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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진 : 일상의 그림자 - 환상

김영호

살펴보니 1996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의 모습도 바꾼다는 세월이 길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 동안 작가로서 박형진이 걸어온 작품세계와 태도가 한결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10년의 기간동안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며 남들처럼 이사도 몇 차례 다녔으니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제작해 왔고 다섯 번의 개인전을 통해 작품세계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에 대한 남다르고 야무진 천성 때문이라 여겨진다.

박형진의 작품에 보이는 일관성이란 ‘비밀스런 일상성’이다. 일상의 비밀은 언어적 표현 자체로는 모순을 품은 개념이지만 그림의 세계에서는 낯선 어법이라 할 수 없다. 미술이란 기원에서부터 마술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적어도 해석학적 관점에서 모든 그림 이미지는 상징적이거나 기호로서의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형진이 일군 일상적 비밀의 세계는 마술사처럼 속임수로 꾸며지거나 소설가처럼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구체적 형상과 매질을 지니지만 일정 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 시적 정취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의 태도에는 어떠한 전략적 의도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거나 자신의 가족 그리고 주변적 인물과 풍경들에 대한 반응을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삶을 예술로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는 결과를 낳고 관객들을 일상과 환상이 혼합된 서정세계로 인도한다.

박형진의 대학 졸업작품 <멋대로(At random)>(1994)는 일상적 비밀의 씨앗이 학창시절부터 내려져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자신이 ‘대학 4학년 여름방학 기간동안의 유럽 여행 중 베르메르의 작품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제작한 것’인데 ‘당시 자신의 상황과 명화를 한데 어우러지게 표현해 본 것’ 이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를 그린 이 그림에 박형진이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아마도 일상풍경의 한 컷에서 발산된 어떤 힘을 표현한 네덜란드 화가의 안목과 그 속에 배어있는 일상적 세계관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제목은 그것을 조형적 어법으로 자기화 시키려는 의도에 대한 일종의 조바심 또는 도전의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그를 지도했던 오세열 선생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의지에 따라 그는 재현적 공간을 그의 화면위에 평면적으로 변주시켜 펼쳐 놓았으며, 강한 색면의 분할과 배치로 음영의 시선을 조형적으로 강화 시키고 있다. 붉은 테이블 위의 밥사발과 가지런히 놓인 수저와 젓가락은 자신의 주변적 일상을 대하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후 박형진은 작가 자신과 친구 그리고 식구처럼 키우던 개 다숙이 등 주변적 존재에 대한 개인적 시선과 섬세한 성찰의 시간을 기록한 작품들을 그려내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의 제목으로서 <친구와 나>, <다숙이>, <반성>, <희망적인 콩>, <속물>, <러버(Lover)> 등은 일상적 비밀의 세계에 대한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1998년 2회 개인전에 소개된 그림들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반응의 결과물로서 작품이라는 기존의 선을 크게 넘어서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그의 개성이 엿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조형적인 측면에서의 자기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을 몇 개로 나누는 공간 분할 방식이나, 작은 그림자를 빌려 실체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식, 그리고 심리적 공간의 연출 등이 그것이다. 분할된 공간은 이 시기의 시멘트 콘크리트 옥상에 대한 관심에서 온 것이며 <우울증>, <아버지의 정원>, <담화> 그리고 <눈뜨고 꾼 꿈>은 이 시기의 특수공간과 조형적 자기화의 어법을 종합적으로 표현해 낸 성공적 작업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법에 의해 작가가 채택한 일상적 소재들은 상징과 은유의 구조를 품은 재치 넘치는 세계로 변주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악상의 자유로운 전개에 따라 펼쳐지는 판타지아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서 옥상에 웅크리고 앉아 뒤집힌 색동우산을 주시하는 어린아이의 그림자는 강아지와 닮아 있으며 화분에 가려져 반만 드러나 있는 플라스틱 공룡은 마치 움직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우산 속에 고인 물은 오딧세이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심리적 파동의 장치로서, 어린아이의 몽환적 항해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세밀한 상황 파악의 결과이다. 옥상의 정원을 다룬 <아버지의 정원>은 주제가 주는 알레고리가 일단 흥미롭다. 박형진이 한동안 살았던 집의 옥상은 삭막한 콘크리트 슬라브 건축으로 ‘삭막한 도시공간에서 자연을 꿈꾸는 아버지의 소박한 꿈이 한동안 유지되던 정원’이자 인공의 손을 거두면 사라지고 말 한계의 장소다. 하지만 그곳은 다숙이라는 늙은 개의 안식처이며 그 개에게는 낯선 이 집 손주 아이와 꼬마 침입자들이 구슬치기하는 놀이공간이기도 하다. 가끔 올라가본 작가에게 옥상은 상상을 제공하고 있는 심리적 공간으로 변해 화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시기의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 그림의 관심사는 내 주변의 일들이다.”

주변적 일상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2000년 3회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좀더 현실의 나락으로 주제를 끌어내리게 된다. 그것은 작품을 일종의 일기 형식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결혼과 거주지역의 변화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기로 인해 일상성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진 결과이다. 특히 아기의 탄생은 가족에 대해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의 제목이 <신생>, <베이비 파파>, <삼인조> 등의 시리즈로 이어지는 것은 작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베이비 파파> 연작에는 아이를 돌보는 아버지와 잘 자라주는 자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엿보인다. 이와 더불어 시댁이 경영하는 풍기의 사과 과수원으로 이사를 온 뒤에 자연스럽게 작가의 시선은 사과나무와 사과 그리고 텃밭이 있는 과수원으로 옮겨진다. 이 시기부터 하나의 일상적 환경이 되어버린 과수원 풍경은 의인화된 사과의 이미지들을 만들었고 자신의 표현대로 사과를 ‘충분하게’ 그렸다.

일상적 소재들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 따라 표현방식도 은유와 상징이 맴도는 분위기를 벗어나 사실과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사실주의적 묘사 방식을 혼용하면서 다변화 된다. <사과 그리기>는 거대한 캔버스의 평면에 사과를 도상적으로 펼쳐 나열해 놓은 것으로 자세히 보면 빈 공간은 ‘사과’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다. 작가의 사과에 대한 생각은 때로 의인화를 거치며 희화되기도 하는데 사과맨 시리즈가 그것이다. <세수하는 사과맨>, <이 딲는 사과맨> 등을 비롯해 쥬스를 마시고, 축구하고, 사과를 먹고, 잠자는 다양한 표정의 사과맨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다. 박형진의 사과에 대한 열광은 캔버스 그림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열매 자체의 표면에 무늬를 넣는 재치를 보인다. 이른바 빛에 의해 착색이 되는 현상을 이용해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에 이미지를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술사과는 그의 지인들과 함께 소비되었다.

2003년 4회 개인전에 소개된 작업에서부터 박형진은 다시 화가로서의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 <눈만 뜨면 나무>는 자신이 좋던 싫던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나무에 대한 인상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푸른 잎사귀와 붉은 열매들이 눈에 걸리는 과수원 생활은 박형진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에 충만하게 펼쳐지는 빛과 그 화려한 생명의 빛을 담아내는 초록과 빨강의 나무들이요 그 사이를 뒤집고 노니는 요정들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의 작품은 곧바로 하나의 동화적 분위기를 지니게 되었다. 작가는 몇 년 전 도시의 옥상을 그리던 시절 화폭에 등장했던 플라스틱 공룡이나 장난감들도 과수원의 푸른 뜰로 초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옥상정원을 가꾸던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에 딸과 외손주가 살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일까.

아무튼 이 시기에 박형진의 개성적 조형언어는 미시적 관점으로 묘사된 거대한 나뭇잎이나 열매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요정들을 등장시키며 동화속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식적 발견에 대한 작가의 의도는 여태껏 그래왔듯이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커다란 잎사귀와 커다란 열매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잎사귀와 열매를 커다랗게 그렸다.” <나무 이야기>등에 등장하는 요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렇듯 박형진의 예술에 대한 동기부여의 계기는 언제나 자연스럽다. <상당히 큰 잎사귀>나 <상당히 큰 열매>는 그 자연스러운 시선의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주변의 것들에 대한 작가의 타고난 애정과 관찰력 그리고 독창적 표현력에 의해 하나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2004년 5회 개인전 이후 박형진의 작품세계는 완전한 자기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텃밭에 자라는 식물들의 거대한 잎사귀와 그것을 돌보는 작은 인물들, 그리고 물 조리게에서 분사되는 물줄기와 그 끝에 피는 작은 무지개들은 박형진의 트레드 마크가 되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작은 인물들은 화가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 주변적 인물이지만 동화적 표현어법에 의해 등장인물들은 어느덧 보는 사람의 마음으로 전달되면서 그 가꾸기의 노동에 동참하게 된다. 일상적 비밀의 세계는 작가의 영역을 벗어나 이제 모두의 즐거움이 자라는 텃밭이 된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개성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대형 식물과 작은 인물’로 그 크기를 반전시킨 결과이자, 대형 화면에 표현된 미시적 관점의 환상 풍경이 만들어낸 효과에서 생겨난 것이다.

최근 박형진은 작은 인물이 들어가 있는 <정원에서 놀기(Play in The Garden)>, <잘 자라라(grow well)> 연작을 그리고 있다. 잎사귀에 물을 주거나 아이들이 노는 정원 풍경이다. 여전히 아이들은 잎사귀에 매달려 있거나 잎사귀 그늘 아래서 나뭇잎을 쥐고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다. 작품의 크기도 100호 이상의 캔버스를 사용하는데 배경으로 떠있는 조각구름과 화면분할에 의한 정원 공간 펼치기 들은 화면의 공간과 서정을 한 차원 넓혀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도 식물뿐만 아니라 물고기떼나 새떼 등이 조리게에서 분사되는 물줄기와 더불어 표현되면서 환상의 영역이 한층 다양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박형진의 작업이 일구어낸 개성적 어법은 동화를 잃어버린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정신적 쉼터를 제공한다. 이러한 대중적 호응은 그의 작업이 국내의 화단에 좋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데에서 확인될 수 있다. 하지만 박형진의 ‘작은 주제의 큰 그림’이 주는 의미는 비단 동화적 소재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국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일상의 배면에 숨겨진 환상의 영역을 발견하는 작가의 시각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명확한 존재물로 표상하는 작가의 조형적 능력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박형진의 작품세계가 일구어낸 성과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화나 우화의 세계가 그러한 것처럼 작가의 조형언어가 개체적 삶의 울타리를 넘어 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아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박형진의 동화적 세계는 어른들이 꿈꾸는 이상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순결한 자연과 더불어 살고픈 현대적 심리의 반영이자, 동전의 양면처럼 일상과 환상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간섭하는 세계이다. 박형진의 작품에 담은 일상의 10년은 이렇듯 색다르고 건강한 백일몽의 서정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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