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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화 / 무욕의 삶과 화혼(畵魂)

김영호




김택화 / 무욕의 삶과 화혼(畵魂)       



김영호 | 미술사가 중앙대교수 




김택화는 제주의 아들로 살다 가셨다. 그가 자신의 분신처럼 남긴 작품들에는 제주의 풍광과 더불어 그에 대응하며 피워낸 작가의 인생관이 오롯히 배어있다. 그의 화폭에 그려진 오름과 포구와 초가 그리고 올래길과 돌담과 팽나무는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선과 색으로 표현된 상징적 실체로 다가온다. 그의 그림에는 거친 바람과 강렬한 빛에 순응하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강인한 삶이 자리잡고 있다. 전업 화가로서 겪은 무욕의 삶과 화혼이 그의 작품에 배어 날것처럼 숨 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상 풍경으로 전치된 오름과 포구와 초가 그리고 올래길과 돌담과 팽나무는 어느덧 제주를 대표하는 도상으로 정착되었다. 제주의 자연과 풍토는 개발의 미명과 더불어 사라지고 있으나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아쉽고도 고마운 일이다.
 
김택화는 섬에서 나고 자라 육지를 꿈꾸며 성장해 홍익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화가로서 재능이 인정되어 재학 중이던 1962년 제11회 국전에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이듬해에는 청년 작가들의 모임인 오리진(ORIGIN)을 결성하며 권영우,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등과 함께 추상화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청년 김택화가 걸어온 삶의 노정에는 격변기의 예술에 대한 진취적 도전과 원형을 향한 회귀적 세계관이 상존하며 머물고 있었다. 1964년 홍익대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그가 제주의 풍광에 사로잡혀 화가로서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을 때 두 개의 자의식이 하나로 수렴되며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어선 조형 어법으로 제주의 풍광과 그 흔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김택화, NO.7, 캔버스에 유채, 1962, 11회 국전 특선작



김택화가 화가의 등용문인 국전에 특선을 받은 <NO.7>은 앵포르멜 경향의 색면 추상 작품이다. 화면 전체가 흑갈색의 평면으로 덮혀 있고 그 표면에 몇 개의 날카로운 선들이 미완의 구조를 이루며 돋을새김으로 그어져 있다. 이 작품은 1960년을 전후해 번지고 있던 한국의 전위적 청년 세대의 실험적 미술 경향을 대변한다. 구체적으로는 그의 선배들이었던 박서보를 비롯해 윤명로와 하종현 등이 주도하던 어두운 색조와 두터운 질감의 앵포르멜 계보 속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김택화의 남긴 <NO.7>에서 제주의 정지(부엌) 벽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솔잎과 장작이 타는 아궁이의 열기와 연기로 숙성된 토벽의 친근한 이미지다. 이 경우 그의 작품은 추상인 동시에 구상의 범주에서 다루어질 가능성이 주어진다. 이 시절 그가 즐겨 택했던 주제는 ‘말발굽에 박는 징과 마차’였다는 미술평론가 김원민의 회상은 이러한 추론에 무게를 실어준다.

제주로 낙향을 결심한 1965년 이후 김택화의 예술 노정은 크게 굴절된다. 서울에서 번지던 한국 추상미술의 파고에 대한 체험은 제주의 대자연과 일본 유학파 제주 미술인들의 영향 속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제주는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되어 화단 형성을 위한 제도적 정비단계에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제주 출신 화가들로서 김인지, 홍정표, 홍완표, 조영호, 박태준, 장희옥 등의 주도아래 정기전과 학생미술전 그리고 공모전 등의 미술행사를 통해 새로운 미술문화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기에 제주도로 피난 내려온 홍종명, 장리석, 최영림, 김창렬, 이중섭, 최덕휴, 이대원, 구대일, 옥파일 등이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피난민 화가들 대개는 격변의 현실을 외면한 채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경향에 머물러 있었다. 1972년에는 제주대학교에 미술교육과가 처음으로 신설되며 공교육을 통한 미술인 양성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격변하는 도내의 환경에서 대학을 중퇴한 김택화가 선택할 수 있었던 노정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무욕의 삶이라 부를 수 있는 중도의 길이 주어져 있었다. 그는 1977년에 태동한 현대미술 그룹인 <관점>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40년 일제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해방공간과 4·3 그리고 전쟁과 국토재건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세월을 살았던 그에게 주어진 화가로서의 소명은 육지에서 성장한 청년들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오현중학교 야간부를 다녔고 피난민 화가인 홍종명에게 그림을 처음 배웠으며 상경 후에도 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니며 우편 배달로 생계를 이어갔던 그에게 엘리트 중심의 개념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의 창작 원리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김택화가 잠시 귀향해 머물면서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된 제주의 풍광과 자연은 서울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그에게 운명적인 실체였다. 김택화가 제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주가 그를 끌어안았다고 할까. 그는 회고를 통해 제주 풍광을 그리지 않으면 안될 소명감이 그에제 주어져 있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1980년대가 지나는 동안 제주 풍광을 담아내는 그의 작업은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연을 대하며 느껴진 순간의 인상을 거친 필치로 담아내는 방법이 그러하고 자연의 빛을 화려한 색으로 변주해 머물게 하는 의도가 그러하였다. 이 시절 그가 그린 풍경에서 마네와 모네의 필치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선을 국내 화단으로 돌려보면 김택화는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 고희동이 택했던 아카데미 경향을 가미한 인상파 회화의 길을 따랐다. 한편으로 1960년대를 풍미했던 국전의 대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야수파나 표현주의 경향도 이미 숙지해 있었음을 이 시기에 제작한 정물화와 풍경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심상으로 걸러낸 풍물을 화폭에 옮겨내며 그는 1975년 귀향한 변시지와 더불어 제주의 풍경을 가장 제주답게 그리는 화가의 한사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는 초가와 포구가 주를 이루며 바다에 떠 있는 섬과 오름과 한라산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개발의 미명 아래 아파트와 테마파크가 들어서고 해안도로가 새로 뚫리면서 제주의 원형적 모습을 잃어가는 시절, 작가는 섬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천 점의 스케치와 유화를 제작해 남겼다. 사라져가는 제주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열망은 격자무늬로 장식된 초가지붕과 여인네 가슴과 같은 눌(추수한 곡식을 쌓아둔 둥근 낫가리) 그리고 담벼락에 물허벅(물항아리)을 얹혀 놓는 물팡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영겁의 역사를 지키며 초가 옆에 서있는 팽나무와 올래길 아래 펼쳐진 포구에 떠있는 자릿배, 오월이면 한라산을 배경으로 검은 돌담과 대조를 이루며 펼쳐진 진노란 유채도 있다. 그가 펼쳐놓은 제주 고유의 풍광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지만 태고의 화석처럼 그림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김택화, 신흥리, 캔버스에 유채, 1997



 

김택화, 산방산, 캔버스에 유채, 2005



김택화가 제주의 풍광을 담아내는 조형 방식은 평이함 속에서도 독자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 형식의 독자성은 그의 그림에 재현된 제주 풍광의 전형적 특성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한 예로 그의 붓터치는 원경과 근경의 차이를 두지 않고 균일하게 배치되어 전면회화의 속성을 지닌다. 캔버스 상단의 구름 무리나 원경에 자리잡은 산골짜기의 수목들 그리고 근경의 유채꽃 따위를 표현하는 터치들 모두가 무심한 크기로 처리되어 있다. 이는 대상을 묘사하려는 의도를 넘어 대상의 물성적 리얼리티 자체를 표상하려는 의지의 결과라 할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구애받지 않는 원근과 명암의 처리 방식은 그의 드로잉 작업에서 특히 백미를 이루고 있다. 연필 드로잉 뿐만 아니라 콘테나 붓으로 그려낸 스케치는 대상을 바라보는 김택화의 독자적인 관점과 조형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김택화, (제목없음), 캔버스에 유채, 1999



2000년대에 들어와 그의 그림은 상상 풍경으로 바뀌게 된다. 그가 선택한 프레임도 정방형을 선호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보고 그릴 것이 없다. 기억에 의존하자니 내 기억의 프레임은 정사각에 가깝다”는 그의 회고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 말의 의미는 그가 화폭으로 담아내야 할 제주의 원형적 세계가 사라졌음을 토로하는 말이자 암으로 투병하며 병상에서 작업해야 하는 처지를 토로한 것이기도 하다. 기억의 풍경으로 전환된 이 시기의 초가들은 화면의 구성과 배열의 리듬에 맞추어 그려지고 있으며 시점도 다변화 되면서 점차 비구상적 패턴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로서 그의 노정이 이상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2006년 여름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2019년 겨울 그가 남긴 작품들이 한곳에 모여 김택화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미술관 건물과 열악한 전시실 그리고 컬랙션을 보며 제주의 미술인과 도민 그리고 행정가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무용의 삶과 화혼이 일구어 낸 제주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라는 생각이다. 

1차 게재 김택화미술관학술세미나 발제문, 2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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