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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 시간을 포획하는 덫

김영호

우리는 대개 기차여행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철길 위를 달리는 시선이 기차의 속도를 앞질러 미지 세계로의 접속을 꿈꾸던 시간의 기억이다. 아니면 철로(鐵路)라는 틀의 제약과 규범으로부터 일탈해 자유로운 영역을 비행해 보고 싶은 충동도 가져 보았을 것이다. 이영준의 그림은 이렇듯 기차여행의 시간에 꿈꾸고 욕망하던 우리들의 기억을 창작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남다른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증기 기관차와 종이비행기 그리고 고대 유물 등의 소재뿐만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는 이러한 조형세계의 배경을 대변하고 있다.

이영준의 그림은 일인칭의 서술구조를 지닌다. 그는 그림 속의 기관차를 ‘물화(物化)된 자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기관차와 화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나’로 의인화된 기관차는 공간과 시간의 이동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거리 혹은 공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관객의 의식을 시공간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상징적 도구로 다루어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물화된 자아의 서술구조를 통해 작가는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테마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있다. 관객은 상상의 자유로운 유희 속에서 증기 기관차로 전환된 화가가 이끄는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기 위한 채비를 갖추게 된다.

이영준의 그림은 오버랩 기법을 도입하여 혼합과 중첩된 화면을 구성한다. 기차의 차창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치는 풍경이 어느덧 과거와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듯 그의 그림은 다양한 이미지가 서로 교차하거나 섞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령 종이비행기를 기관차 이미지와 대비시킴으로서 시간의 이동을 둘러싼 서술성을 강화하고, 입체파 화가들처럼 탈것 이미지를 다양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서 새로운 공간성을 북돋운다. 이러한 시공간 이동을 위한 실험은 증기 기관차의 형상 이외에도 고대 유물 이미지를 등장시킴으로서 폭을 넓혀 나간다. 목어나 패면(貝面), 신라 토기와 토우 그리고 청동유물 등은 증기 기관차와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간으로의 여행 상황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화면 위에 이질적인 요소들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싯귀 ‘수술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과 같은 낯선 상황은 현실 저 너머의 환상적 세계로 보는이의 의식을 이끄는 것이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서 19세기 초에 발명된 최초의 증기 기관차 ‘페니다렌호’와 우리의 고대 유물을 대질시킴으로서 상징성을 높인다. 관객의 상상에 따라 화폭위의 사물들은 저마다 물리적 결합의 과정을 거치고 때로는 화학적으로 융화된 세계를 만들어 낸다. 초기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무대위의 배우들처럼 서술적 메시지를 드러내었으나 최근의 작업에서는 점차 상징과 은유적 의미를 품은 조형적 의미가 강화되고 있다. 이는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초현실적 영역으로부터 화면의 내적 질서와 형식에 관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영준이 증기 기관차는 이렇듯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여행한다. 가령 그의 시간여행은 청동기시대나 고대 신라 혹은 목어의 종교 세계를 넘나들면서 태고의 보편적 기억을 환기시킨다. 여행은 작가에 의해 통제된다. 시간의 여행이라는 테마를 위해 초대된 사물들은 화면의 구성과 구도를 위한 규율을 따르고 있다. 토기나 청동기 등은 고증 대상으로서 유물의 박물학적 차원을 넘어 화면위에 복합적인 이미지로 변형되고 의미생산을 위한 형식의 실험을 거쳐 다시 태어난다. 그의 최근 작품에 녹녹히 담겨있는 물감의 마티에르와 선적 요소들은 과거의 유물들 중 토기의 질감과 빗살무늬 그리고 청동기 문양 등 에서 얻은 조형요소들로서 작가만의 개성적인 어법으로 정착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또한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와 표현 형식 사이의 일치감을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자 그의 작품에 개성을 담보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영준의 작품에 스며있는 시간성의 개념에 대해서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석사학위 논문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는 시간성의 개념이란 하이데거가 말하는 ‘직관형식으로 파악되는 존재론적 의미의 시간’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가 시도하는 시간의 여행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절된 마디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속적인 현상으로 파악되는 주관적 세계를 지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증기 기관차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의 관계가 아닌 공존하고 생산적인 시간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읽혀진다. 또한 그가 시도하는 시간여행은 이러한 주관적 시간 체험에 의해 자아의 심리적 경험의 확대를 충족시켜주는 효과를 발생 시키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방패형 동구(銅具), 동물문 견갑(肩鉀)에서, 고신라의 신귀형(神龜形) 주전자와 쌍손잡이 항아리 그리고 기마인물형 토기에 이르는 유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작가의 시간여행을 위해 초대되고 작가의 의도에 의해 화면위에 재해석된 기호들이다. 조형적 언어로 표현된 이미지들은 무한한 의미생산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의 조형적 표상 방식에 따라 그 방향성은 명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며 나는 이영준의 작업에서 새롭게 펼쳐질 독창적 언술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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