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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숙 / 화업 40년 : 흥의 미학

김영호

최성숙 / 화업 40년 : 흥의 미학

김영호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흥이 나와야 그리지!” 

   화가 최성숙이 작품 제작 동기를 드러내는 말이다. 주지하듯 흥(興)이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역동적 감정이다. 춤이나 노래 따위가 흥을 돋우는 매개로 알려져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재미나 즐거움을 산출해 내는 흥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일깨워 예상 밖의 성과를 일궈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흥이 고조에 달했을 때 종교적 황홀감이라 할 수 있는 신명(神明)이 생기며 이 때 초월적 능력이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흥의 미학은 우리민족이 누려온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에서 보듯 우리민족은 추수감사제 기간 이면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흥의 민족이었다. 고려시대의 기마격구(騎馬擊毬)나 장치기 그리고 줄다리기 같은 전래 놀이 역시 흥의 의식을 동반한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남존여비의 유교 풍조와 당쟁 그리고 수없는 외침과 국난으로 인해 한(恨)이 많은 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동해 온 집단적 흥의 기질은 근대 이후에 와서도 맥을 유지하고 있다. 2002 월드컵에서 보여준 붉은 악마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우리 민족의 유전자 속에 지속되어온 흥과 신명의 발흥이었다.  
   화가 최성숙의 경우 창작의 원천으로 믿는 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작가는 여행과 자연의 관찰에서 직접적인 동인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의 의견을 보태자면 작가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타고난 상상력이 흥을 돋우는 기질적 바탕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년시절 부터 좋아했다는 무용과 음악이 작가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아 흥에 쉽게 감응하는 성격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했던 시절, 그녀와 함께 했던 인물들과의 추억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성숙의 작품에 흥이 오르면 새가 노래하고 바람이 춤을 춘다. 낙엽과 눈발이 무지개를 재촉하며 허공을 나른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조충(鳥蟲)과 화초, 그리고 국내외 풍경과 의인화 된 십이지신(十二支神)의 동물들은 사랑과 추억의 파편들을 화폭 위로 토해내는 흥의 전령들이다. 그녀가 나섰던 여행의 기억은 흥을 일으키는 노래요 춤이자 흥의 결실인 그림으로 나타난다. 여행을 통해 지나온 삶의 추억에 상상력을 더해 그림의 씨앗을 잉태하고 그것을 신명의 형식으로 숙성시키면서 작품의 결실을 거두는 셈이다.
   관점을 달리해 보면 흥에 기반하는 최성숙의 그림은 마음을 수행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른바 흥을 통해 현실의 비애와 괴로움을 풀어내는 것이다. 무녀(巫女)가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어 신명을 체험하고 마침내 일상계와 초월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듯 작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고 애환(哀歡)을 추억하면서 다시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흥취의 세계로 진입해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입시키고 신명의 차원에서 예술적 성취를 누리려 했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내력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흥의 개인사 
 
1978년 첫 개인전 이후 화력 40년을 맞은 노장 화백은 아직도 수줍게 말한다. “내 그림을 보면 가슴이 뛰어요. 웃기지 않아요? 난 그게 재미있어!” 그리고 말을 다시 잇는다. “50% 했나 싶어요. 지금까지 공부한 것 같아. 어제 본 풍경이 오늘 본 풍경과 다르니 할 일이 많아요.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작가의 수줍지만 거침없는 말에는 흥의 미학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신명의 길을 계속 걷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엿보인다. 이러한 고백의 구석 저편에는 자신이 만든 그림마다 추억과 상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도 여전히 자신에서 울림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나는 그녀가 이러한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떠올렸다. 조각가 문신의 아내로서 그녀가 실천했던 내조자로서의 역할을 완수한 후 그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찾으려는 자성(自省)이 그것이다. 또한 몇 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병마를 마침내 극복하고 새롭게 펼쳐진 자신의 생을 찬미하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문신에 대한 의무로부터의 탈출 의지와, 고난 후 다시 찾은 새로운 삶에 대한 설래임이 내면에 잠들고 있던 예술창조의 흥과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최성숙은 금융업에 종사하던 부친과 서예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해 당대의 기라성 같은 화백들에게 배우며 화가로서의 꿈이 예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남편과의 이른 사별로 특이하게 굴절되는 운명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조각가 문신과의 인연은 그녀의 예술적 노정에 커다란 제동을 걸었다. 화가 최성숙은 노장 예술가의 아내가 된 것이다. “예술에 반해 결혼했지만 16년 동안 영감님 수발에다 성질부리는 걸 다 받아드렸지요. 이제 문신으로부터 탈출해도 좋아!” 이 말은 그동안 아내로서 충실했고 고인이 된 이후 문신예술 현양(顯揚) 사업에 몰입했던 자신에 대한 격려이자 이제 자신의 예술노정에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이 들린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면 자신이 일구어낸 예술적 성과도 적지 않았다. 문신의 커다란 그늘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일구어낸 예술적 성취를 보면 당대 최고의 선배 화가들로서 이성자, 박래현, 천경자의 뒤를 잇는 후배 세대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 대학에서 습득한 고래의 전통 화법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표현기법과 예술의지로 자기세계를 세운 작가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화가 최성숙이 화가의 길을 들어선지 어언 40년이 되었다. 1978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었던 제1회 개인전을 기점으로 삼아 헤아려 본 세월이다. 작가는 이 전시회의 제명을 <겨울여행전>으로 붙였다. 전 해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낸 후 33세의 나이에 나선 여행이었다. 이후 여행은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자연과 미물의 관찰에다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첫 개인전 이후 본격화 된 작가의 화업 노정 40년을 주제별로 간추려 분류해 보면 1. 산수풍경 2. 조충과 정물 3. 십이지신으로 대별될 수 있다. <산수풍경> 시리즈는 대학에서 착실히 습득한 전통기법을 바탕으로 자연이나 풍물을 추상적 양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때 추상적 양식이란 여행을 통해 현장에서 받은 감흥을 작업실에서 표현해 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종의 의사자연(疑似自然)으로서 전통 화도에서 착실히 연마한 점과 선을 활용해 자연 혹은 풍물을 화면위에 조형한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국내 산천뿐만 아니라 외국풍경에 이른다. <조충과 정물> 시리즈는 역시 작가가 자연과 일상에서 관찰한 나비와 사마귀 그리고 잠자리 등이 주를 이룬다. 추산동 연못에 봄빛을 받으며 서식하는 개구리와 근처 마당에서 키워낸 닭과 병아리를 그린 그림은 작가의 관찰과 몰입의 흥이 어우러지면서 완성된 수작이다. <십이지신> 시리즈는 작가가 어릴적 부터 배우고 익혔던 무용과 음악의 즐거움에 십이지 상징동물 형상을 연계시켜 그려낸 것이다. 동물을 의인화하고 희화해 묘사한 이 시리즈는 민족의 상징동물을 음악적 흥의 감성에 대비시켜 표현한 것이었다.   
   화가 최성숙의 예술 노정 40년을 정리한 이상의 세 주제별 시리즈는 표현기법의 측면에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산수풍경> 시리즈에서는 단면 화선지나 다면의 장지에 먹과 채색이 주가 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족자 형식의 화면을 도입하기도 한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 전통적 재료를 넘어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함으로서 재료와 형식의 경계를 벗어버리고 있다. 두 번째 <조충과 정물> 시리즈에서는 화선지 대신에 면직물의 일종인 소창(小氅)을 도입하기도 하고 아크릴 물감과 색연필을 사용해 화면 위에 다양한 질감의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모든 시리즈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화법은 다양한데 그 중 백묘법(白描法)이 작가가 즐겨 쓰는 것이라 한다. 세 번째 <십이지신> 시리즈에서는 캔버스에 아크릴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유화 액자를 도입함으로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강렬한 색채 대비에 단순한 화면구성 그리고 액자의 면으로 확장되는 선들이 화면에 입체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별 표현기법의 차이를 넘어 화가 최성숙의 작품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독자적인 조형세계가 있다. 화면 전체에 포진되어 있는 점들이 그것인데 이 화면을 채우는 점들은 작업과정에서 작가의 흥을 돋구는 요소로 작동한다. 풍경 위에 무수히 찍힌 점들은 흩날리는 눈송이거나 빗방울이 되기도 하고 낙엽이거나 여름의 햇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그녀가 화면 위에 찍어내는 점들은 춘하추동의 기운을 가시적으로 표상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화면에 투명 커튼처럼 드리워지면서 계절의 변화를 시각으로 체감하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 너머로 펼쳐진 산하나 숲 그리고 그 속을 뛰노는 사슴 무리들과 온갖 새들 그리고 인간들의 모습은 앞서 말한 백묘법 뿐만 아니라 구륵법(鉤勒法), 몰골법(沒骨法), 갈필법(渴筆法) 등 대학 졸업 후 동양화가로서 오랜 시간을 익혀온 조형방식들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그녀의 독자적인 작품에는 선의 강약이나 굵기 또는 거칠고 메마름 따위의 변화, 색채의 농담과 대비 등의 전통적 표현 기법이 여전히 남아 숨 쉬고 있다. 
                  
과거의 개인전 비평문 

   화가 최성숙의 전시회에 대한 당대 비평가들의 평문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평론가 김윤수 선생은 1978년 2회 개인전 서문에서 최성숙의 초기 그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 작품전(부부 2인전, 서울신문회관)에서는 ‘옛그림의 양식과 화법을 충실히 지키고 또 이어받으려는 면이 강했었고’, 두 번째 작품전(1회 개인전, 서울신문회관)에서는 ‘홀연히 옛그림에서 떠나 실경과 실물을 그렸고 참신한 감각과 활달한 필치의 밝고 산뜻한 화면으로 보는 이에게 신선한 감각을 안겨 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어지는 이번 세 번째 전시(2회 개인전, 불교회관)에서는 ‘옛 양식과 화법을 가려 익히고 스스로의 언어와 어법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다양한 재료를 통해 실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성격과 수련의 정도로 보아 적절한 것일지 모른다면서 주제의식과 실험의 애매성 그리고 성과의 자기화에서 결함을 극복할 것을 친절히 요청하고 있다. 
   1979년 선화랑에서 열린 4회 개인전 <독일의 인상>에서 평론가 이경성 선생이 쓴 서문의 내용도 비슷하다. 그는 ‘오늘의 한국동양화는 정신적 기술적 고민에 차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화려하고도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한 후, 이렇듯 내용 없이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동양화단에서 최성숙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자유롭고도 순수한 입장에서 자기의 작품을 추진하는 생생한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하고 진정한 화가로 성숙해 격조 높은 세계에 도달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5회에서 7회에 이르는 개인전에서는 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연거푸 서문을 썼다. 1984년 5회 개인전 서문에서 그는 「최성숙, 감흥의 자유로운 재구성」이라는 제명아래 ‘최성숙의 작품에 담긴 선명한 특질을 기법상의 세련과 표현감성의 예민함 그리고 주제 전개의 파격적 자유로움’ 등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그의 다감하고 경쾌한 선묘와 먹붓 구사, 그리고 변화 있는 색채 부여가 형상시키는 아주 특이한 수법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에게 놀라움과 주목을 산 것은 1979년의 3회 개인전 때였다’고 적고 있다. 1985년 6회 개인전 서문에서는 「최성숙의 매력-가식없는 자기몰입」이라는 제명아래 최성숙의 화면들은 볼수록 재미있고 기발하여 화흥이 넘쳐 있다고 상찬하면서 ‘그 화면들은 즉흥적이고, 회화적이고, 감각적이고, 환상적이면서 순수한 다채로움이 자유자재로 발휘되곤 한다’고 평하고 있다. 1987년 7회 개인전 서문에서도 「선명한 특질의 독자성」이라는 제명아래 최성숙의 작품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이구열 선생은 ‘그는 현실과 비현실을 마음대로 종합하는 복합적인 성향의 표현주의 화가’라 갈무리하고 있다. 
   14회 개인전 평문을 쓴 평론가 김복영 선생의 글은 작가를 이해하는데 유익할 것이다. 「십이지와 카프리치오의 제례에 바치는 헌사」라는 제명으로 적은 글은 최성숙의 작업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함께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맥락을 잘 짚어주었다. 2003년 금호아트갤러리 초대전 이후 화가는 십이지 상징동물을 화면에 등장시키고 그것을 대리 주체로 삼아 자신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솝우화가 동물을 빌려 인간사의 메시지를 잘 전달했듯이 최성숙의 근작은 사람 대신 용, 뱀, 닭,  쥐 같은 십이지 동물에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자유충동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87년 첫 개인전 이후 최성숙의 화력 40년은 <산수풍경>, <조충과 정물>, <십이지신> 시리즈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들은 특정 시기와 관계없이 일련의 시리즈를 이루며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가의 독자적 조형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서 올라오는 흥과 신명이 작가의 예술충동과 연계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세울 수 있었다. 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일찍이 정리한 것처럼 최성숙의 예술은 ‘기법상의 세련과 표현감성의 예민함 그리고 주제 전개의 파격적 자유로움’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러한 분석에 첨언하자면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자유로움의 원천이 우리의 전통적 미감인 흥과 연계되어 정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최성숙의 작품에 나타나는 ‘다감하고 경쾌한 선묘와 먹붓 구사, 그리고 변화 있는 색채 부여가 형상시키는 아주 특이한 수법’이란 흥이 신명으로 전환되어 표상되는 과정에서 얻은 작가의 미학적 성취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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