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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옥란 / 트랜스 휴먼 – 관계의 예술

김영호

기옥란 / 트랜스 휴먼 – 관계의 예술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2006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옥란의 작업 성향은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구상과 추상 그리고 오브제(콜라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거치며 왕성한 창작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무등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계기로 나는 최근 그녀의 작업을 기법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범주로 구분한 바 있다. 1. 유기적 생체기관을 연상케 하는 인체를 자유분방한 터치와 색채 그리고 강한 선율로 표현하는 방식. 2. 인물의 외상을 복수 시점에서 바라보고 기하학적 형태의 색면으로 분할 한 후 화면에 봉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이른바 입체주의적 방식. 3. 컴퓨터 자판이나 전자부품 따위의 오브제를 화면에 콜라주해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티를 생경하게 드러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 모든 방식들은 작가가 채택한 하나의 예술적 지향점으로서 ‘트랜스 휴먼’, 즉 인간 존재를 존중하면서도 관습의 굴레를 벗어난 유토피아적 인간상을 표상하기 위한 목적에서 채택된 것들이다. 자유롭고 다양한 기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디지털 미디어와 소통의 시대가 이끄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희망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2017년 후반 이래 기옥란의 조형방식은 다시 한 차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서 제시한 세 개의 기법적 범주에다 하나를 추가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4. 한지와 나무,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따위의 재료를 이용해 조형적인 측면을 강조한 콜라주 작업의 방식이 그것이다. 컴퓨터 자판과 전자부품들에서 오는 기호적 의미들이 축소되고 그 대신 여백과 재료의 물성을 통한 조형 작업에 관심이 쏠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조형방식의 변화는 향후  작가의 조형세계를 독자적 영역으로 이끄는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난 제3차 산업혁명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넘어 이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미래학자들은 디지털과 컴퓨터 미디어에 기반한 소통(communication)의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과 로봇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관계(relation)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기옥란이 채택한 ‘트랜스 휴먼’ 역시 이제 컴퓨터 미디어의 소통을 반영하는 의미론적 차원을 넘어 새로운 세대에 인간에게 닥쳐올 새로운 도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성찰의 단계로 접어들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화가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소명은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에 부응하기 위한 예술적 방식의 표상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기도 하다.

최근 기옥란이 실험하고 있는 조형방식은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재질의 인공오브제와 더불어 나뭇잎이나 한지 그리고 천이나 목재 같은 자연오브제를 화면에 콜라주하는 것이다. 잎맥의 드러나 보이는 나뭇잎이나 한지의 펄프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조형미는 바코드의 기하학적 패턴이나 레이저 커팅으로 디자인된 스테인리스 가면들과 더불어 융합적 관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융합적 세계는 그녀가 천착해 온 트랜스 휴먼의 세계일뿐만 아니라 인공지능과 로봇테크놀로지로 대변되는 작금의 시대적 성찰의 화두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렇듯 작가가 채택하고 있는 화두는 동시대의 기술과 인문학적 성찰의 주제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소통’의 담론을 넘어 ‘관계’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동시대 철학의 담론들이 그녀의 작품을 통해 조형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재료의 사용에다 새로운 산업용 소재를 사용하여 동시대의 담론을 지향하며 이를 조형실험의 차원에서 추진하려는 의욕이 어떤 예술적 성과를 낼지 기대되는 것이다. 

2017년대 후반에 제작된 작품 시리즈인 <관계와 소통을 위한 변주곡>, <공간을 위한 변주곡>, <공간에 대한 사유>, <트랜스 휴먼> 등은 개념적인 측면에서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관계’는 인공지능과 로봇테크놀로지 시대의 대표적인 키워드로 제시될 수 있는 인문학적 개념이다. 이때 관계는 ‘소통’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함의를 지닌 단어로 다루어진다. 이른바 소통이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나타내는 중심개념의 하나로 왕래, 교류, 교통의 의미로 제시되었고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의미를 품게 되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증대되었다. 개인정보 노출에 따른 인권의 침해나 정보의 무차별적 유통에 따른 사회적 부담이 증가되고 있는 현실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소통의 시대를 대체해 새로운 담론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관계’는 정보의 역기능을 보완해 줄 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이 서로 관련을 맺는 것을 의미하는 관계는 작가의 작품 생산과 해석을 위한 좋은 키워드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 

21세기는 소통의 시대를 넘어 관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니콜라 부리오의 말처럼 관계의 미학은 불안정한 공동체로서 인터넷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보완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 인종과 인종의 관계, 종교와 종교의 관계가 모두 융합적인 관계이자 창의적인 관계로 변화해야 할 시대라면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그 주제가 남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시각예술의 범주에서 관계는 화면의 구성으로서 선과 색의 유기적 배치 혹은 도입된 자연오브제와 인공오브제의 조화로운 배치에 의해 조형의 원리로 다시 태어난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으로서의 관계의 의미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소통의 차원을 넘어 융합과 통합 그리고 화합이라는 정신적인 차원으로 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관계의 예술은 조형적 성찰의 아우라에 힘입어 인터넷 문화를 반영하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루는 대안적 장치가 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기옥란의 작업은 ‘트랜스 휴먼’이라는 화두에 힘입어 다양한 조형적 실험과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세계의 다양성과 실험성은 우리시대에 진행되는 복잡성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고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미래 지향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로서 그녀가 지닌 가능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작가가 추진하는 현재 진행형의 조형적 실험과 인문학적 성찰의 순간들은 항구적 작품으로 표상되어 남게 됨으로서 영원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형예술가들에게 주어진 특혜라면 특혜이다. 시대가 지나고 난 어느 시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오브제로 남게 될 작가의 작품은 당대의 시대적 화두에 대한 성찰의 흔적이자 고민의 자취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완성은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 대한 성찰과 표현에 의해 역사는 진보되어 왔다는 것을. (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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