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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랑스 미술교류 소사

김영호

개관

격동의 조선왕조 말, 1886년 6월 4일에 이루어진 <한불수교조약>은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를 공식화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프랑스는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에 이어 조선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여섯 번째의 서방국가가 되었고 이듬해인 1887년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가 초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국내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가 강대국의 앞잡이로 치부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을 포함한 수교조약의 체결은 양국간의 문화적 교류사에 하나의 분명한 사건이었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수교조약은 프랑스 선교사의 파견과 순교 그리고 군함파견으로 이어지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라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맺어진 결실이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조선왕조의 고종황제는 외교공관을 통해 서양의 기술자와 미술가 등을 불러들이고 한국정부의 대신을 프랑스로 파견하는 등 문화교류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과 프랑스의 우호적 관계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현지에 전통양식의 한국관(대한제국관)을 설치하는 단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서방지역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일본의 간섭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1876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은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급기야 1910년 한국을 일본으로 병합시켰다.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1945년 해방이 될 때 까지 서양과의 직접적인 외교 채널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통해 진행되었다. 이후 한국의 문화적 근대화는 변종적인 것이라는 한계 또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이 공식적 교류를 재개하게 된 것은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프랑스 대사관이 재개관 되면서였다. 그러나 뒤이은 한국전쟁(1950-1953)에 의해 교류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전란동안 평화유지군으로 한국에 파견된 1000여명의 프랑스 지원병들은 ‘은둔의 나라’를 서방국가에 알리는데 나름대로 기여했으나, 1954년 신임 프랑스 대사가 입국하면서 비로소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 되고 이때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다수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건너오게 된다.



인연의 시작

시간을 되돌려 1900년으로 거슬러 오르면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프랑스인 미술가로 알려진 레미옹(Rémion)을 만나게 된다.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인 세브르 출신이자 도예가 였던 레미옹은 1900년에 공예학교 창설을 위해 궁정으로부터 초빙되어 1904년까지 머무르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의 회화작품은 인쇄된 흑백사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레미옹은 장차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될 고희동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희동이 다니던 프랑스어학교인 한성법어학교의 교사 마르텔의 초상을 그렸는데 당시 13세였던 어린 고희동이 이 스케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서양화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희동은 ‘서양화의 과학적인 특이한 묘사기법과 그 생생한 사실감에 매료되었고 재래적 전통회화의 비현실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서양화법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190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결국 고희동은 1911년에 건너간 김관호, 1912년에 건너간 김찬영, 그리고 1914년에 건너간 나혜석, 이종우, 김병규 등과 더불어 동경에서 서양화를 수학한 첫 세대로 알려지게 된다.

고희동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1910년, 일본화단은 이미 프랑스에서 교육받거나 영향을 받은 미술인들에 의해 다양한 서양화 기법들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미술경향은 파리 유학(1884-1893)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와 그의 동료 구메 게이치로(久米柱一郞)에 의해 도입된 인상주의 화풍이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소개된 인상주의 화풍은 단면적이고 외향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일본화의 특성과 결합된 것이었다. 이들은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이란 살롱 계열의 작가에게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기초를 배움으로서 고전풍과 인상파 기법을 절충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고희동의 그림뿐만 아니라 김관호의 <해질녘>을 비롯한 동경 유학 첫 세대의 작품경향이 사실주의에 기초한 인상주의 화풍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인 화가들의 파리 진출

식민지 한국 청년들의 해외진출은 유럽으로도 이어졌다. 한국미술 사상 최초의 프랑스 미술유학생으로는 1925년 파리에 도착한 이종우를 들고 있다. 이와 함께 1922년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후 베를린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파리에 도착한 배운성이나 1929년 도불해 6개월간 머물렀던 나혜석도 재불 한인화가들의 기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들의 몸은 예술의 중심지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일제의 압제상황과 다가올 세계대전의 전운 속에서 그 활동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한국 국적을 회복한 작가들의 본격적인 프랑스 진출은 해방과 정부수립의 산고 그리고 전쟁을 모두 치룬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에콜 드 파리>의 고장 파리는 일제시대의 동경을 대신하여 새로운 미술의 꿈을 충족시킬 예향으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에 파리에 도착한 작가는 남관(54), 손동진(54), 김흥수(55), 박영선(55), 김환기(55), 함대정(56), 이성자(58), 이응로(58), 이세득(58), 변종하(59) 등이 있으며 향후 한국의 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에 한인 미술가들이 집단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1954년은 재불 한인교민사의 기원을 이루는 시기였다. 프랑스 내의 한인사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건너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쟁 직전인 1950년에 입국, 파리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서품을 받은 이영식 신부에 의해 최초의 파리한인공동체가 1954년 교구청의 승인아래 발족되면서 한인사회가 본격적인 집단 활동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활동의 배경은 주로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사업의 구체적 내용은 당시의 어려운 국내사정에 비추어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전쟁의 여파로 당시 유학생들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극도의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이 같은 환경 속에 파리한인공동체의 주임신부는 유학생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영식 신부는 파리 6구 생 쟝 밥티스트(St-Jean Baptiste)가의 어느 성당 종탑아래 세칸 방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화가 유학생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54년 도불한 남관이 집을 구하지 못해 사제관에서 6개월간 거처하기도 했고, 뒤를 이어 유학 온 김흥수도 이 사제관에서 한동안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 근대화의 첨병들 중에 문화적 전사들의 예술은 이렇듯 개인적 삶의 어려움과 전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고, 파리에서 개최되는 전시회들인 <살롱 드 메>, <살롱 데 장데팡당>, <살롱 도톤느>과 다양한 국제전 그리고 현지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앵포르멜의 국내 수용과 그 한계

통상 1957년을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미술 운동은 국제적 경향으로서 전후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el) 운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는 한국의 현대미술의 태동이 전후 파리화단과 밀착되어 있고 그 연결의 통로는 파리 현지의 미술경향에 민감했던 한인화가 들이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앵포르멜의 수용은 유학파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첫 세대로서 미술단체를 통해 전위적 미술운동을 주도했던 일련의 화가들에 의해 급속히 국내에 확산되었다. 국난격변의 소용돌이를 국내에서 몸소 체험한 세대로서 이들은 앵포르멜의 양식을 시대의 정신적 육체적 황폐화에 대응하며 그것을 예술적 차원으로 표상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주지하듯이 앵포르멜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비구상 미술의 극단적 경향(Tendances extremes de la peinture non figurative)이라는 테마로 시작되었다. 추상의 거대범주에서 명명된 다양한 용어와 작가군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자발적 제스추어와 서체적 기술방법을 도입했고 표현적 재료사용에 관심을 두면서 설명적 형상을 거부하고 있다는데서 발견된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앵포르멜 아트는 사실주의의 조건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작품에 구체적 내용을 지시하는 제목을 달았을 뿐만 아니라 회화의 독자성(identité)이나 구도(composition)와 구성(construction)등의 전통적 회화 규칙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일부 작가들은 구상적 형태를 완전히 화면에서 삭제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개인의 의식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프랑스 앵포르멜의 후예임을 자칭하며 출범한 일련의 국내 작가들은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5월에 창립전을 열고 한국화단에 추상미술의 불씨를 심었다. 이들은 일본유학파와 국전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아카데미즘 미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은 일제식민지와 태평양전쟁을 거쳐 해방과 남북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현장을 몸소 체험한 신예들이었고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첫 세대 작가들이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방황하던 그들에게 이차대전 이후에 나타난 프랑스인들의 실존적 존재의식에 담긴 부정과 우울의 경험들과 그 표현의 방식에 동질감을 느꼈고 그 수용의 불씨는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앵포르멜로 대변되는 서정적 추상미술 운동은 고비를 맞게되었다. 앵포르멜과 더불어 추상표현주의 양식이 합세하면서 이에 대한 전폭적인 수용과 그 표현방식은 점차 유행이 되었으며 몇 해 만에 포화상태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2년에 김영주와 방근택과 같은 비평가들은 <병든 한국의 현대미술>과 <모방의 홍수기>라는 일간지의 제하에 ‘일률적 표현방법과 양식의 전사 그리고 즉물주의적인 재료의 유희에서 새로운 미학을 발굴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한국미술은 병들고 있다’고 지적하였고 이러한 대세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



지속적인 파리비엔날레 참가

국내의 미술계가 동경의 시선을 국제화단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묵(61), 방혜자(61), 문신(61), 김기린(61), 김창렬(65), 정상화(67) 등이 파리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입국 선배들처럼 살롱이나 화랑과 관계를 가지며 자신의 창조적 열정을 묵묵히 다스려 나갔다.

이 시기의 일부 국내파 작가들은 해외파와 연계하면서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 등의 국제전 참가를 통한 해외진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가 주최한 제2회 파리비엔날레는 국제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출구가 되었다. 상기 국제전에는 1961년 2회에서 1982년 12회의 행사까지 11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품을 보내게 되는데, 최초의 선발작가들이었던 김창렬, 정창섭, 조용익, 박서보, 윤명로, 김봉태, 최기원등은 그후 이어지는 정상화, 정영렬, 하종현, 최명영, 박석원, 최만린, 서승원등과 함께 196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서 소개되었고 그 위상은 국내화단에 그대로 이어졌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했던 국내 작가들의 작품경향을 살펴보면 당시의 파리 화단에 대한 한국 미술가들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이 추상미술의 극복을 내세우며 전위적 성향의 예술을 지향하는 파리비엔날레에 어떠한 반응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출품된 작품의 형식에 미루어 앵포르멜 회화와 미니멀리즘에 근거한 모노크롬 추상미술은 이미 파리의 대중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한국작가들의 해외진출은 1970년대에 이르면서 프랑스가 아닌 일본을 중심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결국 파리에서의 국제전을 통한 한인작가들의 본격적인 진출은 국내거주의 현역작가들에 의해 첫발을 내 디뎠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현지에서 개인적으로 활동을 했던 작가들은 그 숫자나 성과로 보아 극히 미미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를 살았던 유학생들의 경우 아직도 전위와 보수에 모두 무관한 제3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 이었다. 국내에서 열광했던 외래문화에 대한 환상도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도 체험을 통해 극복한 이들에게는 예술과 삶 사이에 설정된 개체적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 조형방식과 매체의 유입

196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되던 미술의 새로운 경향은 한마디로 추상미술에 대한 극복 의지의 결과로 대두된 새로운 형상주의 미술과 매체를 둘러싼 실험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파리의 경우 이른바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던 서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사이에 벌어진 개념적 논쟁은 일련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또 다른 예술을 모색케 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물결의 하나는 이브 클랭(Yves Klein), 아르망(Arman), 세자르(César), 장 팅겔리(Jean Tinguely) 그리고 레이몽 앵즈(Raymond Hains)등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주도된다. 누보레알리스트(Nouveau Réalistes)로 알려진 그들은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의 이론적 지원에 힘입어 오브제를 표현매제로 수용함으로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를 근거로 대량생산과 소비의 전후 산업사화의 현실을 둘러싼 제 문제에 심취해 있었으며 현실에서 멀어진 미술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리기를 원했다.

한편, 새로운 시각탐구를 내세우면서 발족한 그룹 그라브(G.R.A.V)는 예술작품의 개념을 확대시킨 또 하나의 전위 단체였다. 르 파크(Julio Le Parc), 스테인(Joel Stein), 모를레(François Morellet) 그리고 바자렐리의 아들인 이바랄(Jean-Pierre Yvaral)등을 중심으로 결속된 이 그룹은 유리, 합성수지, 철판, 네온, 모터등의 새로운 재료들과 스크린에 투사된 레이저 광선의 이미지등을 작품에 사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였다.

오브제와 새로운 형상을 기조로한 이들 전위 세력의 실험실은 전쟁 중 또는 전쟁직후에 생겨난 신생 살롱들인 <살롱 드 메(Salon de Mai, 1943)>, <살롱 드 라 죤 뼁트르(Salon de la Jeune Peintre, 1949)>와 <살롱 꽁빠레죵(Salon Comparaison, 1959)> 그리고 당시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에 의해 출범된 <파리비엔날레(Biennale de Paris, 1959)> 였다. 이들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대담한 전위적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며 끝없는 스캔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파리의 화단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 파리에 거주하던 한인 미술가들이 선택한 길은 당시 화단의 실험적 조형방식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국내 화단의 경우는 파리를 휩쓸던 전위적 미술운동과 연결되면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가령 추상미술을 벗어나는 다양한 실험적 양상을 제시한 단체들로서 무동인, 오리진, 신전동인 등은 청년작가연립전이라는 제하의 합동전을 치루었는데 출품 작가들은 기성 오브제를 사용하면서 뉴욕의 네오다다와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즘에 연계하는 한편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산업화에 대한 문명비판적 시각을 드러내었다. 청년작가연립전의 집단적 움직임은 그후 아방가르드협회(AG)가 결성되면서 더욱 체계적인 전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조형적 질서의 모색을 창립 취지로 내세운 AG그룹은 흙, 모래 등의 자연오브제와 바람 등의 비물질적 요소들을 작품에 도입하였으나 지나치게 사변적인 방향으로 흐르면서 예술을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1960-1970년대의 전위그룹들이 실행한 형식과 매체상의 실험은 모더니즘 미술의 순수성을 고수하며 소화해 나가려는 일련의 움직임이었으며 미술의 본성과 그 미학적 성찰을 한단계 끌어 올리는데 기여했다. AG그룹에 이어 1970년대에 나타난 전위집단으로서 ST와 1980년대의 난지도, 메타복스, 타라 등의 전위미술단체는 미술의 형식과 매체를 인식하고 실험하는데 집중하면서 프랑스의 쉬포르-쉬르파스 운동에 비교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유성을 위한 실험과 모색의 시대

1970년대의 파리 한인작가들은 제경향의 추상미술에 여전히 그들의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68년에 도불해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대학(파리1대학)에서 수학했고 1978년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병관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이휘세, 양승권, 오천룡, 김순기, 김희경, 김인중, 이봉렬, 강정완, 오경환, 권영우, 하인두등이 개인전 또는 그룹전등을 통해 대부분 추상경향의 작품을 제작하며 전시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성완경도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1970년대에 들어와 앵포르멜 경향의 반추상회화는 단색평면주의로 명명된 모노크롬 페인팅의 순수 추상회화로 바톤을 넘기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미니멀리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박서보를 비롯한 일련의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이러한 경향을 한국적 미니멀리즘 혹은 한국적인 모더니즘으로 규정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찾기를 위한 미술의 전형으로 제시하였다.

1970년대 한국미술에 대해 비평할 때 예외 없이 거론되는 부분이 독자성에 관한 진단이다. 특히 외래사조의 수용과정에서 야기되는 창조와 모방에 대한 시비로 그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른바 전후 한국예술가들에 나타난 서구의 미학과 형식의 수용 그리고 ‘전위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졌던 모방이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디자인등 미술전반에 나타난 문제점들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불행스럽게도 한국에서의 모더니즘 미술은 다양성을 상실하고 단색 평면주의라는 추상적 미술의 경향으로 획일화 되는 측면이 있다. 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집단적 운동에 의해 하나의 양식이 결정되는 시대였던 만큼 개인적 차원의 다양한 매체와 실험적 양식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새로운 표현방식과 매체가 국내 화단에 새로운 정신을 자극하는 도구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외래 사조에 대한 맹목적 수용, 아니면 이에 대한 엘리트 중심의 논리적 대응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은 어느 경우이건 외래 양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급증한 한국의 유학생 : 1980년대

1980년대는 한국의 유학생과 미술가들이 급격한 증가를 보였던 시기였다. 이는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자,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문화행사를 통한 외교를 강화시켜 국제 경쟁시대에 부합하려는 시국정세의 분위기에 따른 것이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나온 학생들은 파리국립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 de Paris)”와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Paris)”로 모여들었다. 또한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와 “아틀리에 17(Atelier 17)”등은 정규과정이 아닌 입학 시기에 제한이 없는 작업실들이었다.

화가수업을 받는 학생의 수가 많아지면서 얻게 된 이 시기의 성과는 최초의 미술인 그룹으로서 1984년 <파리청년작가회>가 결성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주로 파리의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매년 정기전을 통해 그들의 예술세계를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창립 이래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을 보면 권영호, 안종대, 조택호, 백진, 변창건, 홍승혜, 차명혜, 조용신, 장경염, 정충일, 김중식, 김남용, 김선태, 이용순, 박승순, 윤봉환 등이 있다. 1980년대 이들의 작품 경향은 일관된 하나의 형식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캔버스회화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파리 청년작가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도 한인미술가들의 집단적 전시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묵, 김창열, 정상화, 남관, 김종하, 이항성 등이 참여했던 <한국 재불작가전>에 대한 구설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비정기적인 전시활동과 집단적 결속력의 미비로 인해 그 존재의의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었고 1982년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편 진유영과 백수남 등은 그룹이나 집단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작품제작을 하면서 현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살펴볼 때 재불 한인작가들의 특수성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회화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조각이나 판화를 정식으로 연구한 작가들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는 우선 작품제작 공간과 시설 그리고 경제적 뒷바침이 따라야 되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각은 대부분이 이태리로 그리고 판화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오랫동안의 국내 분위기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판화공방이나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파리장식미술학교에 조각과와 판화과가 설치되 있기는 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1973년에 도불해서 장식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정보원과 1983년에 도불해서 5년간 파리에 체류하면서 동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곽남신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새로운 형상주의 미술의 확산

시선을 다시 국내화단으로 돌려보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화단은 민중미술로 대변되는 현실 참여적 미술이 미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이루며 확산되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대를 반영하는 미술운동은 1960년대에서부터 이미 다양한 그룹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무(Zero)동인(1962), 신전동인(1965), 제4집단(1970) 등의 전위그룹은 전후 국토재건사업에 따른 급속한 산업화를 겪고 있던 1960년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1969년 김지하 시인이 발표한 <현실동인선언>은 현실주의 미술을 민중미술운동으로 연결하는 대표적인 지침서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에 본격화된 민중미술은 이전의 미술이 지향했던 의식이나 방법과는 차별화 되는 미술적 방법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의식적인 측면에서 민중미술은 이전세대의 지식인 미술가들에 의한 엘리트적 사관에서 벗어나 대중적 미술을 지향하는 태도를 내세웠다. 따라서 민중미술은 전통미술과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키는 한편 개념적 사변의 유희에 의해 단절되었던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한편으로 민중미술은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으로 시작된 사회진보운동의 미술적 지원양태를 띠고 전국적으로 세력을 퍼트려 나갔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민중미술은 걸개그림, 벽화, 판화 등의 기법을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현실과 발언, 임술년 동인, 두렁, 시대정신 등의 소그룹들은 민중미술의 형성과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면서 단순한 민중의 차원을 넘어선 민족문화운동으로 정착되어 나갔다. 한편 1981년에 개관된 서울미술관은 민중미술 1세대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 민중미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우파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편견에 의해 왜곡 또는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치적 선전선동의 도구로서의 미술이라는 비판은 부정적 의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몰아갔다. 이 대목에서 민중미술을 한국미술사의 문맥에서 평가할 새로운 잣대를 넘어 국제 화단의 흐름에 대응할 주체적 논리가 요구되었다.

아직도 본격화되지 않은 논의이지만 당시 민중미술은 국제적으로 전개되던 신형상주의 미술과 밀접한 상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이른바 프랑스의 자유구상, 이태리의 트랜스아방가르드, 독일의 신표현주의, 미국의 배드페인팅 등은 모더니즘이 내세우는 형식주의와 뒤를 잇는 개념주의 미술에서 벗어나 손의 회복과 회화예술의 복권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에 시작한 신형상미술(Nouvelle Figuration)에서 1980년대에 부활한 자유구상(Figuration Libre)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신형상주의 미술과 한국의 현실참여적 미술운동을 비교해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민중미술이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하락하고 말았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국제화된 새로운 양식으로서 이미지 회복을 통한 건강한 표현의욕의 과정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이러한 작업을 필요하다.



국제화단에 자리잡은 한국미술

1990년대는 파리로 건너와 현지 미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한인 청년작가들이 현지화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시기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재불작가 전체수에 비해서는 아직도 미미한 숫자이지만 예전에 비해 현지의 화랑과 전속 내지는 부분적인 계약과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이는 초기의 파리체류기간의 문화적 갈등의 단계를 벗어나 고유한 삶과 예술의 틀을 지니기 시작한 세대라는 점에서 당연한 추세로 보인다. 생각나는 데로 적어본다면 최현수가 발렉스(Elisabeth Valleix), 유선태가 라비니으-바스티유(Lavigne-Bastille), 황호섭이 푸르니에(Jean Founier), 안종대가 도르프만(Patricia Dorfmann), 조택호가 레스코(Pierre Lescot) 등 파리의 의욕적인 화랑들과 전속계약을 맺었으며, 그리고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뒤늦게 도착한 고병진이 카지니(Philippe Casini)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고 전시활동을 벌이게 된다.

1990년대에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파리 거주 한인작가들의 집단적 작업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유학생을 포함한 파리거주 한인작가들이 어려움은 독립된 작업공간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와 근교에 거주하고 있는 일련의 화가들이 집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게 되었고 1992년에 이르러서 이들의 꿈은 실현되었다. 파리의 남서쪽 세느강변에 위치한 길이 150미터에 폭 33미터 그리고 높이가 12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골구조물을 장기임대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에 탱크 등의 대형 병기 수리를 위해 사용되었던 공간을 50개로 분할해 개인 아틀리에로 내부변경을 함으로서 새로운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집단의 이름은 “아르스날(ARTsenal)”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소나무”라 알려진 단체에서 운영했는데 한국 작가에게 배당된 공간은 전체 인원의 반수인 25명 안팎이었다. 앞서 언급한 파리청년작가들 중 몇몇을 포함해 권순철, 정재규, 장승택, 곽수영, 김성태, 최예희, 이영배, 김형기, 홍순명, 김선태, 박승순, 백진, 변창건, 조용신 등이 회원으로 있고 이들은 비디오, 설치 등의 조형방법과 재료사용에 있어 사진, 밀납, 유리, 합성수지등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적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소나무 그룹은 특정의 이념을 내세우기 위해 결속된 단체라기보다 제작공간의 획득을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소나무 그룹은 임대기간이 만료되어 새로운 시설을 찾아나서는 2002년 까지 과반수에 해당하는 동료 외국인 작가들과 공동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전시도록을 발간하는 등 나름의 밀도 있는 집단적 활동을 통해 한불의 문화교류에도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현지 체류작가들의 활동범위가 이전에 비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한인작가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국적으로 작업실을 정해 일정기간 동안 주로 뉴욕과 파리 그리고 한국을 왕래하면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중 최현수와 황호섭 그리고 안성금등은 이우환, 백남준, 김창렬등의 선배들 뒤를 이어 국제적으로 그 활동영역을 확산시켰다. 특히 최현수는 파리뿐만 아니라 뉴욕의 팀 엔와이이(Tim NYE) 갤러리에서도 전속으로 후원을 받았으며, 1986년 이래 파리에 주로 정착해 활동하고 있는 안성금은 1988년 베를린의 카를로스 훌쉬(Carlos Hulsch)화랑을 통해 유럽화단에 선보인 뒤 스페인, 이태리와 일본 그리고 한국등에 단기적으로 체제하면서 부지런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화가들은 프랑스 현지의 평론가들과 화상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언론에 보도되는 사례도 점차 늘게 되었다. 미술시장의 차원에서도 이전과 다른 교류가 진행되었는데 1996년 피악(FIAC)이 주최한 <한국의 해>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피악 운영위원회는 매년 한 나라를 초대국으로 정해 집중적으로 그 나라 작가들을 소개해 왔는데 이 해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초로 한국이 선정된 것이다. 이 행사를 계기로 국내 15개의 화랑이 집단으로 초대되었으며 이를 통해 35명의 한국 작가들이 파리의 미술시장에 소개되었다. 이 시기 이후에 국제미술시장 참가를 위한 정부기금이 마련되었고 한국화랑들의 해외시장 진출이 본격화 되는 현상을 맞게 된다.
공식 체널을 통한 문화교류의 전개

새천년의 시대에 들어서서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교류는 국가적 차원의 것으로 점차 공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파리외곽에 자리 잡았던 집단적 작업공간인 아르스날이 폐쇄되면서 파리시는 대안적 공간을 건설하게 되었고 2002년 소나무 그룹의 일부 회원들은 이시레 물리노(Issy-les-moulinaux)시가 새로 건설한 창작공간인 아르쉬(Arche)로 입주했다. 아르쉬는 전철 교각의 아치를 이용해 10여개의 독립된 반원형 모양의 목조건물을 만들어 놓은 작업실인데 이전의 아르스날에 비해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문화교류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곳에 입주한 화가는 모두 27명이며 그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9명이 한국 작가들에게 배당 되었다. 입주 작가들의 명단을 보면 박동일, 권순철, 곽수영, 정재규, 유혜숙, 손석, 이영배, 이민호, 윤영화 등이 있고, 류이섭, 전광옥, 이수영 등이 합류하여 작업하고 있다.

2004년에는 파리 국립주드폼 미술관(Galerie nationale Jeu de Paume)에서 한국 작가를 위한 대규모의 초대전을 갖게 되면서 진정한 교류 차원의 이벤트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1965년 파리에 건너온 후 프랑스에서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김창열 초대전이 그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초대된 이우환의 1997년 전시를 정점으로 프랑스 현지 미술관에서의 전시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김창열의 초대전시는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정점이 되었다. 이제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교류는 다양한 체널을 통해 정상화되는 단계에 와 있으며 양국의 문화적 외교관계에 대한 지원이나 민간 차원의 교류에 대한 인식도 이전과 달라지게 되었다.

2006년은 한국과 프랑스가 한불우호통상조약 체결로 수교한지 120주년 되는 해로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양국의 수도 및 주요 지방도시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 한국에 설치된 프랑스 극동연구소 주관으로 개최될 ‘서울의 기억(1886-1905)’전은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첫 두 외교관이었던 콜랭 드 플랑시와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이 모은 사진과 기록들을 선보이게 되었다. 고종황제 통치 말기의 한국을 되돌아 보게 될 이 전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120년 전의 상황을 비추어 줄 것이다. <한불수호조약>의 체결과 그 전후한 프랑스 군함에 의한 규장각 고문서의 해외 반출, 그리고 이후 새롭게 전개어온 한국과 프랑스간 교류의 역사가 새롭게 정리될 것이다.



맺는 말

한국의 문화사는 자생적 양식과 외래양식 사이의 끊임없는 대립과 조화의 역사로 규정된다. 조선시대 까지는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문화적 양식들이 정립되어 왔고, 개항 이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그 대상이 구미지역 국가들로 바뀌었을 뿐 문화 형성의 메카니즘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더 따지고 보면 역사 속에서 자생이니 외래니 하는 개념은 그 의미나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 또한 허상을 좇는 일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개인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일은 외부의 것을 받아드리고 자기화 하는 과정이고 보면 집단이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것도 언제나 타자의 수용과 자기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이렇게 자명한 논리가 한국 근대사에서 특별한 쟁점이 되는 이유는 서세동점의 역사로 규정되는 근대화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접촉은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맺어진 관계는 방법이나 규모 면에서 볼 때 진정한 상호교류의 역사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서구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 각축전이 고조되던 19세기 말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실행된 문화적 전파는 대등한 상호적 관계가 아닌 일방향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일제하나 정부수립 이후에도 다르지 않다. 유준상의 지적처럼 1980년대 이전까지 한불미술교류는 일종의 짝사랑 같은 것이었으며 한국예술은 미지세계를 동경하는 소년기의 환각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립과 자가당착의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세계문화의 구성단위로 동참하시 시작한 것은 경계의 의미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세계의 미술지형도가 재편되는 1980년대부터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국제올림픽>을 계기로 한 각국과의 문화적 접촉은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문화적 교류는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양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에 설정되어 있는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동질성을 찾는 일은 내용의 인식에 있지 않고 내용을 인식하는 형식에 있다. 타자성을 깨닫는 것이 곧 교류의 근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까지 모방 혹은 동일화의 과정으로 여겨온 문화적 교류의 타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경계를 파기하는 일은 문화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서 그 벽을 무화시키는 일이다.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 그것이 교류의 근간이 되는 사연은 여기에 있다.




※ 이 글은 금년 10월 파리의 ‘몽파르나스 미술관’에서 열리는 한인작가전을 계기로 프랑스 현지에서 춣간되는 단행본을 위한 것이며 본인의 졸고 <재불 한인미술가 약사>의 내용을 토대로 완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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