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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 같은 연적

박영택

자주 박물관에 가는 편이다. 직업이 전시/작품을 보러 다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현란한 작품을 보는 틈틈이 아득한 시간의 때를 머금고 있는 골동을 편애하고 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든 것들의 목록은 다채롭다. 신라시대 석불, 고려시대 불화, 조선시대에 그려진 인물산수화와 초상화, 조선백자와 목기, 목가구, 추사의 서예, 선비들의 사군자 등등 이루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두 다 좋지만 유독 나는 백자 앞에 서면 멍해지면서 황홀경에 빠진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순백자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나는 언제나 저 유백색 도자기의 표면에 매료되었다. 그것을 보고있노라면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환각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겨울에 나는 박물관이 아니라 인사동에 위치한 작은 화랑에서 이용순이 만든 백자 항아리전을 보았다. 저 백자들을 보면서 세상에 처음 나온 얼굴 같은 그런 얼굴을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전시장에는 눈이 부신 순백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백자를 만드는 원료인 태토와 유약 이외에 어떠한 물질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백색의 자기로 아무런 문양이 없다. 그중 나는 새알을 닮은 연적 앞에서 살결처럼 매끄러운 연적의 피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연적이란 벼루에 물을 붓는데 쓰는 도구다. 옛선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문방구류의 하나다. 18세기 후반에 양반의 수요가 급증하고 청나라와의 교류가 원활해지는 시기에 백자로 만들어진 다양하고 뛰어난 문방구류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연적이다. 양반 사대부들의 필수품인 연적은 사랑방의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선비들이 글 쓰는 모습을 항상 지켜보았을 것이다. 붓과 벼루, 연적이야말로 공부하고 글 쓰는 선비들에게는 핵심적인 물건이다. 따라서 선비들은 자신들이 애용하는 문방구류에도 고결하고 청렴한 정신을 삼투하고 백옥 같은 심성과 단아한 몸가짐, 어떠한 것으로도 결코 물들일 수 없는 마음을 문질러놓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순백의 연적이다. 작가는 옛 백자의 색상과 형태를 고스란히 재현하고자 오랜 시간 고미술품을 어루만지고 터득하는 지난한 시간을 가져왔다고 한다. 저 둥근 알의 형태는 자연이 무심히 만든 선이고 깊고 순수한 백색은 설색 그대로다.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알 모양의 연적에서 새삼 한국미의 특질을 실감나게 만나고 있다. 아울러 저 눈 같은 백색으로 자신의 삶을 뒤덮던 선비정신이 못내 그립고 간절하기도 하다. 기어이 그 작은 연적 하나를 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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