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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 드리워진 일곱 그림자

김영호

<에스파스 솔> 개관 기념전


아직도 척박하기만 한 국내의 미술환경에도 불구하고 기획전시 전문의 새로운 미술문화공간 <에스파스 솔>이 서울에 새 둥지를 틀었다. 사설 갤러리 경영을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명의식 뿐만 아니라 탁월한 마케팅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고 보면 <에스파스 솔>의 용단에 염려가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파스 솔>이 꾸민 전시공간과 개관 기념전에서 소개되는 작가들의 작품성향을 보면 출발점에 선 이 문화공간이 지닌 전문성과 비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영자가 그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미술계에서 꾸준히 쌓아온 전시기획 경력과 현지 미술관 큐레이터나 작가들과의 폭넓은 네트웍은 <에스파스 솔>이 가진 큰 자산이다. 이러한 점에서 척박한 국내의 미술환경이 오히려 호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생 갤러리의 위상은 소개되는 작품의 질과 경향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번 첫걸음을 떼는 <에스파스 솔>의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 개관 기념전에 소개되는 작가 일곱명 모두가 개성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신비한 환상의 영역으로 관객들을 이끌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선택한 매체는 평면회화에서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에서 디지털미디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모두가 50 전후의 연륜을 지닌 작가들이며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제 화단에서 작품세계를 인정받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특히 평면작업의 경우 회화예술의 힘을 되살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모두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현대적 삶의 공간에서 겪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빈센트 코르페(Vincent Corpet)의 그림에는 억압과 폭력의 상황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분해되고 재조합된 신체는 마치 베이컨의 인물들처럼 그로테스크한 몸짓을 만들고 있다. 인체뿐만 아니라 코끼리나 백조 혹은 문어나 물고기 같은 다양한 동물의 이미지들도 해체와 조립을 반복하며 자리하고 있다. 사각 혹은 원형으로 변형된 캔버스들은 처절한 해체의 욕망으로 채워진 이미지들에 동조하며 폭력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코르페가 조성하는 폭력은 비판적 틀에 의해 조절됨으로서 건강성을 지닌다. 그것은 이면화 혹은 삼면화로 구성된 다중적 화면의 대비효과와 화면에 문자언어를 삽입함으로서 야기되는 이미지의 해석방식 등에서 발견된다. 코르페의 작업에는 무한대의 환상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과 원초적 에너지 그리고 사고의 유희성이 엿보인다.

필립 파비에(Phillipe Favier)의 그림에 드러나는 것은 또 다른 환상의 세계이다. 어설프게 조립된 듯 그려진 해골과 뼈 이미지들은 화면공간을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만들어 간다. 연극적 서술구조를 지니기도 한 그의 작업은 히로니무스 보스의 환상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해골과 뼈로 대체된 형국이다. 기이성과 불안정성 그리고 연약함과 소극성 등은 기존의 예술에서는 소외되어 왔던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파비에의 작업은 이러한 요소들을 예술표현의 중심적 가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의 작업은 소외되고 터부시되고 은닉되어 온 이미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대미학의 흐름을 수용하고 있다. 즐거움과 음울함 그리고 블랙 유머가 지어내는 신비로운 역전의 미학이 그의 작품에 담긴 비밀이라 할 수 있다.

피오트르 클멘시비츠(Piotr Klmensiewicz)는 집이나 의자 혹은 사다리 등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추상적 바탕 위에 배치하는 작업을 해왔다. 바탕은 최근 들어 강렬한 색띠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양한 화법으로 분위기를 달리 함으로서 모티브가 발산하는 메시지를 다변화 시킨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노트에 따르면 ‘딜레마의 장소’ 혹은 ‘오브제가 되어버린 관객’이라는 설치적 경향의 개념이다. 이는 클멘시비츠의 작업의도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집이나 의자 혹은 사다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에 대한 유희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대위에 선 배우처럼 작가가 연출하는 집이나 의자 혹은 사다리는 비어있거나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며 관객들에게 묵시적 의미생산의 게임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미카엘 미루노비츠(Mihael Milunovic)는 회화뿐만 아니라 사진, 조각, 설치, 음향,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해 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서로 다른 매체를 사용해 일관된 문맥을 만들어 가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가령 일상적 이미지와 오브제들을 연계해 작가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이슈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단면들의 조합으로서 인식되면서 보편화된 이슈의 시각적 표현물로서 이해된다. 죽음, 공포, 굶주림, 증오, 음욕, 전염병, 전쟁, 폭력 등과 같은 현대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드러내는 개념들이 그의 작업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세계 평등화와 힘의 지배, 미디어 네트워크의 찬미로 대변되는 현대의 유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비평적 물음은 냉정하기만 하다.

김형기(Kim Hyung-Gi)의 작업은 컴퓨터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가 시각화 될 때 나타나는 우연성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물리적 운동 속에 놓인 영상이미지를 바라보며 관객이 체험하는 우연한 잔상들과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환상적 이미지의 생성에 주목한다. 가령 싱글 체널 비디오로 촬영된 얼굴 이미지를 특수 스크린에 투사시킴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지각에 유연성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김형기가 멀티미디어 매체 작업을 통해 발언하려는 세계는 내면화된 모놀로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이테크놀로지의 언어와 모노그램의 어법으로 표상된 꿈의 세계다. 어둠 속에 투사되는 빛의 효과는 환상의 영역을 적절하게 보여주며 때로 설치되는 음향효과는 어둠의 소리를 관객들의 가슴을 진동시킨다.




자멜 타타(Djamel Tatah)의 화면에는 또 하나의 고독이 머물고 있다. 절약된 화면과 인물의 이미지는 모놀로그의 세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대개의 경우 하나의 인물이미지가 청회색의 창백한 얼굴과 검정색의 복장으로 표현된다. 인물이 배치된 자리는 사각 화면의 외곽으로 밀려있어 전통적 인물화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파괴시키고 있다. 복수 인물이 등장할 경우에도 그것은 반복적으로 찍힌 듯 다중화된 자신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 비쳐진 모놀로그의 세계는 어느덧 동어반복적 자아의 표상으로 보인다. 어쩌다 등장한 커플의 경우에도 거기에는 차겁고 고립된 관계가 읽혀질 뿐이다. 특정한 사건에 대한 서술구조마저 날려버린 텅빈 공간에 부유하듯 맴도는 인물은 현대를 사는 작가의 자화상이자 우리들의 초상이며 그래서 그의 이상한 그림은 낯설지 않다.

한명옥(Han Myung-Ok)은 오래전부터 흰색의 무명실을 사용한 작업을 통해 개인적 삶의 편린들을 드러내 왔다. 무명실의 속성인 연속성 혹은 연결성을 이용해 사발그릇의 내부를 휘감아 채우거나 오브제의 외부를 감싸 오르면서 시간을 조형하는 것이다. 토네이도와 같이 소용돌이치며 중심에 형성된 공간은 세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시각적 울림을 돋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돌 위에 똬리를 틀어 기이한 모양새를 꾸미며 올라앉은 풀 먹인 실은 마치 오래된 화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이 주는 길이와 그것을 휘감는 과정의 축적된 시간성 때문일 것이다. 한명옥은 이렇게 완성된 오브제들을 바닥에 흩어놓듯 설치하거나 실타래를 풀어 놓음으로서 공간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이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환상을 드러낸다.

이상의 작가들은 다양한 매체와 동기 그리고 각각의 방법을 그릇으로 사용해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창조의 수액을 담아낸다. 완성된 작품들은 형식을 달리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개념화되거나 이지적이거나 사변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환상과 상상 그리고 감각과 상징의 제국에 관심을 연을 두고 있다는 데서 공통점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화단에 새 둥지를 튼 <에스파스 솔>이 걸어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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