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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 / 기호로 제시된 달팽이들

김영호





이규민의 조각세계에 접속할 키워드는 ‘생명현상의 구현’으로 불려 왔다. 프랑스 유학시절인 1994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가 어떻게 생명과 환경의 조화 혹은 갈등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뭇가지에다 기하학적 입방체들을 결합한 작품 시리즈, 지구본을 뒤덮은 건축적 구조물 작업 등은 생명과 환경의 문제를 시각적 형태를 통해 끌어내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프랑스 평론가 미쉘 깁슨이 당시 그의 작업에 대해 ‘의미의 형태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게 만들고 있다’고 평한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이규민의 작업에서 생명현상의 의미를 표상하는 형태의 전개과정을 보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의미의 형태’란 기호학이 채택하는 과제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모든 이미지나 현상의 체계를 분석하는 기호학은 미술 특히 현대미술 작품의 해석에 큰 도움을 주어왔다. 이규민이 의미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기호학적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재불 언론인 정종식씨가 당시 그의 작품전을 두고 ‘조화와 아름다움의 전시회가 아니라 생각과 말의 전시회’라 평가하고 있는 대목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른바 이규민의 작품은 ‘형태가 창조될 때, 성육할 때, 공존할 때 상대화될 때, 그리고 묵상할 때 의미가 공간의 사이를 어떻게 비집고 생겨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다루던 진흙, 석고, 목재, 플라스틱, 석재 등 다양한 재료와 낯설고도 개성적인 조형방식은 형태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귀국 후 이규민의 작업은 쇠똥구리나 달팽이와 같은 구체적인 생명체의 형상에 집착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변화는 갑작스런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기호학적 의미생산과 해석의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대중적 소통의 수월성을 위해 순수조형의 실험에서 재현적 대상을 통한 의미로 그 생산의 행간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의 작품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가가며 생명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다양한 기억을 이끌어내는 기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미물을 통한 은유적 수사학의 차원으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듯 하다. 확대된 달팽이는 <내셔널 지오그래피>와 같은 다큐멘터리 화면에 소개된 미지의 생명체처럼 신비감을 제공한다. 작가는 거대한 달팽이의 껍질을 광택나는 공업용 도료로 마감하여 팝아트의 서정을 가미시키고, 그 표면을 하트나 구름무늬 등으로 장식함으로서 다양한 상징적 서술의 외연으로 그 해석의 범주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규민의 조소예술에 접속할 키워드로서 생명현상은 이제 순수형태를 둘러싼 의미부여의 차원에서 벗어나 삶의 차원으로 내려왔다. 달리 말하면 문명과 자연 그리고 생명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그의 작업에 남아 있으나 보다 현실적인 명제들을 끌어안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셈이다. 텔레비전 모니터를 등에 이고 있는 달팽이나 큐브를 메고 있는 달팽이에서는 현대적 삶에 뿌리를 둔 미물을 둘러싼 해학과 풍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사실이 그렇듯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실체로서 달팽이가 아니라 달팽이의 허상이다. 작가는 달팽이의 허상이 파생하는 실재와의 충돌구조를 열어 제치고 그 사이에 흐르는 기호학적 의미를 퍼내어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생명현상을 둘러싸고 파생되는 그 다양한 ‘의미의 형태’를 공유하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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