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변정은 / 안빈낙도

김영호

안 빈 낙 도 安 貧 樂 道



안빈낙도. 변정은의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절제되고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는 화면과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하지만 여유와 품격을 지닌 선비의 멋이 있다. 단아한 형상의 기와지붕과 그 아래에 펼쳐진 세 평 남짓의 마루는 주인의 삶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찾아온 벗과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가 정겹게 퍼진다. 술상은 조촐해도 그들의 대화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끝이 없다. 때맞추어 켜놓은 등불이 옆에서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어 든든하다. 건물 뒤편으로는 평풍처럼 펼쳐진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대화의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이러한 풍경은 삭막한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자연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세운다.
안빈낙도의 세계는 물질적 빈곤 가운데 정신의 가치를 지향하는 세계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키는 것’이 안빈낙도의 삶이다. 어느 자연기행 작가의 표현처럼 ‘가진 자는 그것을 보존하고 숨기느라 쩨쩨하게 굴지만’ 가진 것 없기에 숨길 것도 없는 청빈한 선비의 삶은 그래서 여유롭다. 그런데 가난과 풍요라는 단어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모두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가난이란 개념이 없으면 풍요가 성립되지 않고 풍요는 가난의 다른 이름이 된다. 원효대사가 설파했듯 일체의 판단은 오직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가난과 풍요란 인식주체의 마음이 정하는 정신적 태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참으로 가난해져 있다. 물질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간의 우정이 예전 같지 않고, 사제간의 경의가 그러하며 이웃간의 정이 가난하고 그런 세상이다. 남녀간의 애정은 선데이 서울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데 정신이 흉흉한 세상이 되면서 역으로 태어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청빈과 품격을 따르려는 태도다. 정신적 빈곤의 상황을 극복하고 도와 격을 지키려는 생각이 자라게 되는데 이것이 안빈낙도의 세계다. 변정은의 회화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자리를 틀고 있다. 정신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두가 지향하는 여유와 품격의 세계를 화폭에 펼치려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은 형식적으로 절제되고 단순한 화면구성이요, 자연과 더불어 무위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삶을 회화적 메시지로 채택하고 있다.




변정은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일본에서 일찍이 양화를 전공한 부친과 국내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모친 사이에서 출생했으니 일찍이 다양한 화법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을 터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수묵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면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가졌을 것이다. 그간에 가진 네 차례의 개인전에 출품했던 작품들을 보면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적 화법을 견실히 쌓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교직에 몸담아 미술교사로서 활동하면서 작품창작에 시간적 제약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의 작업공간에 쌓인 유화와 수채화 작품의 양을 보면 그는 천성적으로 작가적 삶을 살아온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변정은은 생활 속의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위트와 유머의 시각으로 일상을 풀어가기 시작했다고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이는 풍경이나 정물을 소재로 한 아카데미즘 풍의 이젤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색채를 지닌 기법과 표현방식을 찾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서 얻은 조형적 성과물은 4회 개인전을 통해 소개되었고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업도 형식적으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전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단순히 자연을 객관적으로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화면 자체의 내적 구성과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일상적 삶의 모습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창조해 내기 위해 작가의 주관이 강조되어 있고 상상을 자극하는 간결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은 민화와도 같은 서술적 구조를 보여준다.
변정은의 작업은 여행 중에 얻은 이미지나 주변에 놓인 실재 풍경에서 소재를 채집한다. 단순화시킨 건물구조나 집안의 풍경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변형된 것이지만 현실로부터 끌어낸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작가의 개성적 시각과 실재 풍경 사이의 틈새가 읽혀지며 현실에 근거한 비현실적 세계를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가령 이번 선보이는 작품중 <우정일기>의 경우 외암리 민속마을을 여행하던 중 인상적인 가옥의 형태를 발견하고 그것을 스케치해 저장해 놓은 것을 후에 다시 꺼내 재구성 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은 화계사 일주문과 그 주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아 그린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심중에는 그 가옥의 이미지를 둘러싼 여행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머물게 된다.




한편 기와지붕은 그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서 오랜 시간을 지나며 화면에 자리 잡은 것이다. 말총으로 짜여진 선비의 갓처럼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그려진 처마 끝이 멋져 보인다. 나로서는 초가지붕이 아닌 것이 오히려 여유와 멋을 더해주는 것 같다. 기와지붕 아래로 자리 잡은 단칸방과 마루가 있는 공간이 변정은이 연출하는 무대의 중심 이미지다. 그리고 대발이나 봉창 그리고 굴뚝과 더불어 집의 서정을 나타내는 소품들이다. 이와 함께 울타리 없는 마당, 마당에 얹혀진 가마솥, 서성이는 개 한 마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병풍처럼 둘러친 나무숲..., 이것이 변정은이 화면에서 구축하는 삶의 터전이다. 이 환상의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은 벗들을 초대해 소주를 나누고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인생을 논하며 날을 세운다. 절약된 풍경은 작가가 표현하는 절약된 삶의 표현일 것이다. 툇마루 근처 가마솥 아래 타는 장작불은 인기척도 없고 정적이 맴도는 집안에 생기를 돋우는 소품이다. 주인은 정원을 가꾸고 동물을 돌보기도 하며 때로 유적지에 마련된 정자를 찾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재료적 측면에서 보면 변정은은 유화와 수묵을 혼용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수묵이 반을 차지한다. 아직도 미공개로 남아 쌓여있는 수채화 역시 그의 기법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유채화의 경우 캔버스의 바탕에 담묵과 농담의 표현효과를 만들어 내는데 이는 변정은의 그림이 지닌 하나의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가 표상한 세계에 흐르는 안빈낙도의 서정은 그가 일구어낸 값진 성과로 보인다. (2008.8)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