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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완 / 존재의 모호한 초상들

김영호

존재의 모호한 초상들
Portraits of vague existence


모더니즘 미술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기류들이 형성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거대한 화면의 초상화 경향이다. 극사실적 초상화에서부터 거친 터치의 표현주의적 초상화,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출력된 대형 얼굴이미지에 이르기 까지 범주도 매우 다양해 졌다. 얼굴을 통한 의미생산의 회화적 경향은 이제 화단이 내세우는 하나의 장르가 된 듯 하다. 이처럼 안면초상이 이시대의 새로운 장르로 다시 자리 잡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는 가운데 얼굴이 시대의 정신을 드러내는 주체적 기호가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류는 인문학적 성과에 동조하면서 다채로운 해석의 방식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김계완의 경우 초상화는 존재의 불확정성에 미학적 기반을 두고 있다. 작업 과정을 보면 캐스팅, 포토, 페인팅 등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실존적 주체를 익명적 객체로 변주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특정 인물을 표현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분명 초상화의 범주에 속한다.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의 얼굴은 그의 작업에 초대된 대상이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는 보여주기와 숨기기의 양면성을 지닌다.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대상의 특정한 캐릭터를 상실시킴으로서 제삼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는 존재의 모호성에 대한 성찰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김계완의 초상에 나타나는 변주의 효과는 은박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면서 강화되었다.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인물을 만들어내듯 그의 작업은 대상 인물의 얼굴을 은박지로 덮어 싸는 것에서 출발한다. 은박지 캐스팅은 초상화의 자료를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작품이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은박지로 덮는 과정은 얼굴의 기호적 의미를 생산하는데 중요한 요소다. 그의 초상은 특정한 얼굴의 개성이나 실재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껍질 떠내기를 통해 보편적 존재감으로 이끌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존재 개체로서 특정인물의 삶을 통해 얻은 주름이나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얼굴에서 개체적 특성을 제거함으로서 보편적 인간의 존재성을 표상하는 효과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듯 은박지로 덮힌 실명의 인물은 보여주기와 숨기기의 양면적 속성을 지니기 시작한다.

은박지 캐스팅을 통해 얻어진 김계완의 얼굴은 다시 사진기를 통해 평면적 이미지로 재생산된다. 그는 사진의 기법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그의 작품에는 기계적 프로세스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자료적 속성이 저장되어 있다. 가령 빛의 기록으로 불리는 사진적 연출 기법은 대상에 대한 저장과 순간적 기록의 의미를 증대시키는데 기여한다. 롤랑 바르트가 규정했듯이 사진 이미지는 과거 시간을 저장하는 부재의 증명일 뿐이다. 그것은 지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김계완의 얼굴은 이러한 사진적 전사를 통해 존재하는 것들의 순간성을 기록하고 박제화 시키는 오브제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다시 화가의 손에 의해 캔버스로 옮겨지며 이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성과 특수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개량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김계완의 초상화는 <실재 얼굴-캐스팅-사진적 기록-회화적 변주>의 과정을 거치며 탄생된 것이다. 거대한 캔버스에 확대 전사된 인물의 얼굴은 각각의 과정에서 생산된 특수한 의미소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즉 실재인물의 실명성, 캐스팅 과정의 익명성, 사진적 기록 과정에서의 시간성, 그리고 회화적 전사에서 요구되는 치밀한 표현성 등이 종합적인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김계완의 초상작업은 실명적 인물의 익명성을 위한 변주작업으로서 보여주기와 숨기기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양면성은 포장과 위장이라는 과정으로 통해 특정 인물의 존재감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그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자료화된 화석 이미지나 베일에 싸인 인물의 속성은 특정인물의 존재감을 새로운 코드로 변형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온 것이다.

김계완이 실행하는 은박지 캐스팅은 사실 미묘한 시각적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구겨진 은박지의 면들에서 연출된 빛의 반사효과는 보는 이들의 눈에 미세한 울림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보석에서 발하는 광채나 부서져 흩어진 거울조각에서 반사되는 빛처럼 그의 얼굴은 빛의 변주에 의해 개성적 면모를 갖게 된다. 그의 초상은 이렇듯 빛의 질서로 재현된 인물상이다.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작업은 은박의 반짝임에서 오는 시각적 이끌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얼굴이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듯이, 은박의 빛 반사는 조명과 각도에 의해서 전혀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리한 빛의 변화가 얼굴의 표정, 사물의 느낌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빛의 효과는 대형 캔버스 위에 확대 전사된다. 작가가 말하듯이 빛의 효과는 작가가 시도하는 상황의 재구성에 의해 다양한 의미의 인물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최근 작업에서 김계완은 초상의 대상을 자신의 주변인물로부터 벗어나 유명인들로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중에 처음으로 선택한 것이 작곡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다. 대상의 폭을 확대하려는 이유는 실명과 익명의 불확정적 간극에 더욱 주목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인의 존재를 보편적 존재물로 화석화 시키려는 시도가 거기에 비추어진다. 하나의 오브제가 그것들이 놓여진 장소와 보는 이의 심리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듯 하나의 오브제로서 다루어진 베토벤의 이미지는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적 인식의 대상으로 다시 다가온다. 은박지가 파생하는 빛과 반사광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이미지는 현대인의 다양한 존재감을 대변한다. 김계완의 초상은 모호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화려함과 신비와 비장함이 뒤섞인 존재의 아우라가 서려있다. (20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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