말씀을 현재의 시간위에, 자신의 마음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필요한 산수이야기를 쓰고/그리고자 한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당대를 살아가는 이로 자기 생의 공간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바람직한 생의 욕망을 도모하는 이의 탐구로 비쳐진다. 마치 선비들이 산수화를 그렸던 바로 그 의도 말이다. 그렇게 그는 서울 공간을 소요하고 유랑하듯 부유하면서 고인들이 살다 사라진 이 공간, 풍경 앞에서 그들이 삶을 반추하고 그들 생애의 그늘을 고요히 관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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