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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 (전시감독, 중앙대교수)

I. 개관 

청년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1920년을 기점으로 삼는다면 서구의 근대 구상조각이 교육기관을 통해 한국인에게 유입된 지 어느덧 100년을 앞두고 있다.1) 한국의 근대조각은 일제 식민통치라는 비운의 공간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 근대 구상조각이 주체적 예술 장르로 정착하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은 참으로 고난한 것이었다. 해방과 군정, 분단과 전쟁 그리고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점철된 시대적 상황은 미술계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예술이 시대의 아들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한국의 근현대조각사에는 한국인들이 걸어온 근현대기의 시련과 극복, 희망과 좌절, 도전과 성취의 인간사가 오롯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주최한 개관기념 기획전은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을 염두에 두고 마련된 것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이라는 전시 제명이 지시하고 있듯이 이번 기획전의 시간적 범주는 100년을 아우르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구상조각 작품들은 동상의 경우 공출로 파괴되거나 전쟁 중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또한 다행히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소장처의 사정으로 대여가 어려워 실물을 한 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근대조각 분야의 작품들은 영상물로 대체하여 <프롤로그>라는 형식으로 소개했다. 현대조각 분야의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는데 <1부: 현대조각의 시원-비구상(추상)>, <2부: 오브제·설치>, <3부: 신형상>으로 나누었다. 세 개의 섹션에는 모두 62명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프롤로그>에 소개된 9명의 작가들을 포함하면 총 71명의 작가들이 만든 작품 76점이 소개되고 있다.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의 계보를 정립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것을 기술하는 방법이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한다면 문제 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역사적 사실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유기적인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고 다양한 해석의 방식은 역사의 눈을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복진을 위시해 대부분이 일본 유학생이던 1세대 조각가들은 인체에 기반을 둔 서구 구상조각의 조형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근대조각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분단 그리고 전쟁의 상황을 겪으며 등장한 한국 근현대조각 2세대 작가들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구상조각의 형식을 점차 극복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이르면 비구상(추상) 조각의 형식을 수용하며 객관적 재현을 넘어 새로운 조형성에 격정의 시대와 실존적 자의식을 담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실험과 모색을 위한 다양한 조형방식들이 등장하고 국가간 문화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급기야 한국조각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성취는 서구미술에 대한 검증과 반성을 거치며 이룩한 ‘오브제·설치’와 ‘신형상’ 분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조각의 계보를 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걸어온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접하고 숨결을 느끼고 주체적 역사인식으로 당면한 삶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일이 계보학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1970년대 전반의 글과 대담에서 계보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계보학이란 “투쟁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수립하고 그 지식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게 해주는 넓은 지식과 세부적인 기억의 결합”으로 보았다.2) 푸코의 계보학은 시대에 대응하는 예술의 가치를 진단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고 예술작품이 시대상을 담아내는 저장고라면 근현대조각사 100년의 노정에 투영된 삶의 모습과 숨결을 주체적 역사인식으로 정리하는 계보학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기 않을 것이다.     

II. 프롤로그 : 근대조각의 도입

1920년대를 한국 근대조각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들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한 김복진 등이 로댕을 위시한 서구 근대 구상조각의 기법과 형식을 배우고 ‘조각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1925년부터 조각부가 설치되어 전문성을 띤 근대적 의미의 조각가들의 활동무대가 생겨났다는 사실이다.3) 이구열은 “김복진이 수입한 서양식 조각이란 소조(塑彫)에 국한되고 있으나 사실상 조각이 새로운 미술로서 작가의식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근대조각의 의미를 ‘작가의식을 지닌 조각가’에서 찾고 있다. 현존하는 실물 작품의 수가 거의 없는데다 39세로 요절한 김복진이 한국 근대조각의 선각자로 알려지게 된 사연은 이경성을 비롯하여 윤범모와 최열 등 몇몇 이론가들의 연구 성과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4) 

도입기의 서양화와 조각분야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미술인들은 거의 동경미술학교 출신이었다. 서양화 분야의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이종우, 조각 분야의 김복진,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등이다.5) 동경미술학교는 명치유신 후기의 신정부가 근대화를 표방하며 1885년 설립한 5년제 미술전문학교로 자연 대상의 사실적인 형태묘사에 기초한 엄격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당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교수진으로 활동하던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다데하타 다이무(建畠大夢),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와 같은 이들은 모두 서구의 기법을 가미하여 사실성을 추구한 당대 일본 조각계의 거장들이었다.6) 김복진은 이들에게 조각을 배웠으며 1924년 대학 4학년에 제작해 제국미술원전람회(이하 제전)에 입선한 <여인입상>은 로댕의 <이브>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7) 김복진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특성으로서 인간의 감정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성은 고전주의 조각의 엄격한 조형세계에 로댕으로부터 얻은 표현적 양식이 더해지며 얻은 성취로 보인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1922년 문을 연 조선총독부 주관의 선전을 통해 작가로 데뷔하며 점차 화단의 주축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근대조각의 형성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관전의 역할이다. 선전은 관 주도의 조형방식과 이념을 요구하며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8)로 기능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사관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대두되게 된다. 김복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진보성향의 문예운동을 이끈 선각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작품들이 당대 관전이 옹호했던 서구 아카데미즘의 그늘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적 감성과 생명의 기운을 드러내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소년입상>은 1940년 제19회 선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은 작품이지만 그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나타낸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고대 이집트의 웅휘한 인물조각을 연상시키는 고졸하면서도 패기에 찬 작품으로 예리한 사실을 넘어 깊은 주관의 세계로 이행되는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와 더불어 위에 언급한 <여인입상>(1924)을 비롯해, 1925년 선전에 출품해 입선한 자각상 <3년전>과 <나체습작>, 그리고 이듬해 선전에서 특선에 오른 <여인>(1926)은 김복진의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선전에 조각부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제4회인 1925년 이었다. 당시 김복진의 작품 두 점과 함께 전봉래의 나체여인 전신좌상 작품 <발(髮)>이 입선했고, 이후 1930년의 9회까지 2회 이상 입선한 조각가는 김복진, 양희문, 안규응, 장기남, 문석오, 임순무 등이 있다. 김복진이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 투옥된 이후 침체기를 거쳤지만 1935년 복귀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전 출품 조각가들의 수가 늘어났다. 1931년의 10회전에서 1944년의 23회전 사이에 활동한 조각가들은 김경승, 이국전, 윤효중, 조규봉, 홍순경, 이병상, 김두일, 윤승욱, 박광조, 염태진 등이 있으며 앞의 네 사람은 특선에 올랐다. 그 중 이국전 윤효중 등은 김복진의 제자였다. 

한편, 한국 근대조각의 역사에서 동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20년부터 국내에서 동상이 제작된 기록들이 조사되고 있는데 그 중 국내에 설치된 최초의 한국인 동상으로 알려진 것은 1927년 건립된 휘문학교의 <민영휘 동상>이다. 청동입상으로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것인데 1943년 공출되어 사라졌다. 이전에도 건립된 동상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일본인과외국인이었다.9) 1930년대가 되면 동상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학교설립 등 육영사업에 대한 보답으로 전국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은정의 표현을 빌자면 ‘동상의 시대’였다. 국내에서 동상 건립이 성황을 이루게 되는 배경은 일본 본토의 동상제작 붐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1937년 전시체제로 들어선 이후 현저히 줄어들었고 급기야 1943년 금속공출 명령으로 동상들은 침략전쟁을 위한 ‘출정’ 혹은 ‘응소’의 미명아래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1935년 <최송설당 상>을 시작으로 동상조각에 손을 대었던 김복진은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후 조선의 천지에 유명무명씨의 동상이 근래로 부쩍 늘었지만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 몇 개나 있을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다. (...) 균제가 있고 양감을 가진 예술적 작품다운 것이 몇이나 될 것인가. 구리 속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조각하는 사람의 영분일 것이니 이 생명의 창조를 하지 못하면 조각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한국 근대조각의 시원은 이렇듯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통해 서구의 고전주의 경향이 가미된 근대적 인체조각의 기법을 받아드리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관전을 통해 전문가로서 조각가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실천으로서 동상 제작은 근대적 직업으로 조각에 대한 인식을 고무시키는데 일조했다. 한국의 근대조각의 역사는 식민통치의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적 조건들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의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서구조각의 간접적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들은 이미 자신의 특수한 처지에 부응하는 한편 조형적 심화와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선전 조각분야의 초기에는 두상이 압도적이었으나 1939년에 이르러서부터는 등신대 이상의 전신상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실물 작품들의 수는 매우 미미하고 당시의 선전 전시도록이나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의 작품 이미지를 살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서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들로 김복진을 비롯하여 윤승욱, 김경승, 윤효중, 김만술, 권진규, 백문기, 김세중, 전뢰진을 소개하고 있다. 앞의 네 작가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며, 김만술과 권진규 역시 일본 유학파에 속한다. 백문기와 김세중 그리고 전뢰진은 국내파 1세대 조각가로 교수로 재직하던 스승의 영향 속에서 한국 근대조각의 특성인 고전적 이상미와 주관적 표현형식이 혼합된 한국 근대 구상조각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윤승욱(1914-?)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인 1938년 선전에 웅크린 여인나상을 주제로 한 <한일(閑日)>이 첫 입선작이며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한복의 <어느 여인>, 나체상의 <피리 부는 소녀>, <청년들>이 연속 입선하였다. <피리 부는 소녀>는 석고 원작을 1971년 청동으로 주조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경승(1915-1992) 역시 1939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학 당시인 1938년부터 선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1939년의 <소녀입상>이 입선, 1940년에는 <목동>으로 특선했고, 1941년에는 <어떤 감정>으로 창덕궁상을 받았다. 1942년에는 <여명>으로 총독상을 받았다. 마지막 선전인 1944년에 출품한 <제4반>과 결전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대동아 건설의 소리>는 친일작품으로 지목되었다. 윤효중(1917-1967)은 1937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1941년 12월 졸업했다. 1941년에 <P선생의 입상>과 <정류(靜流)>, 1942년에 <대지(大地)>, <천인침(千人針)>으로 선전에 입선하였고 1944년에 <현명(弦鳴)>이 특선에 올랐다. <천인침>과 <현명>은 1944년 결전미술전에 출품한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 등과 더불어 친일작품으로 지목되었다. 

김만술(1911-1996)은 일본 히나코 지츠조(日名子寶三) 조각연구소10)에서 수학했고 해방 후에는 고향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해방>은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내려는 남자의 역동적인 몸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해방공간에 제작된 것으로 시기와 주제의식이 명확한 작품이다. 권진규(1922-1973)는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에 입학해 부르델의 제자로서 일본 조각계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던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를 사사하였다. 대표작으로 석고 재질의 <나부> 외에도 테라코타 기법의 <자각상>,<소녀의 얼굴>, <여인상>등이 있다. 백문기(1927-2018)는 서울대 조소과 1회 졸업생으로서 제1회 국전에 특선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1944년작 <K신부상>은 프랑스인 ‘안토니오 공베르(Antonio Gombert, 1875~1950) 신부’의 초상조각이다. 김세중(1928-1986)은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했고 전뢰진은 홍익대 조각과를 졸업한 이후 각각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근현대조각의 전개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후 민복진, 김창희, 이정자, 고정수, 백현옥, 유영교, 임송자 등은 인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국 구상조각의 계보를 잇고 있다.

III. 현대조각의 시원 – 비구상(추상)의 순수조형 탐구  

해방이후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11) 미국과 소련이 겨루는 냉전체제의 심화와 좌우익의 대립은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의 상황에 편승해 1945년과 1948년 사이에 수많은 미술단체가 난립하게 된다12) 1945년의 <조선미술건설본부>(1945년 8월)과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1945년 9월)을 비롯해 이 두 단체의 후신으로 탄생한 <조선미술동맹>(1945년 10월)과 <조선미술가협회>(1945년 11월)는 선도적 미술단체들이었다. 한편 대학을 비롯한 미술교육기관과 행정기관도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고 급기야 1949년 국전이 창설되었다. 이론 활동에서도 비평과 역사서술의 관점의 전환이 시도되면서 일제잔재 청산문제(오지호)가 제시되는 한편 민족미술론(윤희순), 그리고 대중문화론(이경성) 같은 이슈들이 대두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수 미술인들이 전선에 나서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전시체제 미술이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미술계는 다시 한차례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고 이국전 등 좌익계 조각가들은 월북하고 윤승욱 등은 북으로 피랍되었다.  

해방 이후의 조각계는 선전 출신 조각가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해방 직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조각부를 기반으로 삼아 1945년 10월 덕수궁미술관에서 개최한 해방기념전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해방기념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김경승, 김종영, 김정수, 윤승욱, 윤효중, 이국전, 조규봉 등이었다. 이듬해인 1946년 3월에는 <조선조각가협회>가 해방 이후 최초의 조각가 단체로 결성되었다. 이 협회의 회원들은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후신인 <조선미술가협회>를 탈퇴한13) 김경승, 이국전, 조규봉 등을 포함해 김남진, 김두일, 김종영, 김정수, 문석오, 윤승욱, 윤효중 등이었다.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이 창립되면서 미술학부에 조소과가 신설되어 윤승욱, 김종영이 교수로 부임했고 같은 시기에 사학으로는 처음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과가 창설되었다. 1949년에는 홍익대학교가 설립되어 미술과를 설치하고(1956년에는 미술학부에 조각과가 창설) 윤효중, 김경승이 교수로 부임하면서 후배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9년 급기야 국전이 창설되었다.  

1950년대 조각의 주요 무대는 국전이었다. 1949년에 창설되어 1981년 마지막 전시를 치루기까지 총 30회를 이어오면서 국전은 한국미술의 대중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심사위원 선정과 입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파벌이 작용하는 등 부작용이 뒤따르고, 대한미술협회14)와 한국미술가협회15) 사이의 갈등으로 보이콧을 벌이는 등의 파행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보증하는 등용문으로서 국전의 영향력은 1960년대 이후에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1965년 국전에서 박종배(1935-)의 추상조각 <역사의 원>이 조각분야에서 처음으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전의 체질전환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어지는 1966년에도 강태성(1927-)의 조각작품 <해율>이 국전 최고상을 타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상에서 보듯 해방 후 조각의 전개는 선전을 통해 활동했던 일본 유학파 조각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현대미술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조각에서도 다양한 재료의 도입과 함께 ‘뜨거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금속재와 용접조각의 등장은 조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김종영과 송영수는 용접조각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용접에 의한 철조는 당대의 대표적인 방법이라 부를 정도로 일종의 유행현상을 빚기에 이른다. 오광수는 “다양한 재료의 확산은 철조에만 국한되지 않는 금속재의 적극적인 원용을 가져왔고, 당연히 재료에 의한 형태의 새로운 문법이 추구되었다”16)고 이 시기를 진단하고 있다. 

김종영(1915-1982)은 1950년대 후반부터 순수 조형적 공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출품한 <여인좌상>을 비롯한 1950년대의 작품들은 대부분 여인상과 모자상 등을 소재삼은 구상이면서 표현적인 형상성에 치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추상적인 순수 조형작업으로 전신하여, 나무·금속·대리석을 재료로 한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의 추상으로 접어들었다. 그 조형적 특질은 구성적이며 공간적이고, 혹은 유기적인 생명감을 가지는 다양성을 이루었다. 송영수(1930-1970)는 서울대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김종영에게 배웠으며 이후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1953년 이후 국전에 수차례의 특선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1956년부터 쇳조각이나 철판을 용접해 만든 추상작품을 시도했다.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새로운 시도로 알려지면서 그는 ‘한국에 철조를 도입한 조각가’로 소개되고 있다. 1956년의 <향(響)>을 비롯해 1957년의 <효(曉)>는 대표작이다. 그의 추상은 비대상으로서의 순수추상이 아니라 인체나 새를 모티프로 삼은 비구상적 경향의 추상을 보이고 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를 풍미했던 추상조각은 개념에 있어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기의 추상은 비대상적 조형 형식에 이르지 않은, 구상에 대응하는 의미로서 비구상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에서 구상과 비구상적 요소들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김정숙(1917-1991)의 1960년대 초기 조각들은 대리석과 나무 그리고 청동을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주제의 자유로운 조형적 변용을 시도한 비구상작업의 경향을 보인다. 그녀의 작품은 여인상과 새의 날개를 형상화 한 것으로 비상의 이미지를 나타내거나 생명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윤영자(1924-2016) 역시 인체를 주제로 유기적을 추구하는 여성 조각가 1세대로서 한국 비구상조각의 확산에 기여했다. 강태성, 김영중, 최종태, 오종욱, 최의순, 최만린이 제작한 이 시기의 작업 역시 대상의 변형과 왜곡을 시도하는 비구상 조각의 범주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문신, 박종배, 정관모, 엄태정, 박석원은 순수 조형과 재료의 물성에 주목하는 순수 추상조각의 세계에 천착한 경우라 할 수 있다.17)  

1950년대 이후 조각계에 추상이 등장하게 된 배경 중에 괄목할 만 한 사항의 하나는 해외 진출을 통한 국제 미술계와의 직접 교류를 들 수 있다. 1951년 윤효중 유네스코 회의 참석차 유럽여행을 하고, 1953년 김종영 런던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정치인을 위한 모뉴멘트> 국제전에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세계적 조류를 점진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18) 이러한 교류의 경험은 인물 위주의 구상조각으로 일관되어 오던 한국의 조각계에 추상조각이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실험적 경향의 작품들이 등장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 국제전 참가는 비엔날레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1963년 이후 상파울로비엔날레와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에 다수의 작가들이 참가했다.19) 한편, 1960년대 비구상 혹은 추상조각의 계보는 현대작가초대전20)과 1963년 창립된 <원형회 조각전>을 중심으로 풍부해지기 시작했다.21) 이외에도 1960년대의 주요 단체는 서울대 조소과 출신 신진들로 창립된 <낙우회>(1963), <현대공간회>(1968), <청동회>(1969), <제3조형회>(1969) 등이 있으며, 홍대 조각과 출신으로 구성된 <현대조각가회>(1969), <홍익조각회>(1971) 등이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현대조각을 말할 때 비구상(추상) 조각만으로 당시의 조각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주목할 것은 종교조각과 기념조각이다. 이러한 두 개의 경향은 순수조각의 범주가 아닌 공공조각으로 분류되어 지금까지 연구가 소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야의 작품들이 교회나 공원 그리고 광장 등 공공장소에 소장되고 있고 이들 작품이 파급하는 대중적 영향을 고려할 때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1954년에 제작된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와 서울 혜화동 성당에 설치된 1960년에 제작한 <최후의 심판도>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편 기념조각의 약진도 1950년대를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르다. 기념조각상 건립사업은 윤효중의 <이충무공상>(진해, 1951)을 시발점으로 김경승의 <이충무공상>(부산, 1951)이 세워지면서 붐이 일게 되었다. 이 두 작가는 1950년대 수많은 기념조각을 주도했고 1950년대 말에는 김세중, 김찬식, 김영중 등이 동참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기념조각은 순수창작조각과 더불어 두 개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했다. 기념조각상은 4.19혁명을 지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1960년대에는 국가지원사업으로 확장되었다. 김세중의 <이충무공상>(1968), 김경승의 <세종대왕상>(1968), 윤영자의 <정다산선생상>(1968) 등이 1960년대에 제작 건립된 대표적인 예다. 애국선열조각상의 열기는 민족기록화 제작과 그 맥락을 같이한 국가지원사업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조된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이상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조각을 비구상(추상)의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제시되는 논점은 한국 현대조각에서 추상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추상 조각의 급격한 세력화에도 불구하고 추상조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제기되었다. 구상과 추상의 대립 논쟁은 오광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구상과 추상의 미학적 바탕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국제전 참여를 계기로 야기된 화단 기류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구상과 비구상 그리고 추상의 무분별한 사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조각사에서 추상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는 연구 과제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해외조각의 수용과 전통에 대한 재해석 사이에 형성되었던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연구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아울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가톨릭종교조각과 기념인물조각에 대한 연구도 미진하여 향후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IV. 오브제·설치 : 모던과 탈모던의 역학

1970년대는 그룹 차원의 조각활동이 과거 어느 때 보다 활성화된 시기였다.22) 이 시기에 창립된 조각 단체는 동문과 계열 그리고 연령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조직되었다. 1971년 홍익대 출신 조각가들의 모임인 <홍익조각회>를 비롯해 1974년 성신여대 출신 조각가들의 그룹인 <성신조각회>와 1974년 <한국여류조각회>, 1977년 구상계열 조각가들로 구성된 <한국조각회>, 1978년 <후기조각회>가 줄지어 출범했다. 1981년에는 <서울미대 조소과 동문들의 모임인 <서울조각회>가 결성되고 1982년에는 <MT 조각회>, <젊은 조각회>, <마루조각회>가 동시에 창립되었다. 지방에서는 1974년 <충남조각회>가 생겨난 이후 1980년 <경북조각회>, 1981년 <남도조각회>가 문을 열었다. 조각가 그룹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배경에는 1975년에 출범한 <서울현대미술제>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부산, 대구, 광주, 전북, 강원에서 지방 현대미술제를 열고 현대미술의 전국적인 확산을 조직적으로 주도했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조각전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현대조각연립전>(1970)을 들 수 있는데 이 연합전에는 1963년에 창립한 <낙우회>와 <원형회>(1963), 1969년에 창립한 <현대조각회>와 <제3조형회>가 참여했다. 뒤를 이어 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현대조각초대전>(1972), <전국조각가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현대조각대전>(1974)이 이 시기에 열린 대규모 조각 전시회였다. 조각에 국한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1970년대 한국미술을 논할 때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AG>는 1969년 전위미술단체임을 표방하며 30대의 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등이 참여했다.23) ‘AG 그룹은 이념, 논리, 비전 빈곤의 한국 현대미술의 약점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표지를 내세우며 기관지 <AG>를 4회 발간하고 외국의 새로운 사조들을 소개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조각계의 활성화는 조각의 종래적 개념에 대한 검증과 반성을 촉구했다. 즉 사물 자체의 존재성과 그것이 놓이는 공간(장소) 사이에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의 체계에 대한 탐구가 본격화된 것이다. 오브제와 설치에 관한 연구들이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 것이 환경의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오광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1970년대 이후의 경향은 일종의 형태의 환원적 현상과 물질적 확산의 실험이 더욱 고조되면서 다양화로 특정되며, 동시에 조각의 고유한 개념에 대한 검증과 반성이 실험의 근간을 이루어 나갔다. 이 무렵 조각에 대한 개념적 명칭은 회화의 평면과 대응되는 입체로서 표기되었으며, 이른바 유개념(類槪念)으로서의 오브제를 종래의 조각과 구분해 주기 위해 입체 2로 표기했다. 물질의 실험은 이미 만들어진 오브제의 등장과 더불어 순수한 원자재 또는 돌, 모래, 흙, 시멘트, 나무, 물 같은 가공되지 않은 물질과 원소를 끌어들이는 추세로 진행되었다. 이같은 물질의 실험은 비단 조각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형 전 영역에 걸친 작가들의 공통된 관심으로 발전되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의 증폭,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려는 현대미술 일반의 추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물질실험은 점차 인간과 물질,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의 문제라는 보다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그 폭을 넓혔다.”24)

이상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970년대 한국 현대조각의 행보는 동시대 국제 미술계의 실험적 경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듯 유럽에 있어 오브제와 설치의 개념은 1960년대 초반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에 의해 강력한 세를 구축하게 된다. 프랑스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에 의해 선언된 미술운동으로서 누보레알리즘은 뉴욕의 정크아트(Junk Art)나 팝아트와 연계되면서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가정용 쓰레기에서 자동차 부품에 이르는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원리아래 생경하게 작품으로 제시했다.25) 그러나 1970년대 한국의 현대조각가들은 누보레알리즘에 대한 극복의 상황을 제시했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연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이태리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helant)가 이끌었던 조형운동으로 1967년 이태리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26) 물질문명 중심의 후기산업사회가 야기한 문제들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이들은 산업오브제가 아닌 자연오브제를 예술 표현의 매체로 채택했으며 돌, 모래, 흙, 나무, 유리, 물, 불 따위의 가공되지 않는 물질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르테 포베라는 재료 자체의 물질적인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기존의 예술개념을 해체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다. 시각을 좀 더 넓혀 보면 아르테 포베라는 일본의 현대미술 운동으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모노하(物派)27)와 연대하고 있었다. 돌, 모래, 흙, 나무, 유리, 철판, 종이 따위의 자연오브제를 생경하게 제시하여 물체의 물성 그 자체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근본적인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주장은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이우환이 주도했던 모노하는 자연물을 소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 자체로 제시하며 직접적으로 예술언어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개념이 신체성28)과 장소성이었다.             

오브제·설치는 오브제의 물성과 존재성에 대한 사유와 더불어 그것이 설치되는 장소 혹은 공간과 밀접한 상호관계성을 지니며 기존의 조각개념을 확장시켰다. 이들이 채택한 장소 혹은 공간은 3차원적 공간을 넘어서 정치 사회적 함의를 지닌 인식론적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오브제·설치의 미술은 갤러리나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를 넘어 도시나 광장, 거리로 확대 되면서 환경미술, 자연미술, 대지미술 등으로 미술의 경계를 무한히 팽창시켰다. 시각을 달리해 보면 오브제·설치는 전래의 예술 개념에 혼란을 야기하면서 미술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미술의 위상에 대한 본질적 물음들이 제기되면서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벗어나는 기류를 만들어 내었다. 가령 해프닝과 퍼포먼스29) 따위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예술개념의 혼란은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및 반성이라는 태도와 함께 서구에서 뒤이어 대두되기 시작한 탈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의 그룹들은 동시대의 국제적 미술사조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이 방향성과 실천방식에 대해 연구했다. 1969년에 출범하여 1973년까지 지속된 <AG>가 세 차례 테마로 내걸었던 ‘환원과 확산의 역학’, ‘현실과 실현’, ‘탈관념의 세계’ 등의 주제는 ‘미술의 개념에 대한 검증작업이면서 가장 진폭 있는 매재 실험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0년에 열린 ‘환원과 확산의 역학’전30)의 전시서문에서 오늘의 미술은 일찍이 없었던 극단적인 진폭을 겪고 있다는 전제하에 온갖 허식을 내던진 미술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의 예술의 의미는 그것이 ‘예술’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생의 확인’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환원과 확장의 의미는 근원적인 자신으로의 환원이며 생의 상태로의 확장이었다.31) 이듬해인 1971년에 열린 ‘현실과 실현’전에서는 오늘의 미술이 지향하는 오브제 미술의 과제가 ‘물적 상태로 환원된 현실의 실체와 구조의 탐구를 실현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테마전인 1972년의 ‘탈관념의 세계’전에서는 관념의 테두리를 넘어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 오늘의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주장하고 있다. 

AG 그룹은 현대미술의 구심체로 출발했지만 특정한 표현형식이나 이념을 표방한 단체가 아니었다. 서성록의 표현에 따르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각종 양식들을 보다 탐구적인 자세로 연구하여 현대미술의 체계화를 도모하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자는데 AG의 방향”이 있었다.32) AG의 집단적 움직임은 1974년 <제1회 서울비엔날레>를 조직해 13명의 회원과 63명의 초대작가를 선정하여 당대 최대의 전위세력을 규합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아쉽게도 단발성으로 그쳤지만 이 전시는 설치에서 퍼포먼스에 이르는 다양한 경향을 집대성하고 있어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뒤이어 1975년 결성된 <에꼴 드 서울>과 <서울현대미술제>를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전북, 강원 등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지방의 현대미술제들은 ‘엘리트 중심’의 현대미술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현대미술의 양상은 큰 변화를 보인다. 변화의 이유는 현대미술의 집단화에 따른 타성화와 경직화의 탓도 있지만 순수예술 지상주의의 만연과 개념으로 무장된 엘리트주의 그리고 물성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따위의 증후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성록은 이러한 상황을 모더니즘, 탈모던, 반모던의 역학관계로 정리하고 있으며 불확실성이 가득찬 시대로 적고 있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등장한 것이 민중미술이었다. 민중미술은 미술계에 당대의 현대미술 경향을 엘리트적 형식주의로 규정해 전면 부정하고 자신들의 과제를 민중, 노동, 그리고 계급 등의 사회적 이슈를 예술 실천의 과제로 끌어안았다. 이는 탈모던 혹은 포스트모던이라는 형식언어의 테두리 내에서 문명, 사회, 문화, 역사 등에 주목하는 현대미술의 움직임과 대별되면서 1980년대의 화단을 크게 갈라놓았다. 198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미술계는 다시 한차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른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의 개최에 따른 사회적 변동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대내적으로 도시와 공원을 정비하고 문화적 자기성찰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대외적으로는 국제화에 부응하는 사회적 여건에 의해 양식의 다원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술의 국제화 현상과 다원적 기류는 199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기획전에서 197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시기의 경향들을 두 개의 양상으로 구분해 정리하였다. 하나는 <오브제·설치>의 맥락이며 다른 하나는 <신형상>의 맥락이다. 전자는 문자 그대로 산업오브제 혹은 자연오브제를 선택하고 공간과 장소와 연계된 맥락의 전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경향의 집합이며, 후자는 구상조각에 근거한 사실주의 조각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질 다양한 형상적 모험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오브제·설치> 섹션에는 백남준, 이승택, 조성묵, 윤석남, 김광우, 심문섭, 전국광, 최인수, 변종곤, 안규철, 문인수, 원인종, 정현, 심영철, 윤영석, 서도호, 김종구, 이수경, 이재효, 권석만, 박선기, 성동훈, 김기철, 최우람 등 24명의 작가들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오브제·설치’는 특정한 표현형식이나 이념을 나타내는 양식이나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동시대 미술에 나타나는 비조각적 조형방식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에서 시작되어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오브제 미술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에서 세를 규합하고 전후의 네오다다,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아르테 포베라 그리고 대지미술에 이르면서 반예술과 반미학의 역설적 언어로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새롭게 구축했다.   

오브제·설치미술을 미디어 아트의 범주에서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작가는 백남준이다.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한 그는 1958년 쾰른에서 대중매체로서 TV와 비디오라는 대중매체를 예술 생산의 매체로 채택하고 그 내부에서 매체의 권력과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번 기획전의 출품작가 중 심영철과 성동훈, 김기철, 최우람은 빛과 소리 그리고 움직임 등의 매체를 통해 시지각적 공간에 대한 다채로운 체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한편, 돌덩어리를 철사줄로 묶어놓은 이승택과 라디오를 재료로 삼아 특유의 의자를 조형한 조성묵의 작업은 자연오브제와 산업오브제 각각에 가해진 예술가의 의도를 흥미롭게 상상케 해 준다. 김광우가 제작한 거대한 오토바이 작품 <자연+인간+우연, 보헤미안>은 자연오브제와 산업오브제의 융합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윤석남의 <어머니2_딸과 아들> 역시 나무판에 각인된 삶과 그 기억의 아련함을 드러내고 있다. 심문섭은 이번 전시의 유일한 캔버스 작업을 오랜만에 선보였는데 전래적 캔버스의 표면에 사포질을 가해 지지체와 표면의 물성에 주목하게 만든 작품이다. 작가의 동의를 얻어 그의 작품을 벽이 아닌 조각대 위에 세워 설치한 것은 오브제로 전치된 캔버스에 주목하려는 기획자의 의도다. 전국광의 <매스의 내면>은 말 그대로 매스의 구조와 물성 자체에 주목한 1970년대의 실험적 경향을 명쾌하게 대변하고 있으며 최인수, 문인수, 김종구, 이재효, 권석만은 이 계보의 또 다른 독자적 실험의 결실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변종곤은 여행용 트렁크와 술병의 표면에 극사실적 이미지를 그려 놓아 오브제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게 만든다. 안규철은 <영원한 신부>라는 제명과 함께 작은 문 두 점을 시리즈로 내놓았다. 밖으로 안으로 각각 조금씩 열린 채 고정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의 날 선 언어적 유희와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오브제의 물성과 기억에 대한 편집적인 열정은 원인종의 철선용접 기법으로 제작한 북한산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정현이 철도 침목으로 세워 올린 <서있는 사람들> 44점은 국내 최대 순교성인 박물관의 역사성 및 장소성과 조응하며 진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거대한 권총 한자루를 ‘제작된 오브제’로 내놓은 윤영석은 주제가 주는 긴장감 외에도 크기와 재질의 변형을 통해 낯선 충격을 선사하고, 유치원복에서 민방위복에 이르는 유니폼 9점을 나열하여 자신의 39년을 생경하게 드러낸 서도호의 작품은 집단과 개인 사이의 역학으로 점철된 근현대사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이수경의 도자기 파편을 재조립해 만든 <번역된 도자기>와 박선기의 거대하고 흥미로운 숯 매달기 작업 <An agregation 190501>은 오브제 미술의 특징인 전치(轉置, Déplacement)의 어법을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실이다.     

이상의 작업을 오브제와 설치의 영역으로 분류한 것은 오브제 미술과 설치 미술의 작동 원리인 ‘전치’에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매달기, 걸어놓기, 고정하기, 쌓기, 확대하기, 변형하기, 갈기, 감싸기 등은 오브제가 지닌 원래 기능을 상실시킴으로써 그것을 새로운 의미생산의 영역으로 이끌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전치의 기술로 예술의 영역에 초대된 산업오브제 혹은 자연오브제는 그것이 원래 지니고 있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차단시키는 전치의 효과에 의해 상기된 기억을 다시 무의식과 상상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체험하게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비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세계이다. 결국 원래 지니고 있던 기능이 상실된 각종 오브제는 장소가 주는 순간의 맥락에 따라 보는 이들을 열린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V. 신형상 : 새로운 리얼리티의 모색 

1970년대 이후의 미술사 계보에서 <오브제·설치>와 더불어 연구 대상이 되는 또 하나의 작품 경향이 <신형상>이다. 신형상이라 할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선재 개념으로서의 형상(形象)이다. 이 형상은 구상(具象)과도 다른 뉘앙스를 지닌 단어로 ‘형태와 상’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미술에 있어 사람이나 사물의 형체를 본떠 만든 구체적 이미지가 구상(figure)이라면 형상은 모양새(shape, form) 자체에 방점을 둔 이미지로 이해될 수 있다.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구상의 원리가 모방과 재현이라면 형상의 원리는 형태와 형체에 가깝다.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은 구상미술의 대응개념으로 등장했다면 신형상 미술은 질료나 물성에 주목하는 현대미술의 조형방식에 대응하며 생겨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형상은 모던과 탈모던의 역학에 의해 추동되었던 근대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신형상이라는 용어는 1970대 말 몇몇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들을 통해 채택되면서 미술계에 파급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동아일보에서 창설한 ‘동아미술제’와 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중앙미술대전’은 신형상 계열의 작품들을 수용하면서 미술계에 큰 변화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33) 이들 민전은 동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상미술을 적극 수용하면서 국전과의 차별화를 도모했다. 특히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형상성’을 채택함으로서 미술계에 새로운 기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공모전에서 특정한 이념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형상성은 전통적 모방과 재현의 전통적 양식을 넘어 실재와 환영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의 과제로 표상한 경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미술제 창립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던 오광수는 동아일보 지상에 새로운 형상성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올리고 있다. 

“구상이란 용어를 피하고 형상이란 용어를 굳이 선택한 것은 재래적인 사실과, 전후에 등장한 추상의 대립된 개념으로서의 구상이 구분되지 않고 이 전체를 구상이란 용어로 얼버무리고 있는 한국적인 오류를 막아 보자는데 그 1차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라고 강조한 것은 최근 10년간 추상의 반작용으로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일체의 형상적 경향 – 객관화 지향 사조, 표현주의 내지 초현실주의에 연결된 예외적 의식상태의 조형 –을 진작시킴으로써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조형 사고의 획일성을 벗어나, 보다 풍부한 이념적 바탕을 만들어가자는 의도에서이다”34)  

따라서 신형상 미술의 표방은 전통적 구상 미술뿐만 아니라 추상의 경직된 형식과 물성에 주목했던 모더니즘 미술을 모두를 극복하고 실재와 환영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나라 신형상의 시작은 1980년을 전후해 국제적 경향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구미지역의 뉴페인팅(New Painting)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른바 프랑스의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독일의 <신표현주의(New Expressionism)>, 이태리의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 Avantgard)>, 그리고 미국의 <배드페인팅(Bad Painting)>은 이미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내세우는 한편 차별적 형식논리를 지닌 신형상 계열의 경향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이들 새로운 조류의 회화는 나름의 자국적 족보를 지닌 것이었다. 가령 자유구상은 196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의 신구상(Nouvelle Figuration)35) 혹은 서술적 구상(Figuration Narrative)36)의 계보를 지닌 것이었고, 신표현주의는 일차대전을 전후해 등장했던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명실공히 국제적 경향으로 자리 잡은 이들 신형상 미술의 공통분모는 “현대사회의 폭력과 교란 그리고 정치와 역사에 대한 정보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동시대적 표현과 즉자성이 풍부한 회화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37)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에 문을 연 서울미술관은 프랑스 신구상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함으로서 이 계열의 새로운 기류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아쉽게도 동아미술제와 서울미술관이 공모전과 기획전을 통해 추상 일변도의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 분야에서 새로운 형상미술에 대한 연구는 회화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논리의 허약성은 자국의 길고 긴 구상 탐구의 전통에서 성취를 이룩했던 서구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필연적 논리의 전개과정이 부재한 채 막연한 거부의 몸짓이나 부정의 현상론에 지지된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에 연유한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38)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할 구상이나 형상의 전통이 없다는 지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이번 기획전에서 설정한 <3부: 신형상>는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서 오늘에 이르는 새로운 형상 조각의 다양한 사례들을 살피고 그 ‘부재의 계보학’을 동시대의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일 수 있다. 초대 작가들은 김영원, 홍순모, 이종빈, 박헌열, 배형경, 류인, 이용덕, 임영선, 이불, 구본주, 신미경, 조정화, 안재홍, 천성명, 권대훈, 이환권, 권오상, 최수앙, 이동욱, 박영철 등 20명이다. 이들의 작업 경향을 하나의 형식원리로 묶을 수 있는 기준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의 전시로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1970년대 이후에 전개되는 모던과 탈모던의 역학 기류 속에서도 새로운 형상성을 모색하기 위해 고심해 온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1970년대 이후 지속되어 온 모더니즘의 후기적 경향인 미니멀 아트와, 반예술과 반미학을 내세우며 탈모던적 기류를 주도했던 오브제·설치 경향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세워온 이들이다. 

김영원은 1977년 ‘중력 무중력’ 시리즈를 발표한 이래 인체조각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 한국 조각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헌열, 이용덕, 임영선 등은 선배의 뒤를 이어 신체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상을 동시에 담아내는데 성공한 경우다. 홍순모의 거칠고 투박한 인물형상은 가시적 형태를 벗어나 재료의 형질에서 우러나오는 물신적 기운으로 채워져 있다. 이종빈과 배형경으로 이어지는 인체조각은 세부적 묘사가 억제된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진동하는 정신의 원초적 힘을 느끼게 한다. 류인과 구본주는 왜곡과 변형의 인체를 통해 삶의 근원적 불안과 욕망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이불의 사이보그나 안재홍의 동파이프 인물상 천성명의 연극적 내러티브 조각 이환권의 변형된 인물상을 하나의 신형상 범주에 담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모두는 동시대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색다르다는 것이요 그 색다름의 시선으로 변화하는 시대상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누 조각가 신미경의 경우 자신의 몸을 고대 그리스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오버랩 시키는 작업으로 자신의 몸을 미술사적 맥락으로 연결시키는 접점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조정화의 극사실적 조각이나 박영철의 텅 빈 인물상은 모두 존재의 껍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체에 대한 시선은 변화해온 인간에 대한 성찰에 동시대성을 대입시키고 있으며 이런 시선은 권오상의 사진 조각과 최수앙의 불온한 인체조각 그리고 이동욱의 통조림 속의 작은 인물상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서 시작된 신형상 조각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나의 경향 차원을 넘어 양식규정의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이 다양한 신형상 조각의 경향들을 미술사의 맥락에서 정리하기 위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형식의 특성과 계보를 이론적 지지할 방법론과 논리적 근거를 개발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일어났던 신형상 미술의 현상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어떻게 미술의 성격 형성에 작용하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미술과 내부적 자각의 만나는 접점에서 복합적인 조형의 생성논리를 구출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교차점에서 라캉이 제안한 ‘현대 계보학’은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VI. 결언 : 한국 근현대조각의 계보학을 위해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을 앞두고 한국 조각사의 계보를 새롭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념과 방법론을 세워야 한다. 단순히 시간의 마디를 재단한다는 논리를 넘어 조각을 포함한 미술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역사서술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계보란 ‘연속성’에 기반한 개념이지만 미술의 계보에 대해 고찰할 때 연속성은 역설적으로 부정과 ‘단절’의 마디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절의 연속성’이 미술사 기술을 위한 방법론으로 정착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적 변증법을 제시한 헤겔 이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계보의 학으로서 계보학은 특정 경향이나 사조를 구성하는 인물간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으로 정착되어 왔다. 단절의 연속성을 변증법적 관점에서 살피고 그 주체들 사이에 얽혀진 다양한 관계를 밝히는 것이 계보학이다. 하지만 현대 계보학에서는 인물간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리(의미, 가치, 본성)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탐구하는 방법론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를 들어 푸코의 계보학은 하나의 대안적 사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계보학의 탐구 대상으로서 진리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의식의 성숙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보학적 성찰이란 고정된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에 한 시대의 지식의 구성조건으로 당대의 권력이 만들어낸 법칙이나 규칙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39) 결국 현대 계보학의 맥락에서 한국 근현대조각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시대의 권력으로서 법률, 교칙, 규정, 교리 등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권력에 대한 유착 혹은 극복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주최한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을 통해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사에 주목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에 김세중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한국 근현대조각의 미의식>을 연계시키며 한국 근현대조각사의 연구의 범위를 여섯 마디로 분류했다. 1. 가톨릭종교조각, 2. 기념인물조각, 3. 구상조각 4. 비대상(추상)조각, 5. 오브제·설치, 6. 신형상이 그것이다. 앞의 두 마디(1,2)는 전시회가 열린 김세중 미술관의 특수한 장소성을 고려해 종교와 동상이라는 주제를 내건 것이고 뒤의 네 마디(3,4,5,6)는 역사박물관이라는 조건에 힘입어 20세기에 등장한 조각의 흐름을 몇 개의 경향으로 정리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범위 설정은 연구의 편의를 위한 것이며 한국 근현대조각사의 다양한 경향들을 모두 포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현대조각의 계보는 구상조각, 비구상조각, 추상조각 등 순수 창작조각의 분야를 비롯해, 종교조각이나 기념인물조각 등의 목적성을 지닌 분야, 그리고 오브제·설치나 신형상 등의 탈조각적 장르의 다양한 경향들을 통해 어느 정도 수렴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가 한국 근현대조각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한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면 필자에게 더없는 행복일 것이다. 

(출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기념 전시도록 서문, 20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