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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구 : 특허 예술 - 숨쉬는 메탈

김영호

최근 미술계에서 심화되고 있는 현상은 장르해체와 조형방식의 다양성이다. 공예와 조각, 디자인과 회화 사이의 경계가 와해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 작가가 다수의 매체와 조형방식을 혼용하는 경우가 항다반이다. 포스트모던 미술의 특성으로 제기되는 이러한 장르파기의 현상은 전통적 미술개념의 혼란을 야기했으나 다양성에 바탕을 둔 미술의 본성을 회복하는 한편 예술과 삶의 관계가 한걸음 더 밀착되도록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작가 이병구의 경우에도 실용미술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파기와 다양한 매체 및 조형방식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나타나고 있다. 공예가로서 그가 제작한 일련의 입체작품을 보면 조각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적지 않은 수의 평면작품에도 장식성을 넘어 순수조형의 개념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연물에서 다각면체나 원통 그리고 사각 입방체 같은 기하학적 추상의 형태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조형방식도 목재와 철 또는 돌과 철을 합체시킨 것에서부터 용접과 집적 그리고 레이저 커팅에 이르는 기법을 자유롭게 동원하고 있다.

작가의 조형적 실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급기야 공기압을 이용한 금속판의 성형방법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공예가로서 작업에만 몰두해온 30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그로 하여금 첫 개인전을 개최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건은 이 신비로운 성형방법의 발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형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알루미늄 스틸판을 두 겹으로 겹쳐놓고 가장자리를 용접으로 봉인한 뒤 공업용 컴프레서로 내부에 공기를 주입하면 철판은 풍선처럼 부풀려지면서 마침내 베개나 쿠션 모양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1.6mm 두께의 철판을 종이처럼 변형시키는 압축공기의 힘은 일상적 상상의 범주를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압축공기의 힘은 단순히 철판을 부풀리는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형능력과 그것을 둘러싼 미학적 성과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는다. 공기압은 형태의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특성을 만들어 준다. 그것은 마치 타조알을 성형하는 자연의 과학적 원리가 철판의 팽창과정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고성은 그로 하여금 순수 입방체에서 시작하여 문이나 테이블 같은 구조물을 넘어 기타나 거문고 같은 악기의 제작으로 확대되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병구의 철판 성형을 둘러싼 미학적 원리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일상적 시각과 해석의 메커니즘을 잠시 교란시키는 <헤비메탈의 시각적 가벼움>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철판 재질이 주는 무거움과 완성된 형상이 주는 가벼움은 이전에 작업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시지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스테인리스 금속판의 중량감은 컴프레싱 작업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일그러짐에 의해 마치 종이나 알루미늄 호일과 같은 연성재질의 서정과 뒤섞이게 된다. 공기의 주입과 물질의 팽창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 제삼의 의미가 바로 이병구 철판작업의 해석에 묘미를 더해주는 요소가 된 것이다. 작가는 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상관성을 강화하기 위해 철재 그물망 구조로 감싼 돌맹이나 바위를 작품에 도입하기도 한다.

이병구의 철판작업에 적용되는 또 다른 해석의 키워드는 <금속 표면의 우연성과 가변적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압축공기의 힘에 의해 이중으로 겹쳐진 철판이 부풀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은 특정 부분이 찌그러들면서 생기는 우연한 형상이다. 철판 원형을 입방체 모양으로 제작해 공기를 주입하는 경우에도 우연적 변형이 발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삼을 경우 팽창과정에서 우연적으로 변형된 철판의 표면은 거울처럼 주변의 사물들을 담아 비추어 준다. 이러한 효과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사각의 큐브는 그것이 놓이는 공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들을 품게 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되돌려준다. 일그러지고 변형된 풍경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큐브는 자체가 에너지를 머금고 형상을 지닌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자 공간과 관객을 이어주는 소통의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병구의 작업에서 파생되는 <시각적 가벼움>과 <우연적 가변성>의 개념들은 모더니즘의 시대에 억제되었던 것들이다. 이 개념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는 이유는 예술의 해석을 위한 비평적 잣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이병구의 작품에 적용되는 이 잣대는 사실 각고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공기압에 의한 철물의 팽창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10년 이상 지속해 왔다고 한다. 특히 태양열에 의해 팽창되고 파열되는 금속재질의 속성은 그의 사각형 철조 파이프 막대들을 이용한 용접 조립작업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마케팅적 측면에서 보면 이병구의 작업은 특허예술이다. <공기압에 의한 금속판 소재의 성형방법>이라는 특허가 작업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을 위해 필요한 장비는 일반 공기를 압축하는 공업용 컴프레서가 전부이다. 그러나 이병구가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장비를 이용해 금속판을 부풀리는 작업이 나오기 까지는 앞서 말했듯이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의 발명은 일종의 경험적 과정과 발견의 산물이라는 점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한 작가의 작업에 담긴 의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병구의 작업이 생산해 내는 의미는 단순히 형상의 <시각적 가벼움>이나 <우연적 가변성>의 범주를 넘어 또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그 가능성이란 서두에 말했듯이 실용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파생되는 자유로운 조형의지가 동시대적 삶과 연계될 때 그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증가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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