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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의 프레스 플라워 - 마른 꽃이 기호가 될 때

김영호

우리는 누구나 마른 꽃(혹은 잎사귀)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시집을 정리하다 책갈피에 끼워진 클로버나 은행잎 그리고 단풍나무잎을 우연히 발견하는 순간의 설래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른 꽃은 늘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는 추억의 전령사가 된다. 그것은 비단 채집한 계절이나 시간의 기억 뿐 만 아니라 꽃잎을 보낸 자연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때 책갈피에서 발견된 마른 꽃잎은 그저 꽃잎이 아니요, 나와 자연을 한데 묶어내는 인식의 덫이 된다. 꽃이 더 이상 꽃이기를 그치는 이 대목에서 만나는 것이 꽃의 예술이다.

전미경이 다루는 것은 꽃이되 그것은 이미 꽃이 아닌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이른바 꽃의 의미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의미생산의 형식이라면 그의 프레스플라워는 어떤 예술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사실 복잡한 구조가 얽혀 있다. 그것의 의미를 하나로 규정하는 일 자체는 불가능한 것이다. 기호로서 제시된 꽃 말 자체는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 정해진 약속일뿐이며, 또한 제시된 꽃의 의미화는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기억 그리고 길들여진 취향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미경이 제작한 꽃그림이 그렇다고 해서 해석불가의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들을 생산한다고 해야 옳다. 꽃의 기호학은 이러한 해석의 자의성과 다중성을 허용토록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미경이 내어놓은 꽃그림 앞에서 주관적인 의미를 주장하는 것을 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전미경의 꽃그림은 꽃이며 꽃이 아닌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세계는 우리를 조형적 형태를 넘어선 무수한 대자연의 숨결과 이치를 재발견케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꽃그림 앞에서 자유롭다.

전미경은 이러한 해석상의 혼돈을 최소화 하기위해 우리들에게 감상을 위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가 정한 주제인 <자연, 꿈꾸는 집>은 무한한 여행을 위한 매개체이자 해석의 도구이다. 배나 기차 그리고 비행기라는 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자연이 각각 다르듯 작가가 정한 ‘주제’를 통해 우리가 꽃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 된다. 만일 우리가 전미경이 내놓은 주제를 통해 그가 생산하는 의미의 세계에 동감할 수 있다면 그와의 정신적 결속이 가능하고 그 동감의 진폭이 클수록 작가의 입장에서는 성공이라 할 성과를 얻게 된다.

전미경이 내놓은 <자연, 꿈꾸는 집>이라는 화두는 어떤 의미구조를 담고 있을까? 이 말의 뜻을 풀어보면 작가의 꽃은 집이며 그가 말하는 집은 곧 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꽃=집=자연’의 등식이 성립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형용사가 꿈이므로 ‘꿈꾸는 꽃=꿈꾸는 집=꿈꾸는 자연’이라는 해석의 틀이 결과적으로 만들어진다. 작가가 의미생산의 형식으로서 예술을 지향하고 있음을 전제할 때 이러한 등식을 풀어보는 것은 작가의 작업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꽃이 기호가 작가 자신의 삶과 연결되고 있을을 알 때 전미경의 프레스플라워는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내보인다.



이번 전시회에서 전미경이 ‘집’이라는 화두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나는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매우 적절하다고 여긴다. 꽃이 집이며 자연 또한 집이라는 세계관은 자연의 자궁으로서 꽃의 의미를 찾아내는 눈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꽃은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다. 자연의 법칙성 속에서 안개와 이슬과 햇빛을 선택적으로 조절하여 생명의 씨앗을 키우는 창조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씨방은 자연의 방이며 잉태되고 성장하고 사멸하는 생명있는 모든 것들을 보호하고 감싸는 집의 상징이 된다. 전미경은 이러한 기호화된 꽃의 집에서 현실의 현상을 넘어선 꿈이 경영하는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프레스플라워의 매력은 바로 자연과 삶이 함께하는 기호라는데 있다. 야생의 꽃을 채취하는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가 들이는 노력이나, 건조와 분류의 과정에 들어가는 정성은 장인적 숙련과 섬세함을 요구한다. 또한 작품으로 변주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손의 기능을 넘어선 뛰어난 조형감각과 의미부여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꽃을 채취하기 위한 계절과 시간과 때를 알아야 하며 여행을 나서는 일은 실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므로 이 모든 프로세스 자체가 예술의 과정이라는 생각 없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에서 꿈을 꾼다. 나비의 꿈과 강의 꿈이 있고 나를 안고 있는 초원과 그 위에 설정된 집의 꿈이다.

이 대목에서 좋은 프레스플라워란 무엇인가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좋은 재료와 좋은 화두가 좋은 예술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예수와 그의 선행을 그린 그림이 모두 명화가 될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이 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화면을 경영하는 조형능력이다. 그런데 프레스플라워 아트의 경우 이 조형능력은 평면으로 눌린 꽃이라는 재료 즉 매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꽃이 재료의 차원으로 머무르게 되는 순간 장식미술이거나 박제된 생명의 차원에 머물 수 밖에 없게 된다.

역사적으로 꽃을 눌러 보존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일반적으로 수세기 전에 식물표본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채집된 식물의 모양새나 속성을 생물학적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저장하게 된 것이다. 이 때의 꽃은 바로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꽃이며 우리는 그것을 꽃의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는 프레스플라워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꽃의 조형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꽃이 어떤 형상을 표현하는 미디어로 사용되면서 매체적 질료로 바뀌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 때 꽃은 물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인식되는데 이 경우 굳이 건조된 생화를 사용해야 하는 필연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아쉽다.

프레스플라워가 예술의 경지로 오르려면 ‘꽃이 꽃이면서도 꽃이 아닌 단계’로 접어들게 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것이 프레스플라워 아트의 참 조형이라 생각한다. 꽃 자체를 보여주는 작품도, 꽃이 재료로 사용될 뿐인 작품도 아닌 조형능력은 바로 마른 꽃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는 능력이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상상력과 세계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창조될 수 있다. 가령 꽃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꽃잎의 으스러짐과 연결시키거나, 꽃의 요정을 동화적 어법으로 풀어내는 일 등이 그것이다.

전미경의 프레스플라워 아트는 꽃을 재료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위한 가능태들을 크게 지니고 있다. 이번 개인전이 그가 앞으로 추진해야 할 예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꽃을 대하는 예절과 지식 그것을 다루는 조형감각이 남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프레스플라워는 생명의 인위적 중단을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잔인하다 할 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생명 활동의 중단을 통해 기호화된 꿈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자연의 섭리의 하나거늘.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박제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예술은 그에 대한 예우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꽃이 떨어져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듯 전미경의 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전해주는 자연의 메시지는 이처럼 비장한 서사시를 아울러 동반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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