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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상회화 ; 1958-2008전

김영호


한국추상회화;1958-2008전 
행위와 유희 서울시립미술관


행위와 유희 



1. 앵포르멜을 다시 생각한다
한국의 전후 추상회화에 대해 논의할 때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것이 그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앵포르멜 또는 추상표현주의와의 상관성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전후 추상회화 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 미술사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전시회와 관련해 한국 추상회화의 흐름을 ‘행위와 유희’라는 주제어를 통해 접근할 경우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미학의 기본원리인 ‘제스추어’, ‘액션’, ‘즉자성’, ‘자동기술’ 등과 연계되는 형식논리의 상관성을 출품작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인간성에 대한 반성과 그 대안으로 떠오른 현대적 실존주의는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후 추상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상황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주지하듯이 1957-1965년에 나타난 한국 현대추상미술 운동과 관련하여 국내 비평가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보여 왔다. 하나는 외래사조의 맹목적 수용에 의해 주체성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전통수립에 실패했다는 부정적 입장과,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의 물결 속에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미술사조를 자발적으로 수용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입장이다.1) 그러나 이러한 수용과정, 그룹형성, 전시조직 등 외양적 현상 중심의 논의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양식적 지층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었을지언정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본성을 제대로 진단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독창과 모방, 혹은 배타와 수용의 개념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개념을 전제로 할 때 성립 가능한 상보적 개념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작가들 역시 앵포르멜을 전위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화단 헤게모니의 도구로 이용해온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위 세대들은 서구 앵포르멜을 통해 집단화 되었고 국전의 권위와 초기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운동에 대한 반작용을 실천하는 에너지로 삼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비평가와 작가들 모두에 있어 앵포르멜의 유입에 수반되어야할 미학적 자기화 노력의 결여였다. ‘한국 앵포르멜’이라는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러한 종속적 자기규정의 한계상황을 만들어낸 원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현대 추상회화는 앵포르멜의 영향으로 태동되었지만 앵포르멜 미학은 모호한 용어로서 적용과 시기가 극히 제한된 운동이었고, 우리와 동화될 수 없는 형식논리의 부분들이 있다.2) 미술사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전후 추상미술의 도입을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으로 삼는 것은 추상미술의 형식논리를 극복하면서 태동된 서구 현대미술사의 문맥과 맞지 않는다. 가령 서구 ‘근대회화’의 주류적 경향의 하나였던 앵포르멜이 한국에서는 ‘현대회화’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는 서구의 근대미술의 한 줄기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여기서 발생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의 전후 추상회화를 위한 미학적 표준을 세우고 세계미술사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이 한국의 비평계에 주어진 과제라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과 관련해서 그 접근 방식은 우선 수용과 배타의 이원적 진단이 아니라 추상회화가 가진 보편적 형식논리에 근거해 그 가치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화의 형식과 본질을 이성적으로 문제시 삼는 모더니즘의 미학 원리가 아니라 형식을 생산한 개인적 시각의 다양성 또는 혼성성을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에도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한국추상회화; 1958-2008>전의 ‘행위와 유희’ 섹션은 한국의 비정형적 추상회화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2. 단명했던 ‘앵포르멜’ 운동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은 1957년에 태동된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속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후에 이 집단이 한국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다루어지면서 한국현대미술의 기원은 자연스럽게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미술로 규정되었다. 앵포르멜 미술의 필요성은 그것이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젊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비평계에서는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령 <벽전>동인과 같은 물질과 오브제를 사용하는 제3경향의 재야세력들이 캔버스 회화와는 다른 탈평면의 새로운 기류를 조성하였으며3), 앵포르멜 경향의 미술은 내부적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한국 앵포르멜 미술은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된다. 한편 1961년 국전에서 추상미술을 수용하고 김형대가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으로 수상하게 된 것도 해체를 위한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의 전후미술은 패전국인 일본과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은 45년에서 51년까지의 미군정이 끝나면서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이 활발하게 소개되었다. 1951년의 <살롱 드 메, 동경>전과 동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전 등을 통해 소개된 유럽과 미국의 대표적 추상화가들의 작품은 1954년에 결성된 전위미술단체인 ‘구타이(具體) 그룹’의 작가들의 조형적 성과와 자연스럽게 연계되었다. “물질은 변화시키지 않고 물질에 생명을 준다”는 선언문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구타이 그룹의 작가들은 작가의 행위와 물질이 종합되는 해프닝과 퍼포먼스 등으로 주목을 끌었고 이들 대부분은 후에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으나 일본인 특유의 자기화 노력에 의해 독자적인 노선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타이 그룹은 이어서 1969년에 결성된 ‘모노하(物派)’ 운동으로 지속되었고 이 운동의 이론가였던 이우환 등에 의해 모노하의 특성이 자연과 인간의 합일 사상에 근거한 일본의 젠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주장하게 된다.4) 한국의 경우 전후 추상미술은 1960년대 전반까지 앵포르멜의 조형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미술이 구미지역의 현대미술사조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발걸음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근대주의의 산물인 앵포르멜 미학의 수용 혹은 배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57년부터 1965년까지 지속되었던 앵포르멜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것도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기에 앵포르멜 미학의 상황주의는 반복과 양식의 집단적 유사성에 의해 생명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은 미학적 표준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진로모색에 실패함으로서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3. 전후 한국 추상미술의 성과
한국의 현대 추상회화는 미군정하에 시작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은 한국의 미술계를 변화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 역시 화단에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5) 고대 이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영향권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던 우리의 역사적 상황은 부정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사실이지만 외래 문화의 유입 자체가 한국 문화의 특성을 결정 지우는데 부정적인 요소만은 아닐 것이다. 전후 앵포르멜 경향의 유입은 한국 현대미술에 나름의 성과를 제공했는데 그간에 미술계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미술은 당시 국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아카데미즘 미술에 반기를 들고 한국 현대회화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담당했다. 반국전을 내세우는 단체들로서 현대미협, 모던아트협회, 신조형파, 백양회, 60년미술가협회 등을 중심으로 추진된 실험정신이 추상미술에 대한 조형의식으로 집단화될 수 있었다. ‘국전 대 재야’라는 이원적 구도는 모더니즘 계열을 폭넓게 수용한 현대작가초대전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앵포르멜적 경향은 첨단의 아방가르드로서 새로운 분위기를 주도했다.
한편 오광수가 힘주어 지적한 것처럼 앵포르멜이나 액션 페인팅의 양식 또는 방법적 측면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동양의 전통예술의 방법을 일깨우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던 서체충동이 앵포르멜이나 액션 페인팅의 방법과 일치되는 사실은 ‘행위와 유희’라는 측면의 미학적 표준을 공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지적이라 할 것이다.
재료학적 측면에서도 앵포르멜 미술이 내세우는 물질과 물성의 미학은 한국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화물감뿐만 아니라 시멘트, 안료, 페인트 그리고 천막, 군용 모래자루 등의 재료는 그 자체가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다 준’ 발견이었다. 이러한 50년대의 물성에 대한 발견과 재료학적 관심은 1970년대 미술의 물질주의 미학으로 이어진다. 캔버스의 표면은 물질로서 그 자체의 고유한 빛의 구조를 품게 되며 특정한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의 물성이 강조되는 미니멀리즘과 연관성을 보이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라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전후 앵포르멜 경향의 한국 추상회화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행위와 유희’에 나타나는 정신성에서 발견될 수 있다. 행위와 유희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근간이 되는 미학적 원리였다. 이른바 ‘자발적 제스추어’, ‘서체적 기술방법’, ‘표현적 재료사용’, ‘설명적 형상의 거부’ 등과 같은 특성은 ‘또 하나의 예술’, ‘서정적 추상’, ‘타쉬즘’이라는 다양한 용어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전후 추상미술의 경향적 동질성을 찾을 수 있는 요인들이었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이 보여준 행위와 유희는 구성적 추상과 대립적 관계를 보여주는 서구의 미술사적 문맥이 아니라 상황적이고 따라서 보다 자유로운 즉흥의 행위와 유희로 특징되어 있다.
이상에서 보듯 유럽의 앵포르멜과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의 경향을 비교할 때 차별성을 보여주는 준거는 바로 행위와 유희에 나타나는 본능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성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럽의 앵포르멜 미술은 사실주의의 조건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고 전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작품의 제목뿐만 아니라 회화의 독자성(identité), 전통적 규칙으로서 구도(composition)나 구성(construction)등을 거부하지도 않았다.6) 이에 비해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에 나타나는 행위와 유희는 전면적이고 본능적인 면이 있다.7)


4. 대표적 미술관 전시들
한국에서 앵포르멜에 대한 미술관 차원의 관심은 1984년 워커힐미술관이 기획한 <60년대 한국현대미술-앵포르멜과 그 주변>전, 1993년 토탈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미술 격정과 도전의 세대> 등에서 본격화 되었다. 또한 2000년 봄 삼성미술관이 주최한 기획전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격정과 표현>도 대중적 파급효과 면에서 중요한 전시였다. 특히 삼성미술관 전시는 제목 그대로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과 그 상관성을 진단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을 세계미술사의 흐름 안에서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타진하기 위한 전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전시의 기획자는 서문을 통해 앵포르멜의 가치를 “전반적인 한국의 상황과 작가 개인의 체험, 나름대로 습득한 서구미술에 대한 지식, 동양적 감성 등의 여러 가지 바탕 위에서 그 당시의 예술이 갖는 미학적이고 역사적 가치를 정립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할 것”8) 이라 전제하고 이 전시가 이를 위한 기초적인 접근의 방 편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주목할 점은 상기한 전시 모두가 ‘한국 앵포르멜’의 규정화에 역설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커힐미술관 전시는 앵포르멜을 한국 현대추상의 중심에 넣고 그 주변적 경향들을 배치하는 구도를 정예화 시켰고, 삼성미술관 전시는 양국의 전후 추상미술의 동질성을 ‘격정과 표현’이라는 주제로 다루면서 의미를 재생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텍스트가 아닌 시각적 소통에 초점이 맞추어진 미술관 전시라는 점에서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정론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마련된 심포지움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형성과 비평>(3.17)의 발제를 통해 김영호는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비판적 수용과 그 미학적 표준을 재생산 할 것을 주장9) 했으나 아쉽게도 심층적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전시도록의 후미에 게재된 앵포르멜 주역들의 좌담회 내용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나듯 미술계에서는 여전히 앵포르멜 미술의 수용에 따른 상황적 진단10) 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번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한국추상회화: 1958-2008>전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역사 50년을 돌아보는 전시라는 점 외에도 그 접근 방식을 과거의 서구식 미술사조에 맞추는 형식을 배제하고 추상미술의 형식논리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요소. 즉 ‘공간과 물성’, ‘행위와 유희’, ‘반복과 구조’, ‘색면화 빛’ 등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현대 추상회화의 정신과 형식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려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 전시는 과거의 분류방식을 과감히 해체시키고 새로운 경향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국현대미술사의 흐름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5. ‘행위와 유희’의 미학
이번 전시 중 ‘행위와 유희’ 섹션에 출품된 작가는 모두 11명으로서 장성순(1927-), 이수재(1933-), 석란희(1939-), 김인중(1940-), 최욱경(1940-1985), 곽훈(1941-), 이강소(1943-), 오수환(1946-), 이두식(1947-), 신성희(1948-), 노정란(1948-)이 그들이다. 그 중 앵포르멜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작가는 장성순 뿐이고 대부분의 작가들 가령 박서보(1931-), 하종현(1935-), 윤명로(1936-), 김형대(1936-), 김봉태(1937-) 등은 모두 다른 섹션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전시기획 의도와 기법은 출품된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과 그 가치에 이전과 다른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앵포르멜적 경향의 작품을 특정 시대의 특정 그룹에 편중하지 않고 그 범주를 후배 작가들의 작품으로 넓히고 그 미학적 표준 역시 좀더 세분화 시켜 다루려는 의도의 결과로 해석된다.
장성순은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회원이며 6회전까지 꾸준히 참여하였고, 국내 대학에서 수학한 세대였지만 1961년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 비엔날레, 카뉴회화제 등 국제전 진출의 대열에 동참하며 명실공히 우리나라 현대 추상회화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작가다. 그의 작업은 강렬한 색채대비와 거친 붓질에서 암갈색의 바탕에 주름진 마티에르에 이르는 다양한 추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수재 역시 1950년대 중반이후 한국 비구상회화를 이끌었던 작가의 한사람으로 일찍이 미국에서 유학하였고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에서 보이는 현상적인 색채의 서정 또는 담백한 수묵화의 농담과 여백을 연상시키는 면들이 있다. “순수한 붓터치와 미묘한 색채, 넓은 여백”이 그의 작품을 이루는 형식논리로서 이조백자의 독특한 색채감각과 공간의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같이 자신의 작품을 전통예술의 형식이나 정신에 연계시키려는 시도는 한국 현대추상회화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역시 미국에 체류하며 활동하던 곽훈이나 오수환의 경우에도 엿볼 수 있다. 가령 곽훈의 경우 전통의 문제는 동양철학에 근간을 둔 기(氣)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동양적인 정신과 서구의 현대감각을 접목”시키는 것이며, 오수환의 경우 전통의 문제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차용한 <곡신(谷神)>이라는 주제를 근간으로 하여 “동양적인 기운생동의 정신을 서양화적인 구성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난희와 최욱경 그리고 노정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석난희는 ‘드로잉과 페인팅이라는 두 개념의 공존과 융화가 작품의 구조적 골격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는 그린다는 개념이 강한 동양의 회화와 칠한다는 개념이 강한 서양의 회화과 통합된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최욱경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유학 기간동안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1985년 타계할 때 까지 산과 바다 그리고 꽃을 탐구함으로서 자연의 생명성을 추구하였고 “풍부한 색채 “원색의 물감이 서로 부딪치면서 대비되는 화면 위에 거칠고 두껍게 그어진 붓질에서 에너지 넘치는 작가의 행위를 연상케 하며 동양의 서예적 획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정란의 작품은 붓자국의 격한 모습과 색채의 거리낌 없는 사용이 표현주의적 요소를 가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절제된 동양원리의 경향을 보여준다. 즉 동양과 서양의 미학적 전통을 종합한 표현양식이 바로 그녀의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작가들이 동양성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서양의 형식 사이에 맺어진 관계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강소, 이두식, 신성희, 그리고 김인중은 보다 개인적 차원의 심미주의에 근거해 독자적인 행위와 유희적 속성을 실천해온 작가들이다. 이강소는 청회색조의 바탕 위에 빠르고 거친 붓의 운용을 통해 배와 오리와 같은 구체적 형상들로 유명해진 경우이다. 그의 화면은 ‘무심한 상태에서 화면과 맞부딪히며 빚어내는 행위의 직접성을 드러내는데 오리의 형상은 서예의 필선에서 확장된 형태들이며 유동적이고 생명감 있는 기호로 표현되고 있다.’ 이두식의 작품에 엿보이는 개별성은 “식물이나 여체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변형하여 암시적인 형태로 묘사하면서 은밀한 생명의 세계, 즉 생성의 세계를 표현하는 작가의 심상이 드러난 경우다. 그의 분방한 필선과 자유로운 색채가 생명력 넘치는 내면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신부화가인 김인중의 경우에도 종교적 절제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개인의 자유는 선획의 운동감과 백색의 여백을 통해 유감없이 표출되고 있다. 김인중과 함께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활동해온 신성희는 캔버스나 색지를 찢어 엮은 작업으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경우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평면과 구조 그리고 색면의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 유희와 행위의 결과로 여겨지고 있으며 동시에 예기치 않는 “우주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6. 맺는글
이상에서 보듯 한국의 추상미술에 나타나는 ‘행위와 유희’의 형식논리는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를 주도했던 단체의 작가들을 넘어 1970년대와 그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미학적 표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앵포르멜이 국전에 대응하여 재야작가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도구적 경향으로서 역할을 벗어나 시간이 흐르면서 추상회화의 본성적 속성을 지닌 형식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점을 증거한다. 사실 앵포르멜적 경향은 반국전의 재야세력 뿐만 아니라 국전 내부의 개혁파에서도 전개되었던 형식이었다. 예를 들어 이수재는 1959년대 국전에 꾸준히 출품했으며, 석난희 역시 1960년대초 국전에 다수 입선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앵포르멜 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김인중 역시 1962년과 1965년 11회와 14회 국전에 특선과 최고상을 각각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였고, 김형대 역시 1960년에서 1968년까지 국전에서 여섯 차례의 특선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앵포르멜 경향은 국전과 재야의 벽을 넘어 다루어져 온 추상의 형식논리였다는 차원의 연구는 국전의 대통령상 수상작가들로서 박길웅(18회)이나 황창배(27회) 그리고 이반(26회) 등의 작품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국내 비평계에서 ‘앵포르멜’ 이라는 용어 역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비정형적 추상’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이나 적용의 범주에 나타나는 한계와 오류가 점차 밝혀지고 있는 현실11) 에서 한국의 전후 추상회화를 앵포르멜이라는 용어로 한정해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에 나타나는 특성은 분명 유럽의 앵포르멜의 주역들로서 장 뒤뷔페나 장 포트리에 그리고 볼스 등의 대상 해체적 추상과 차별화 된다. 일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는 듯한 빠른 붓의 터치와 행위의 직접성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신체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점도 전후 한국의 추상미술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 현대 회화사를 통해 꾸준히 연구되어온 한국 현대미술에서의 추상성은 한마디로 사고의 종합적 또는 총체성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는 한국인의 종합적 종교관이나 사상사에 힘입어 한국인들의 종합적 사고습관은 일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의 자기변증법적 발전사와는 다른 측면이 있으며 그동안 이러한 총체성의 개념이 전통의 소멸 내지는 혼란기로 자가 규정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상생의 개념으로 자연을 파악하려는 동양적 정신세계는 총체적 세계관에 뿌리를 제공하며 이에 기반을 둔 추상성이란 한국의 전통회화의 형식논리와 문맥 속에 흐르는 회화적 본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행위와 유희’의 미학적 표준은 한국인의 회화에 흐르는 고유한 미감과 여흥에 맞닿아 있다.(2008.6)


참고문헌
김미경, ‘벽전에 대한 소고-‘한국 앵포르멜’의 전개에 대한 의문’,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 IV>, Vol.3, ICS, 2004.
김영나, ‘전후추상과 우리 나라의 앵포르멜 미술’,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격정과 표현> 전시도록, 삼성미술관, pp.22-44.
김영호, ‘앵포르멜 미술의 이론과 수용의 문제’, <미술평단> No.53호, 2000년 가을, pp.4-22.
우혜수, ‘전시를 개최하며’,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p.14-21.
정영목, ‘한국현대회화의 추상성 1950-1970; 전위의 미명 아래’, 조형 제18호, 서울대 조형연구소 1995, pp.18-29.
좌담회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형성과 전개’,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p.181-189.







1. 정영목 교수는 “일본 구타이 그룹의 영향을 주로 받은 지극히 모방적인 운동”이라 주장한다. 또한 김영나 교수는 미국 현대미술의 영향을 식민후기의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정영목, ‘한국현대회화의 추상성 1950-1970; 전위의 미명 아래’, 조형 제18호, 서울대 조형연구소 1995, pp.18-29. / 김영나, ‘전후추상과 우리 나라의 앵포르멜 미술’,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격정과 표현> 전시도록, 삼성미술관, pp.29-30.


2. 이에 대해서는 김영호, ‘앵포르멜 미술의 이론과 수용의 문제’, <미술평단> No.53호, 2000년 가을, pp.4-22를 참고할 것.


3. 이에 대해서는 김미경, ‘벽전에 대한 소고-‘한국 앵포르멜’의 전개에 대한 의문’,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 IV>, Vol.3, ICS, 2004를 참고할 것. <벽전>은 <60년미협>이 주최한 벽전에 몇 일 앞서 덕수궁 담벽을 이용한 최초의 전시회로 알려져 있으며 국전이 개막되던 1960년 10월 1일에 열렸고 그 후 중앙공보관 등 실내에서 다섯 차례의 전시를 갖고 1964년 해체된다.


4. 모노하는 세키네의 작품 <상(相)>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 작품은 원통형으로 떠낸 흙을 그 구멍 옆에 설치하고 후에 흙을 그것을 떠낸 구멍에 다시 채워 넣었다. 이러한 행위는 그로 하여금 사물과 공간의 변형시키고 정정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모노하는 아르테 포베라나 대지미술 등 현대미술의 제 경향들과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으나 그들이 제시한 사물들이 인간에 의해 집적된 대상으로서 사물이 아니라 그가 존재하는 세상과 더불어 예술작품이 된다는 사상을 확대시켰다. 그러므로서 모노하의 사물들은 큐비스트의 파피에 콜레나 레디메이드, 초현실주의 오브제, 네오다다 그리고 팝아트의 오브제와도 차별화될 수 있었다.


5. 이구열 선생의 지적처럼 전쟁 이후 한국에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및 월간 시사회보 잡지 <라이프>, 그리고 일본에서 발행된 국내외 현대미술정보 월간지 <미술수첩> 등을 통해 구미지역 미술정보가 유입되었다. 박서보 화백이 미쉩 타피에의 앵포르멜 이론서인 <또 하나의 미학에 관하여>에 대한 내용이 실린 일본의 미술잡지 <미즈에>를 1958년 빌려 현대미협 회원들이 돌려가면서 읽어보았다는 증언도 외국의 잡지가 국내 앵포르멜을 포함한 현대미술을 자극하고 시각적 공감을 형성하는 매체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전쟁 중에는 앵포르멜의 이념적인 행동지침이나 이론 같은 것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전후 미군정 하에서 “유엔군의 군화발에 묻어온” 미국의 문화는 한국의 미술계에 변화를 야기시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상에 대해서는 좌담회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형성과 전개’,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p.181-189를 참고할 것.


6. 가령 장 뒤뷔페는 풍경이나 인물이라는 대상이 있었고 인질 연작으로 알려진 장 포트리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7. 가령 박서보의 경우 그의 형상을 파괴하고 뿌리고 긁는 과정을 통해 상징적인 형상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라지고 거 행위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캔버스를 만들어 내었을 때 그가 맛본 ‘해방감’이란 참혹한 전쟁의 체험과 암담한 현실에 대한 회화적 분출의 쾌감이었다. “구미의 앵포르멜이나 액션페인팅에서 캔버스는 표현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나의 경우는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파괴의 장이었다”는 고백은 본능적 행위와 유희의 정신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좌담회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형성과 전개’,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184.


8. 우혜수, ‘전시를 개최하며’,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16.


9. 당시의 발표원고는 김영호, 전게서에 전재되어 있다.


10. 좌담회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형성과 전개’,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도록, 삼성미술관, 2000, pp.181-189를 참고할 것.


11. 김영호, ‘앵포르멜 미술의 이론과 수용의 문제’, <미술평단> No.53호, 2000년 가을, pp.4-22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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