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손석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림 앞에서 시점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면 작품의 색채가 카멜레온처럼 변해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시점에 따라서 작품의 이미지가 화면에서 사라지기도 하며 화면을 빠져나와 공중에 부유하는 듯 한 착시적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손석의 그림 앞에서 얻게 되는 시각적 즐거움은 관객의 움직임이라는 조건에 반응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관객의 개입 혹은 참여는 이미지와 바탕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자 마술적 효과를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시선의 이동에 따른 색채의 변화와 이미지의 소멸현상은 사진에서의 레이요그램 기법과 비교된다.





손석의 작품은 시각적 범주에 있지만 그 효과는 촉각적이다. 거친 회벽이나 융털처럼 돌출된 수많은 점들로 덮힌 화면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작가가 소량의 물감 덩어리를 층층이 쌓아올려 만들어낸 것이며, 측면에서 보면 오랜 세월을 거치며 구축된 퇴적층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물감 쌓기 작업은 그의 작품에 적지 않은 시간과 공력이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자로 그은 듯 화면을 수직으로 분할한 선들은 그가 쌓아올린 물감의 층이 무작위적 반복 행위가 아닌 이성적 법칙과 수학적 계산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촉각적 감각의 화면위에 코끼리나 도자기와 같은 소재를 배치시킴으로서 조형형식과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 접목을 유도하고 있다. 유기적 접목이란 촉각적 화면과 주름잡힌 코끼리의 피부, 균열로 덮힌 도자기의 표면과의 관계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촉각적 화면의 구조는 어느덧 그려진 이미지의 표면과 연계되어 그림과 대상이 융화된 제삼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손석의 작품은 서사적 내용이 최소화 되어 있다. 그가 선택한 이미지로서 코끼리거나 도자기 등은 소재의 서술이나 어떤 극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익명의 오브제처럼 화면위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서사적 내용의 최소화 혹은 부재는 역설적으로 화면의 시지각 형식에 대한 관객의 집중력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한다. 가령 이미지 자체로 등장한 화병이나 사발의 형상은 화면의 질감이나 색채 그리고 선과 같은 형식에 의한 촉각적 시각의 유희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손석의 작품에 적용된 서사적 내용이 부재가 곧 의미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풍부한 미학적 의미들을 생산할 가능성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손석의 촉각적 작품은 사물의 비물질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물음과도 상호 연관된 것이다. 가령 도자기를 둘러싼 비물질성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도자기의 허상적 이미지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자기의 실재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주목케 하는 속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는 일루전적 회화예술에서 조금도 억지스런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물의 실재와 가상 사이를 바라보는 일이며 나아가 시각적 충돌과 인식의 혼돈에 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석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이나 신비함은 대상의 존재를 시각으로 받아 드리고 인식적 체험의 단계로 옮겨 그것을 즐기는 감정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손석의 도자기 그림은 사물 자체의 시각적 체험과 그것에 대한 지각적 해석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와 같은 두개의 대립된 개념 사이에 생긴 간극에 미학적 바람을 부채질 하고 있다. 이러한 두 요소 사이의 관계는 시각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고, 서로 대립됨이 없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므로 작품에 어떤 긴장감이 충전되어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손석의 작업은 이렇듯 시각적 유희의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그를 넘어 존재의 인식에 대한 물음으로 의미가 전환된다. 이는 그의 그림이 항아리나 동물의 형상을 나타내면서도 그가 시도하는 것은 항아리와 동물이 아닌 세계의 표상임을 암시한다. 반복해 말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논리의 전복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고 그 시스템은 그림에 등장하는 두개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유기적 교환과 간섭에 따르거나 혹은 서로 충돌하면서 다양한 의미들을 생산해 낸다. 항아리를 그리되 항아리가 아닌 그림, 코끼리를 그리되 코끼리를 넘어선 그림이 손석의 예술이다. 시점의 이동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작가의 그림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항구적이고 절대적 존재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 시대관의 반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손작업에 적잖은 의미를 두고 있다. 손의 노동에 의해 구축된 화면에 대한 일종의 애착이며 전통적 회화의 기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그림의 방식과 기법에 대한 남다른 관심일 것이다. 이러한 손작업에 거는 작가의 기대는 최근 급속히 번지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나 사진으로부터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그를 통해 표현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온 것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그의 작업의 구조는 수학적 선들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트와 망점으로 대변되는 동시대의 시대적 정황과 정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통적 회화예술과 첨단의 미디어아트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틈과 사이의 미학을 내세우는 그의 작품관과 일치되는 대목이다. 문화평론가 이어령 교수가 말하는 ‘디지로그’의 미학이 손석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점 역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