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강광 - 아름다운 터를 위한 도상들

김영호

강광 화백이 최근 들어 천착하고 있는 화제는 <아름다운 삶의 터>이다. 강화도 마니산 자락에 화사를 짓고 정착한 이래 자신을 둘러싼 대지와 생명들에 대한 애정이 한층 깊어졌음을 보게 된다.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그림에는 들꽃과 나무, 별자리와 해 그리고 고색의 정취가 풍기는 석탑과 말을 탄 익명의 인물 등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궁의 공간과 대지의 시간 그리고 그 시공을 관통해 온 역사의 단편들이다. 30년 이상 화백의 캔버스 안에 살고 있는 들개는 어느덧 새끼를 배에 담고서 번식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70-80년대의 그림에 머물던 비극적 실존의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지고 화면에는 여유로운 색채와 장식적 도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가 화백의 그림에서 원초적 자연의 숨결과 생명의 건강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소망하는 이 평온의 터를 위해 치룬 대가를 알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강광 화백의 인생노정은 격변하는 우리 근대사의 얼개와 맥을 같이해 왔다. 강인한 정신력의 고장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정치적 소용돌이의 서울에서 학업을 마쳤고, 모태성징의 생명력을 지닌 화산섬 제주의 자연과 근대화의 수용지 인천에서의 활동을 거쳐 최근에 정착한 역사와 신화의 섬 강화도에 이르기 까지 화백이 걸어온 길은 험난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반도의 허리로 돌아와 날개를 접은 마니산 자락에서 화백은 자신의 인생노정에 대한 기억을 새로운 언어로 토해내고 있다. 천지와 백록의 기가 한반도의 남과 북을 쓸어 마주치는 곳, 단군신화의 영이 살아있는 마니산 참성단을 마주하는 화사의 안뜰에서 화백의 손은 분주하다.

강광 화백의 그림은 단순한 도상적 형태로 제시된다. 시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비추어진 주변적 이미지에 반해 그의 작품 형식은 의외로 장대하거나 선동적인 메시지들이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조형적 특성은 작가 자신이 유지해온 삶의 태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양면적인 구조로 짜여진 사람의 눈처럼 그의 시각은 밖을 향해 열려 있으나 그의 회화적 진정성은 내면에 비추어진 외적 현실을 도상적 기호로 재구성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아 왔다. 이른바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언제나 현실 자체를 넘어선 것이었다. 침묵과 관조의 시각으로 바라본 현실은 그의 작업에 도상적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도상들은 안과 밖의 접점으로서 내면의 거울에 투영된 현실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강광 화백의 도상적 형태들은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대개의 경우 도상들은 추상표현주의적 서정을 지닌 바탕 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들꽃과 나무, 별자리와 해, 그리고 석탑과 말 탄 익명의 인물들은 비정형적이고 거친 붓자국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결국 작가의 화면 조형방식은 비정형적 터치의 바탕 위에 정형화된 도상들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서 마치 무한의 내면에 부유하는 단상들이거나 미궁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중구조가 주는 대비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 그와 호흡을 같이했던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화백의 작품에서 그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업이 개성적 삶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강광 화백의 작품에 나타나는 조형적 결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몇 개로 구분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도상적 기호로 표현된 형태의 상징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기법적 측면에서 그의 어법으로 자리 잡은 스텐실 혹은 드로잉 기법이 그것이다.

우선 들개와 초승달 그리고 나무와 인물의 도상들은 화백 자신이 주도하는 일인칭 시점의 자기화 과정을 거쳐 상징적 의미를 지닌 실체로 해석된다. 가령 들개는 야생적 생명의 상징이거나 동시에 유목적 삶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70년대 이래 최근의 작업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캔버스라는 그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존재로서 자아의 이미지로 읽혀진다. 들개와 더불어 그의 화면에 자리 잡고 있는 초승달 역시 시간의 상징이자 변화와 순환의 은유적 알레고리이며 별자리와 함께 화면에 어떤 시적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화백의 그림이 한편의 시적 서정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서술적 구조를 띤 서사시가 아니라 상징시가 된다. 그의 언어들이 지시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고 관객의 시각과 경험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전해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법적인 측면에서 도상 이미지들은 두개의 대립적 언어로 그려진다. 그 중 하나는 납판을 오려 붙인 것과 같은 형태의 요철감이며 다른 하나는 드로잉에 의한 즉자적 표현성이다. 물감의 요철감은 스텐실의 기법으로부터 생겨난 효과로서 형태에 따라 종이를 오려낸 후 캔버스에 대고 나이프로 색을 덮어가는 방식에서 연유된 것이다. 윤곽을 따라 형성된 세밀한 실선 모양의 빛과 그림자들은 도상 이미지의 물질적 존재감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스텐실 기법은 때로 점선에 국한해 적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시간의 자취에 대한 가시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한편, 도상적 이미지 표현 방식으로서 드로잉 기법에 의한 즉자적 표현성은 또 다른 서정을 드러내 준다. 이 기법은 비정형적 추상의 붓터치를 지닌 바탕이 마르기 전에 굵은 선으로 새나 꽃의 형상을 구획하는 것이다. 이 때 그의 그림이 주는 효과는 스텐실 기법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스텐실 기법이 재료의 물질감이 강화되는데 비해 드로잉 기법에 의한 도상은 바탕 혹은 배경과 융화되어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자유분방하고 표현적인 뉘앙스를 배가 시킨다. 이러한 표현 기법상의 양면적 특성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화백의 자유로운 성품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0년 이후의 작업에서 강광 화백은 문자언어를 사용하는 회수가 부쩍 늘었다. 문자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와 더불어 그 자체가 화면에 하나의 조형적 이미지로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고향으로 간다”, “아름다운 비행”, “마니산 자락에서” 등과 같은 글귀는 작가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에 대한 언어적 표상이다. (사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언어적 표상 작업은 작가가 작품에 붙여놓은 제목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들판에서, 밤바다, 봉화, 가족, 오름, 오월의 노래, 잃어버린 섬, 횃불, 밤, 풍경, 산하, 들에서, 연못에 뜨는 달, 고기가 있는 연못, 꽃나무가 있는 정원, 모란이 피는 정원, 우짖는 새, 춤추는 여인, 들에 다시 서다, 새가 있는 풍경, 방랑자들, 땅벌떼, 사람의 땅 ... 이들 제목은 문법의 구조로 의미화 되어 있지 않지만 작가의 사상과 예술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키워드들이자 그의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이다.)

강광 화백의 작품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시각적 장치는 이름모를 타원형의 기호들이다. 만화의 말풍선과 같기도 한 이 형태는 비워져 있으나 강렬한 적색의 면으로 채색되어 이어져 왔다. 때로는 피어오르는 영혼의 형태로 나타나며 때로는 산자락에 피어오르는 봉화연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타원형의 기호들은 작가가 발언하는 의미로 충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워져 있으며 따라서 어떤 서술적 메시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비워냄으로서 충만해 진 의미는 그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경험과 감각에 따라 천의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붉은 타원의 기호로 드러내는 역설적 발언은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화백이 일구어 낸 또 하나의 개성적 어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오름에 피어날 때 산의 정기가 되듯이 나뭇가지의 끝에서 생명 에너지가 되고 탑의 꼭지에서 역사의 정기가 되는 것이다.

강광 화백의 작업에 등장하는 점선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의 점선은 때로는 스텐실 기법으로 찍혀있어 부조적 볼륨을 드러내기도 하고 드로잉에 의해 제스추어적 속성을 보이기도 한다. 점선은 기억과 시간과 자취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고 있다. 가령 산과 산을 가르는 점선은 개체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나타내고 점선으로 둘러쳐진 산의 이미지는 잃어버린 언덕 혹은 기억속의 산으로 읽혀진다. 또한 들개나 멧돼지 그림의 경우 머리에서 잔등이로 이어지는 점선은 존재의 연장으로서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물론 이들 점선들이 항상 의미론적인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끊임없는 작가의 실험적 조형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강광 화백의 예술은 상징과 시간 그리고 기억의 몽타주로 채워져 있다. 무대위에 올려진 단막극처럼 그의 작품들은 자신이 걸어온 노정과 그 길에서 겪었던 사연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비극적 실존의 저장고가 아니라 자신의 살고 있는 대지에 대한 애정과 그 대지에 서식하는 야생의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의 세계이다. 아름다운 삶의 터에서 강광 화백은 오늘도 마니산 참성단을 향해 나 있는 길을 새롭게 오르고 있을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