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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연 /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

김영호

윤보연 /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국내 학부에서 환경학과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 했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미국  인디아나 대학에서 사진인터미디어로 다시 석사학위를 받은 윤보연이 귀국 후 첫 개인전을 갖는다. 환경·공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부를 해 왔고 이러한 노정에 대해 민감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작가에게 건넬 수 있는 덕담이란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작가가 걸어온 길이 탐구와 도전의 열정으로 채워져 있음을 전제한다면 전공의 다양성은 오히려 그의 작업을 주목하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데뷔전을 치루고 있는 윤보연에게 예술과 공학을 아우르며 체득한 경험과 융합적 사고의 결실들을 선보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미술계에도 반가운 일이다.   

윤보연이 이번 전시에 내건 주제는 ‘INVALUABLE’ 즉 가치에 관한 것이다. 유용성에 대한 물음은 대개 사물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일은 작가의 경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치의 문제는 예술 작품의 형식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존재의 본성이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비어있음(空)이나 무아(無我)의 개념으로 설명될 때,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관건은 그 성찰이 어떤 조형언어로 구현되고 있는가에 따라 차별화된 가치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술의 문제는 언제나 철학적 의미구조를 품고 있지만 결국 예술의 형식과 원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윤보연은 이번 전시에 ‘순수사진’과 ‘인터랙티브 오브제’ 그리고 ‘영상설치’ 시리즈를 선보인다. 여기에 전깃줄을 절단한 후 그 점 조각들을 조형요소로 삼은 ‘평면작업’ 시리즈도 있는데 ‘손의 노동’이라는 전통적 과제를 여전히 품고 있는 작가의 의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순수사진’ 시리즈는 자신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해체해 찾은 부속 하나를 카메라로 포착해 대형 화면에 확대 전사한 것이다. 이 작업에서 개입된 작가의 역할은 컴퓨터 부속의 정밀한 구조에서 어떤 세계를 발견한 것, 그 발견된 부속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진 이미지로 재현한 것, 새로운 재현을 통해 이미지에 어떤 가치를 부여한 것 따위로 정리될 수 있다. 도시의 야경이거나 인물의 초상 혹은 뇌의 신경계를 연상케 하는 사진 이미지는 김춘수 시인의 싯귀를 떠오르게 한다. 꽃을 향한 시인의 궁극적 바람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의미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내가 그의 의미가 되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남기를 바라는 시적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윤보연이 컴퓨터 부속 이미지에 유용한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적 방식이란 무엇인가. 앞선 설명처럼 일상의 영토에서 사물을 발견하는 눈과, 접사 프레밍을 통해 그것을 사진으로 재현하는 세밀한 기술과, 오직 예술 작품으로서의 유용성 이외의 기능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전치(데페이즈망)의 원리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두 번째 시리즈인 ‘인터랙티브 오브제’ 작품들은 버려진 스마트폰 몸체에 센서를 연결해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도록 만든 설치작업이다. 신의 손으로 불리우는 스마트폰은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도구이지만 새로운 버전의 등장에 의해 2-3년을 주기로 폐기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사물이다. 작가는 서랍 속으로 안치된 스마트폰들을 다시 현실로 불러내어 관객들과 대면시킴으로서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새 생명을 얻게 된 고물 스마트폰은 자신이 광고의 희생물이자 과학의 시체이며 과잉된 소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애써 발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토해내는 발언은 소극적이다. 옛 주인이 사용하던 초기 화면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전자음을 반복적으로 재현할 뿐이다. 관객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는 듀얼 스마트폰의 몸짓은 즐거움을 파는 어릿광대처럼 애처러워 보인다. 서랍에 잠들고 있거나 폐기되거나 중고의 신체로 외국으로 수출되는 스마트폰의 존재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존재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경우 예술로서의 가치는 절대가치의 부재를 알리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의 이름 부르기라 아니할 수 없다.    
                      


윤보연의 이번 전시 하이라이트는 세 번째 시리즈인 영상설치 작업이다. 30개의 세라믹 안면 조각이 벽면에 흩어져 부착되어 있고 그 위에 실존 인물의 얼굴 영상이 순차적으로 비추어지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음성이 스피커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다. “I am Melanie Stepro!”, “I am Jake Sneath!” 전시장 공간에서 다양한 인종의 마스크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낯선 상황과 대면하고 있는 것은 관객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축성된 공간인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이 영상설치 작품이 건네는 인사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프로젝터가 발사한 빛을 받아 지명된 존재들이 순차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상황은 어느덧 작은 사건(해프닝)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상황에 내가 개입되는 것이다. 나의 의식은 어느덧 벽면의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내 스스로를 소개한다. “나는 000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작가의 전략에 따라 존재하는 나에 대한 성찰의 단계로 전환되는 순간의 나를 경험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상의 세 시리즈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는 INVALUABLE(매우 유용한, 귀중한)이라는 전시주제에 의해 하나로 수렴된다. 사물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묻고 있다. 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치의 성찰’은 철학적 논쟁의 중심적 화두로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이어져 온 주제였다. 그것은 비단 철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종교와 예술의 영역에서도 지속되어 온 화두였다. 인간의 문명사 전체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규정해온 역사라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서양의 존재론에서 의미론 그리고 해체론에 이르는 방대한 철학적 영역의 논쟁은 인간의 지각과 인식 체계가 무한하게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양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공사상(空思想이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정의는 명증함과 장쾌함을 제공한다. 더불어 노자의 도가사상은 존재의 실체와 가치를 이해하는 초석이 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 제1장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즉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하는 도가 아니고,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 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의 존재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며, 역으로 해석한다면 언어로 규정된 존재는 그 존재의 속성과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네 인간의 삶과 의식과 역사는 모두 언어로 정리되어 있다. 언어로 정리되어 있는 세상은 따라서 존재의 본성과는 별개로 의미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문화나 문명이 모두 이 언어적 체계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로서의 언어적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로 짜여진 문화나 문명의 세계는 불완전하며 임의적이고 규약적인 체계안에서 작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우리가 이해하고 나면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언어 이전의 세계와 언어로 짜여진 세계다. 예술은 언어를 통해 언어 이전의 세계와 소통을 지향한다.           

윤보연의 첫 개인전에 부쳐 방대한 동서의 철학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윤보연의 작품들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유의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여기다 예술의 이름을 덧붙인다면 윤보연의 작품들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서 예술적 언어에 관한 성찰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적 담론 자체가 아니라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예술적 언어의 방식이 논점이 된다. 버려진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의미를 품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는 사연과 그것이 품고 있는 가치에 관한 ‘예술적 고찰’이 작가로서 그녀가 앞으로 심화시켜야 할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변혁기를 살고 있다. 예술과 공학이 융합되고 인공지능이 미래가 되는 시대에 예술에 대한 정의와 본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러한 변환의 시기에 윤보연의 행보가 주목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언어적 ‘인식’을 넘어 ‘깨달음’이라는 명제로 풀어내 온 전통이 우리에게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윤보연 개인전 도록 서문, 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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