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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기술 _ 정년퇴임식 특별강연

김영호




소통의 기술 _ 정년퇴임식 특별강연


김영호 | 중앙대 교수,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I. “내 말에 속지 마라”

큰 스님 성철스님(1912-1993)이 생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 그 너머의 속뜻인 진리(참된 이치)를 보라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진리는 결코 언어로 대신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미술사가로서 미술평론가로서 전시기획자로서 28년간의 교직 생활 마감을 앞둔 오늘 내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언어가 지닌 오묘함에 관한 것입니다. 말과 글과 몸짓 그리고 그림이 모두 의미를 품은 소통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진리를 표현할 수 없으니 우리는 소통의 한계를 안고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의도나 사상이나 메시지를 주고받습니다. 그 언어로 나누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이 생기고 행복뿐만 아니라 불행을 느끼기도 합니다. 

성철스님이 하신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씀은 건강한 소통의 행보를 위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특정 지위나 직업의 ‘고깔을 쓴’ 남의 말에 의지하지 말고 나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관점을 달리하면 언어의 한계에 속지 말고 그 참된 이치 즉, 진리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건강한 소통의 행보에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격언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소통의 순간 순간에 주어진 상황과 조건 그리고 지나온 당사자들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좋을 것입니다. 

일체유심조의 사상은 일상적 삶의 차원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비평할 경우에도 유효할 것입니다. 작품의 해석에도 정해진 본질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감상자의 주관적 견해가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허용하는 소통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II.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언어가 지닌 불가피한 한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꾸준히 지적되어 왔습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는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의 첫 문장과 둘째 문장으로 등장한 “道可道非常道”나 “名可名非常名”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명증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 문장들은 우주의 운행 원리 나아가 인간의 도덕원리를 밝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돌을 돌이라 규정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돌이 아니다”, “돌을 돌이라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돌의 이름이 아니다”. 

이 두 문장을 통틀어 좀 더 해설하면 이렇게 됩니다. 돌이라는 존재나 이름은 편의적인 언어의 약속일 뿐 돌 자체의 속성이나 특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늘 그러한 도(상도)’나 ‘늘 그러한 이름(상명)’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 되겠지요. 상도나 상명이란 본시 주어진 본질이 없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존재 상태를 말합니다. 항상하는 돌의 속성은 주변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돌은 먼지로 변하고 다시 원자로 돌아가며 이후에 다른 존재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존재와 이름은 주어진 우주의 운행 원리이자 인간의 도덕원리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자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고 있는 자크 라캉(1901-1981) 역시 언어의 불확실성과 한계에 대해 연구하고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상징계”란 언어에 의해 특징 지어지는 세계일 뿐이며 문화와 문명 이 모든 것들이 언어로 구성된 상징적 세계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III. “반야심경에 길을 묻다”

나는 2018년 4월 9일자 중대신문의 <이 교수의 스크랩북>에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반야심경’에 길을 묻다」라는 제명으로 글 한 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핵심 키워드는 공(空)입니다. 공이라는 말은 서양철학이 말하는 허무와는 달리 충만한 비어있음을 뜻합니다. 공은 존재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는 지표와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성철 스님의 “내 말에 속지 마라”와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상한 오묘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생각은 2016년 모스크바 국립동양미술관 전시관에서 열린 기획전 <모스크바 한국현대미술전-니르바나>와 2021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현대불교미술전-공>의 주제가 되기도 했으니 오랫동안 일관되게 공부했던 화두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에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을 오늘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대학시절 나의 인생 세계관에 영향을 끼친 한권의 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반야심경을 내놓는다. 우리가 공부하는 반야심경은 손오공을 거느렸다는 당나라 삼장법사가 천축국(인도)에 유학하며 범어 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가요와 팝송으로 대변되는 통제와 금기의 1970년대, 반야심경은 부조리한 세상을 읽는 나의 나침반이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제목 10자를 더하면 270자로 쓰여진 반야심경은 이 첫 구절에 중심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번역하면 이렇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이 대목에서 핵심어는 바로 ‘오온이 공하다’는 것이다. 오온이란 물질계와 의식계를 구성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 색(물질)을 포함해 수(느낌), 상(연상), 행(반응), 식(분별)의 다섯으로 구분되는데 이 모든 것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 할 때 우리는 대개 ‘없음’을 떠올린다. 그러나 공은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서 무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있음을 전제로 한 없음이며 채워있음을 전제로 한 ‘비어있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연기론적 가르침이다. 

공의 철학은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으로 정합하다. 사유하는 나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정해진 실체가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며 내일의 나 또한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교수이고, 집에서는 아버지이며, 병원에서는 환자이고, 기차에서는 승객으로 불리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근대가 종식을 고한 이후 존재의 본성을 파악하는 핵심적 길잡이가 된다.  

반야심경은 오온이 공함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온이 공함을 안다는 것은 세상사 모두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규범과 관습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많고 적음, 차고 따뜻함, 사랑과 미움, 행복과 불행의 본성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맥락과 상황의 소산이자 오직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정신을 차려 깨닫는 것이다.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했다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미래를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식사회는 갈피가 없는 상황이다. 제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출현이 아닌 마음의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의 알고리즘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있음을 전제로 한 없음의 세계, 채워있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불가사이한 세계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연기론’에 기반한 반야심경의 공 철학이 ‘관계의 시대’를 통찰하는 나침반으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1차 게재 정년퇴임식 특별강연. 20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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