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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삶과 예술, 시메트리(symmetry)와 애시메트리(asymmetry) 사이를 보다

김영호

문신의 삶과 예술, 
시메트리(symmetry)와 애시메트리(asymmetry) 사이를 보다

김영호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I. 프롤로그
  예술가 문신의 일생은 모험과 도전의 삶으로 요약된다. 식민국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분단, 전쟁, 이산 따위로 얼룩진 격변의 근대사를 관통해 온 삶이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하지만 문신이 나고 자란 환경과 혈연의 내력은 남들과 크게 달랐다. 한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 잡은 해안도시 마산, 온갖 생명을 품은 갯벌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흩어진 섬들을 끌어안은 수평선과 그 너머 대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소년 문신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꿈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낙천적이면서 성실한 기질의 아버지와 그 식민지 노무자와 결혼한 일본인 어머니의 애틋한 사연은 소년 문신에게 유전되어 모험과 도전의 동력으로 어느덧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모험과 도전의 행보는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문신이 인생 노정에서 이룩한 예술적 성취는 자연의 원형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세계였다. 때로는 자연물을 상기시키는 형상의 세계이자, 유기적인 선과 볼륨의 형태로 표현된 순수 추상의 세계이다. 그것이 이른바 문신이 발견한 ‘시메트리의 미학’이다. 그는 생명의 원형적 구조를 대칭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연히 파생되어 작동하는 비대칭적 형태들을 탐구해 나갔다. 이러한 대칭과 비대칭을 융합시키는 조형방식은 문신에게 새와 물고기와 개미 같은 미물을 리드미컬하게 표현하는 미학적 준거가 되었다. 문신이 제시한 시메트리의 미학은 주변의 예술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유럽의 작곡가들에게 전달되어 다수의 헌사곡이 태어나게 되었다. 문신은 갔지만 그의 예술은 그가 남긴 조각과 음악의 선율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II. 문신의 일생   
  문신은 1923년 일본국 큐우슈의 탄광촌에서 광부로 일하던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의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문신의 가정은 대외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유년시절은 고독을 벗 삼는 삶으로 고착되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의 특수 상황에서 나고 자랐으나 악기를 다루고 자유분방한 기질의 선친은 문신의 미래 삶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문신이 5세가 되던 1928년, 일시 귀국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마산에 정착하지만 일년 뒤에 두 형제는 할머니 손에 남겨지고 다시 도일한 부모와는 생이별이었다. 마산의 바닷가와 야산은 그에게 있어 놀이터 이상의 공간이었고 그 안에 서식하는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관찰은 후에 예술가의 길을 닦는 바탕이 되었다. 부모와의 이별과 고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운명에 순종하며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돌릴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15세가 되던 1938년, 문신은 어머니의 나라로 밀입국을 시도했다. 몇 해 전 영구 귀국한 아버지에게도 비밀에 부친 무단가출이었다. 당시 그의 밀입국을 곁에서 도왔던 보통학교 동창이자 일본 유학생이던 친구 서두환과 찍은 기념사진 속의 표정은 호기롭기만 하다. 일본에 도착한 문신은 동경의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수학하면서 유럽의 근대미술 기법을 습득했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의 행보나 미술학교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당시에 사진 몇 점과 1943년에 그린 <자화상> 등의 그림들은 그의 강인한 성품과 예술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문신은 마산과 부산 그리고 서울 등지를 떠돌며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의 그림은 정물에서 인물 그리고 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택하고 있다. 기법 역시 유화와 판화 등 다양하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의 대열에 있던 길진섭은 1948년 서울의 동화화랑에서 열린 문신의 첫 개인전 서문을 썼다. 여기서 그는 문신을 ‘낡은 사상과 양식의 허의를 버린 솔직한 소박성의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 시절 문신의 작품은 자유분방한 필치와 강한 색채대비 그리고 파격적인 화면구성의 표현주의적 성향을 담아내고 있었다.  
   문신은 38세가 되던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파리에 정착했던 화가 김흥수의 도움으로 얻은 라브넬 고성(古城)의 보수와 개조 작업은 그의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고성의 보수작업은 3차원의 조형세계에 대한 감각의 돌기를 열어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문신은 추상적 형식의 조각과 더불어 그의 미학적 근간이 되는 시메트리 구조의 작업을 시작했다. 낭만성이 깃든 유목적 기질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 사이에 제작된 <우주를 향하여>라는 시리즈의 그림과 조각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흑단 목조는 이 시기 그가 선택한 주 재료였다. 문신이 국제조각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970년 남부 지중해 연안의 포르 바카레에서 열린 국제조각심포지움에 참여하면서 였다. ‘모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초대전에서 그는 13m의 거대한 토템조각 <태양의 인간>을 현지에서 제작했다. 1980년 영구 귀국할 때 까지 20여 년 동안 문신은 조각가로서 명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열리는 <살롱 그랑 에 쥔느 도주르디>, <살롱 드 메>, <살롱 드 마르스>, <살롱 콩파레종> 등에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는 ‘노예처럼 일하고 신처럼 창조하는 삶’을 살았다. 
  1979년 문신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독일에서 유학중 파리에 들린 23세 연하의 여인 최성숙과의 만남이었다. 부친에게 받은 기질과 프랑스의 자유분방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문신은 이미 두 차례 결혼의 파경을 경험한 상태였고 1967년 프랑스로 출국해 파리에 정착한 이후 독일인 여성을 만나 10년 넘게 동거해 왔다. 최성숙과의 인연은 그의 남은 인생을 고국에서 준비하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1979년 5월 반포동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인 198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5년간은 문신의 생애에 있어 가장 활발히 작품 제작에 몰입한 시기였다. 미술계는 그의 명성과 노력에 보답하고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국제 야외조각전을 계기로 세워진 22m 높이의 <올림픽 1988>은 귀국 후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태양의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구형의 덩어리가 12단계로 반복되어 오르면서 탑모양을 이루는 조형물이었다. <올림픽 1988>은 38개의 반구형 볼륨이 반복적 패턴을 유지하는 높이 25m의 기념비적 작업이며 당시 파급되기 시작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함으로서 환상적인 다이나미즘의 세계를 연출해 내었다. 이 작품에 대해 프랑스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우주와 생명의 음률’이라는 문귀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신은 추산동에 자리잡은 작업실 공간에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던 중 1995년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그가 세운 문신미술관은 현해탄에서 태평양을 건너 유럽대륙으로 이어지는 그의 유목적 삶을 위로하는 안식처가 되었다. 

III. 자연과 생명의 시메트리          
  앞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조각가 문신 예술의 성과는 시메트리와 애시메트리 구조 사이의 울림에서 발견된다. 자연의 원형적 구조로서 대칭과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생명의 비대칭적 형태 사이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울림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 질서와 그 원형이 파생되어 만들어내는 우연한 현상 사이의 울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것들과 땅에서 솟아나는 미물들은 모두 시메트리의 원형적 구조를 근간으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로부터 크게 벗어나면 그것은 비정상의 존재로 분류되거나 소외시켜 왔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자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메트리의 구조는 생명을 받아 성장하면서 다양한 애시메트리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생명 현상이라 부르는 것은 이렇듯 시메트리와 애시메트리 사이의 진동이 만들어내는 유기적 진화의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새의 날개가 진화하여 다양한 조류가 등장하고, 쌍떡잎이 영겁의 시간을 품으며 다양한 식물군이 모습을 갖추듯 시메트리는 애시메트리와의 비밀스런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생명의 현상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시메트리와 애시메트리의 원리는 인간의 모습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좌우 대칭의 신체와 좌우 대칭의 얼굴이며 좌우 대칭의 손을 가진 것이 인간의 몸이다. 그러나 조물주가 창조해 낸 시메트리의 원형적 구조는 시공간의 조건 속에서 그에 역행하려는 애시메트리의 우연성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와 우연의 차이는 다양한 인간의 개별적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구촌을 살고 있는 70억의 인구 중에 동일한 모습의 얼굴을 가진 개체를 우리는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위대한 자연은 스스로를 대칭의 세계로 규정하고 있지만 비대칭의 차이를 통해 다양한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 내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시메트리와 애시메트리 사이에 형성되는 조형의 원리를 균형, 조화, 통일, 리듬 따위의 개념으로 정리해 왔다. 그리고 그 조형원리는 동서고래의 시공을 초월해 다양한 유형의 예술 작품에 운용되면서 예술가들에게 독자적인 성취를 이루어 내게 하였다.    
  문신이 작고한 지 12년이 되는 2006년, 독일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 문신의 조각전이 도심에 3개월 동안 열렸다. 이 전시회는 독일 현지의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켰고 몇몇의 음악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작곡가 보리스 요페는 문신 추모곡으로 <달의 하나 됨과 외로움>이라는 실내악을 작곡해 헌정한 것이다. 또한 안드레아스 케어스팅은 문신의 작품 <和 II>를 주제로 대규모의 관현악곡을 작곡해 헌정했으며 이 곡은 국립 바덴바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문신의 작품에 대한 독일 음악인들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볼프강 마쉬너는 <예술의 시메트리>라는 제명으로 문신의 작품구조를 음악적으로 번안해 헌정곡을 내었고 2008년 서울에서 공연되었다. 문신을 위한 실내악단 ‘앙상블 시메트리’가 조직되었고 순회 연주회를 갖게 된다. 이 아름다운 조각과 음악의 융합은 미술의 역사에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조각과 음악이 지닌 공통적 비평원리로서 시메트리의 구조가 만들어 낸 융합의 사건이었다. 예술의 영역에서 통용되는 균형, 조화, 통일, 리듬 등은 시각예술과 청각예술의 장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적 감흥을 제공하는 공통의 원리로 작동했다. 유기적 볼륨과 선묘가 만들어 내는 신비의 형식, 이것이 바로 음악과 조각을 아우르는 시메트리 의 형식이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고 2008년, 마산(창원)에서는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조각심포지엄이 내건 주제는 ‘시메트리와 애시메트리’였고 10명의 국제적 작가들이 초대되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제작된 그 결과물로 추산공원에 국제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조각심포지엄에 참여한 조각가들은 미국의 로버트 모리스와 데니스 오펜하임, 영국의 피터 버크, 프랑스의 장뤽 빌무스, 일본의 세키네 노부오와 가와마타 타다시, 중국의 쉬빙과 왕루엔 그리고 한국의 박종배와 박석원이었다. 이 사업은 문신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 낸 시메트리 미학의 국제적 확산을 위한 것이었다. 외국에서 모험과 도전을 시도했던 문신의 예술적 이상은 이제 추산공원의 국제조각공원에 자리잡게 되었다. 문신의 현양사업은 창원국제조각비엔날레로 틀을 달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IV. 에필로그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각가 문신의 예술세계는 시메트리의 미학으로 정리된다. 그것은 유년기에 경험했던 바닷가 미물들에 대한 관찰과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유목적 인생노정에서 일구어 낸 개인적 성취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조각가 문신을 있게 했던 시대의 성취였다.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기록은 식민, 해방, 군정, 전쟁, 재건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대한 기록이었다. 문신의 예술은 방황과 시련의 세월을 극복하고 초월적 자연과 우주의 운행을 주도하는 절대에 대한 탐구와 그 유출의 법칙을 따르는 생명현상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인공지능과 로봇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 불리우는 작금의 상황에서 문신이 남긴 결실은 이제 상생과 관계의 원리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작가가 떠난 지금 그가 남긴 시메트리 미학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문신 회고전 도록 서문,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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