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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초청 작가와의 대화- 제주미술과 시대정신

김영호

<평론가 초청 작가와의 대화> 


제주미술과 시대정신   

김영호(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2017.12.05. 서귀포예술의전당 

I.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제주정신’전에 관한 기획서를 접하고 내용을 일관해 보니 필자에게 한 단어가 새삼 눈에 띤다. ‘시대정신’이 그것이다. 이 단어는 이번 전시회의 기획 의도가 제주작가 22인의 작품들을 통해 ‘제주의 시대정신’을 살펴본다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특정 전시회에서 시대정신을 찾겠다는 기획자의 야심찬 의도에 공감한다. 그리고 원로·중견·신진을 망라한 출품 작가들의 명단을 보면서 그들의 작품에서 시대정신의 표상 내용은 무엇이고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어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는 원어로 통용되기도 하는 시대정신은 시간(Zeit)과 정신(Gaist)의 합성어로, 한 시대를 특징짓는 지적, 정신적, 문화적 동향을 지시하는 말이다. 철학에서는 독일 관념론자 헤겔이 주창한 시대정신 개념은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 정신‘이자 ‘한 시대가 끝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정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다 : “누구도 그가 사는 시대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시대정신(Zeitgaist)에 따라 행동한다”. 각 시대의 생각과 관심이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세계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었다. (시대정신 개념의 근원은 좀 더 거슬러 오른다.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가 제시한 ‘민족정신’ 개념이 그것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민족정신을 세계정신의 현상으로 확대 파악한 것이다.)  

인터넷 정보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자이트가이스트라는 용어는 미디어 분야에서도 예외 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바로 ‘구글 자이트가이스트(Google Zeitgeist)’이다. 매일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백만 건의 검색어들을 종합적으로 집계 분석하여 특정 년대의 이슈와 관심사 그리고 이벤트 따위를 검색어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지적, 정신적, 문화적 동향으로서 시대정신은 웹사이트 검색어의 빈도수를 기준으로 설정되는 것을 아닐 것이다. 검색어의 빈도수는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의 특정 경향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지향을 파악하는 지표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구글 자이트가이스트의 사례가 보여주는 교훈은 정보시대에 시대정신의 발현은 대중적 관심과 소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이트가이스트가 예술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용어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독일을 비롯한 유럽지역 국가와 미국에서 열리는 ‘서사적인 형상미술’ 경향을 보이는 일련의 국제전을 <자이트가이스트>라 부르면서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프랑스의 자유구상, 이태리의 트랜스아방가르드, 미국의 배드페인팅 따위의 신형상 미술이 국제적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른바 자이트가이스트 담론의 성과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발족한 ‘현실과 발언’이나 ‘임술년’과 같은 민중미술 그룹의 경향 역시 이러한 자이트가이스트 개념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급기야 2013년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기념전시에 <자이트가이스트 코리아>라는 전시제목이 붙었다. 이 전시회의 기획자는 출품작들의 유형을 ‘형상적 이미지로 시대적 리얼리티를 담은 작품들’ 뿐만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의 현대추상 작품들’과 ‘형식과 매체를 넘나들며 물질에 천착한 작품들’을 모두 아우르며 전시함으로써 시대정신의 본 개념을 드러내는데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이트가이스트라는 용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II.
제주미술에 있어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번 기획전 <제주정신>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제주의 시대정신을 품고 있다 할 때 내세울 기준이란 어떤 것인가? 

시각예술 분야에서 표상되는 제주정신이 제주의 자연과 역사에서 연유된 것이라 할 때 첫 번째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람, 물, 돌, 오름, 동굴, 곶자왈, 신화, 무속, 항쟁, 유배, 해녀, 방언 따위의 소재들이다. 제주미술인들은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제주의 정체성을 구현하거나,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추구하거나, 대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하거나, 지역공동체를 결속하거나, 세계화를 지향하는 등의 과제를 수행해 왔다. (이는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가 공포된 이후 2004년 ‘제주향토문화예술진흥중장기계획’을 수립하면서 내세운 기본방향) 한편 2004년 제주도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바람의 신화 2004-제주현대미술전>에 출품작들을 보면 55명의 작가들 대부분이 다양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재들을 채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번 <제주정신>전에 출품된 22명의 작품들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추상적 형식과 기호학적 방법론을 내세운 작품들의 경우도 다수 있으나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 섬의 자연과 제주의 역사에서 연유된 소재의 은유와 상징 그리고 알레고리를 통해 제주정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드러내는 형식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작가가 채택한 소재로서 자연 혹은 역사적 사건의 근원을 따져 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연과 역사의 원인을 알고 그 맥락을 이해하면 소재에 대한 나름의 주체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그 관점을 최적의 질료와 형식으로 표상하는 방식을 실험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가 만들어 지는데 그 성과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작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 특정 작가의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형식은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관점과 식견이 특정한 형식논리를 통해 표상될 때 모습을 갖추게 된다. 가령 제주의 바람을 그리는 경우 바람의 속도와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추상적 개념의 발현이 자신의 선택한 소재와 부합되기를 희망하면서 실험과 모색을 계속해 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작품은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정시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며 이를 시대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결실이 얻어질 것이다. 

이상을 요약해 말하자면 예술에 있어서 시대정신의 표상은 자연과 역사를 품은 소재의 발견과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형식 논리를 실험하고 개발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번 제주정신전에 출품된 작가와 작품에서 시대정신의 내용과 형식을 읽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출품작가 : 이왈종, 고영만, 고순철, 김현숙, 박성진, 강민석, 김성오, 양재열, 오민수, 강태환, 김현수 / 강요배, 고영우, 현충언, 이창희, 박순민, 강태봉, 강문석, 이승수, 한아, 신승훈, 허문희) 

III. 
앞서 언급한 내용(소재)과 형식(기법) 외에도 시대정신의 표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미술사가이자 미술평론가로서 역사기술과 비평 활동에 참고해 오고 있는 기본적 요소들이다.     

① 동시대의 시간성을 품을 것. 작품에 표상되는 시대정신이란 과거 시간의 정신이 아니라 현재 시간의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눈으로 자연이나 신화 혹은 역사를 해석하고 표상하는 것이다. 가령 제주의 한라산 자락과 오름에 핀 야생화나 곶자왈의 풍경 또는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나 민중 항쟁을 소재로 표상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을 소재로 택한 화가의 눈과 정신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을 딛고 있어야 한다. (일제 식민지하의 향토주의나 소재주의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것은 바로 동시대적 시의성이 결여된 주제의식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의 시간성이 요구되는 것은 비단 주제의식 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처럼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형식과 기법의 창의적 속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제의식과 형식의 창의성은 물론 작가의 세계관과 작품 성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② 역사주의적 맥락을 따를 것 : 시대정신의 표상을 위한 또 다른 기준은 역사주의적 맥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주의적 맥락이란 시간성의 의미와 관계가 있다. 동시대적 시의성을 지닌 어떤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맥락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 때 역사주의적 관점이란 특정 대상 혹은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고 그 의미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가령 4.3 사건이나 항쟁의 역사를 소재로 삼을 경우 조사와 기록에 근거해 당시의 객관적 사실을 묘사해야겠지만 재현의 과정에는 한계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모든 표상 작업은 기본적으로 환영에 기초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창작의 주체로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을 따른 다는 것은 바로 작품의 창작과 해석의 활동이 유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나 감상자가 특정한 사상의 울타리에 갇혀 유기적 구조를 보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역사적 맥락을 따른다는 것은 열린 구조로서 소재를 파악하고 자신의 어법에 맞는 형식을 실험하며 창작에 임한다는 것이다.     

③ 인류 보편적 가치를 가질 것 : 시대정신은 특정한 시간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지만 동시에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닐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의미가 주어진다. 제주만의 자연이나 전통문화의 독특함만을 강조해서 자이트가이스트의 가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지역적인 것이라 해서 곧바로 세계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철학자 윤용택 교수의 지적은 타당하다. 제주의 자연으로서 바람, 돌, 바다, 말, 폭포 따위의 주제를 그림으로 그려낸다 해서 제주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주제가 그림으로 표상될 때 거기에 개입되는 것은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이다. 보편적 세계관, 즉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입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비평의 사례를 피카소의 <한국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비평되는 요소는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을 살육하는 사건에 대한 서술적 묘사를 넘어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자행되는 집단적 폭력과 무차별적 살육에 대한 고발의 시각이다. 

이상에서 보듯 제주의 시대정신을 모색하고 작품으로 구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대정신을 모색하고 구현하는 일은 제주미술가들에게 부여된 소명일 것이다. 시대정신의 모색 과정에서 공동체의 결속과 딛고 있는 땅의 주인의식이 생겨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제주의 환경에 따라 위기의 상황에 놓인 제주의 정체성,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은 제주미술인들에게 부여된 당면 과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 기획안에 제시된 3개년 목표는 필자의 눈에 새삼 들어온 또 하나의 화두가 되고 있으며 나는 이것에 공감하고 적극 지지한다 : 제주미술에 대한 인식전환(2017) -> 제주미술활성화 및 지역교류(2018) -> 외국전시 모색 및 커뮤니케이션 강화(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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