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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일 - 벌레 그림에 나타난 존재의 부조리

김영호

성당마다 내부 제대 벽면에 걸려있는 십자고상은 혁신적 사상을 가졌던 한 팔레스타인 젊은이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보듯이 이 죽음은 잔혹한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고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승화된 죽음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 고대 로마의 죄수들에게 가했던 극형인 십자가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죄의 보속과 구원을 나타내는 종교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십자고상이 죽음과 부활의 대립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는 믿음은 이제 전지구적으로 일반화 되어 있다. 나아가 죽음은 예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중세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길목에서 죽음은 다양한 관점으로 묘사되었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표현방식이 극한 상황으로 내닫고 있다. 돼지나 소를 세로로 토막 내어 포르말린 용액에 저장하는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의 경우나, 인간의 사체에 서명함으로서 자신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이태리의 피에로 만초니의 행위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묘사된 죽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 현대미술이다.
예술 표현의 미디어로 사용된 벌레들

유성일의 작업은 벌레의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벌레 사냥꾼이다. 유쾌하지 않은 수확물은 엄밀히 말해 예술적 이미지 생산을 위한 미디어가 되었다. 사진이나 벽면 등에 유인액을 바르고 야간에 빛을 비추면 주변의 날벌레들이 모여들어 접착되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빛을 덫으로 이용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유성일의 작품은 생명 윤리나 기호화된 죽음 등의 문제의식을 파생시킨다. 타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폭력적이다. 사실 하루살이나 파리, 모기, 나방 등의 미물이 유인광선에 의해 제거되는 광경은 사실 고속도로 휴게실 외벽이나 톨게이트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벌레의 죽음은 그것을 해충으로 분류한 인간들의 사회적 규정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 미물들은 오묘한 순환의 서클을 지닌 대자연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간을 이루는 존재들이 아닌가. 따라서 유성일의 벌레 그림은 짐승의 사체를 이용한 데미안 허스트의 경우와도 다른 미학적 담론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유성일은 벌레의 죽음에 대해 안쓰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 대해 만족감을 느낀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벌레의 죽음이 작가가 속해있는 현실의 부조리한 존재 양태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생명 중단의 과정을 직접 주도하는 자신의 비윤리적 태도를 통해 파괴의 본능을 지닌 현대인들에게 역설적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일까. 되돌아보면 근대 이후 심리학자들은 파괴의 욕구를 인간이 지닌 본능의 하나로 규정해 왔다. 프로이트는 죽음을 파괴의 본능을 지닌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 죽음이 생의 본질임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인에게서도 발견되는 파괴의 본능은 유성일의 벌레 작업에 대한 의미생산의 근거가 된다. 안쓰러우면서도 만족감을 주는 생명의 파괴 행위는 유한한 시간과 함께 사멸되어 가는 존재들에 대한 자각적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이러한 작가의 만족감은 제도적 허용에 따라 자행되는 생명과 존재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감정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눈을 돌려 유성일의 이전 작업을 보면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죽음과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사진작업들이 적잖이 눈에 띤다. 병실이나 의학적 도구들을 사용하면서도 생명과 자연의 순환적 프로세스에 관심을 가져 온 것이 그간의 작업이었다.




빛과 시간을 이용한 이중적 이미지들

유성일이 벌레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과 시간을 조형원리로 삼았던 이전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그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동시에 사용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이미지를 채집하는 업을 시도해 왔다. 최근 작업을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어둠을 향해 열린 창문에 망사천을 드리우고 그 위에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비추면 영상이미지가 생기는데, 시간이 흐르고 날이 밝아오면 점차 영상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대신에 자연풍경이 망사천 너머로 보이게 된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빛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이미지가 서서히 뒤바뀌는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두어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허수아비나, 새장과 새, 그리고 명화작품 등을 적당히 배치함으로서 특수한 상황과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다. 따라서 유성일의 작품은 주로 퍼포먼스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그 프로세스를 사진이나 비디오 영상으로 담아 전시한다. 대개 그의 작업은 PM 7:00, PM 7:20, PM 7:40, PM 8:00 등과 같이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단계별 상황의 변화를 기록한 사진이나, 그 프로세스 전체를 3분으로 압축시킨 비디오로 소개되고 있다.

유성일의 빛과 시간을 이용한 사진 작업은 때로 긴 시간이 요구되기도 한다. 여름의 울창한 숲 이미지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가을에 낙엽진 숲으로 변화한 뒤 다시 찾아와 동일한 지점에서 촬영하여 변화된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다. 두개의 시간대를 보여주는 동일 장소에 대한 기록 작업은 각별한 끈기와 계획성을 요구한다. 작가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이 채취할 풍경에 어떤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몸과 빈의자와 같은 매체들은 상황연출을 위한 소품들이 된다. <허수아비>는 추수전과 추수후의 들판을 동일한 지점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변화하는 자연과 그 중심에 버티어 선 존재와의 관계를 주목하게 하며, 우리는 거기에서 시간의 증거자로서 허수아비에 빗대어진 작가 자신의 주체적 존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펼쳐진 고추 사진과 시간이 지난 뒤 붉은 고추로 변화된 사진 작업은 두 시간대의 간극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유성일의 작업은 이중적 이미지를 통해 장소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자연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유한성에 대한 관심은 결국 사멸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데 이 대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벌레 그림이다.

인간과 세계의 불합리한 관계를 드러내다

재론하거니와 유성일의 작업은 생명의 사멸을 담보로 진행된다. 작가가 쳐 놓은 죽음의 덫에 걸려들어 쌓인 벌레의 사체가 그의 작업을 완성하는 온전한 미디어다. 벌레의 군집은 두꺼비나 점박이 개 등의 이미지를 이루거나 이정표나 표지판을 이루기도 한다. 때로는 인쇄된 사진 이미지 표면에 부착된 벌레들은 인쇄물의 망점이나 컴퓨터의 비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유성일의 작업은 미디어 매체로 전환된 벌레의 미학을 보여준다. 십자가형을 둘러싼 폭력과 잔혹성이 인간의 윤리의식을 지배하는 신학적 틀의 원리가 된 것처럼 미물들에게 가해진 죽음도 예술의 불가사이한 힘에 의해 새로운 의미로 탄생되길 작가는 바라는 것일까. 유성일의 부조리.한 죽음의 작업은 우리들에게 실존적 사색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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