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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상 미술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

신형상 미술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미술사가, 미술평론가)

미술사에 있어 오래된 화두이자 시대를 따라 변해온 미학개념의 하나가 이미지(image)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imitation)으로 정의되던 시절, 이미지는 실재 세계와 대비되는 감각의 영역으로 낮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이미지란 화가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리는 기법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그 가치는 전에 없이 높아졌다. 이른바 순수의 시대에 회화의 목적은 현실 너머에 숨겨진 어떤 비밀스런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고 현대에 들어와서 이미지는 실재 세계를 반영하는 허구의 차원을 넘어 이미지가 곧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추세가 만연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미지는 실재와 가상의 이분법적 구분의 경계에 위치해 문화 주체들의 시각체계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번 필갤러리 3인전에 초대된 세 명의 작가인 주태석, 이종구, 정영한은 이미지에 대한 해석의 틀을 자신의 개성적 어법으로 세우고 있는 분들이라는데 공통점을 두고 있다. 한국미술사의 맥락에서 각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데 묶어 작품전을 열게 된 것은 이미지라는 교집합이 주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태석은 극사실 회화의 주역의 한사람으로, 이종구는 민중미술의 주역의 한사람으로 한국미술사에 족적을 뚜렷이 남긴 작가들이다. 게다가 정영한은 이들의 아래 세대에 속하는 작가로서 선배 세대와 더불어 신형상 미술의 계보를 만드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인의 화가들의 근작을 통해 작가의 노정을 살피는 일은 신형상 미술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해준다.  

주태석, 자연.이미지, 120x60cm, Acrylic on Canvas, 2017 


주태석은 1970년대 후반부터 철도를 소재로 택하면서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국의 극사실 회화 운동에 합류했다. 그가 그린 <기찻길> 시리즈는 이전의 선배화가들이 그린 구상화풍의 그림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정밀하게 묘사된 철로나 부목은 평면적 시점에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전체에 깔려있는 조약돌 역시 크기나 묘사방식에 있어 균질한 위상을 지닌 채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는 시각체험을 자극하는 원근감도 배제되어 있으며 거대한 철로의 단면만이 화면에 익명적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가 그림에 끌어들인 철도 이미지는 통속적 풍경의 차원을 넘어 인식적 일루전 혹은 의사자연(擬似自然)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로 들어와 주태석은 그림의 소재를 자연으로 바꿨다. <자연-이미지> 시리즈로 명명된 그림에는 자연의 외관을 재현하는 시도를 넘어 정갈한 색채와 명암의 효과를 극대화시킴으로서 이미지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자연스런 것이었으나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리는 기법에서 독자성이 한층 심화된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주태석의 작품에는 신화나 역사와 같은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림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감관지각과 감관표상 자체에 겨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이 시각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빛과 그림자의 작용에 따른 것이며 이러한 시각체험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작가는 감각된 이미지를 화폭에 토해 냄으로써 현실로서의 자연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태석이 그린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는 정의하기 어려운 비밀스런 간극이 존재한다. 작가는 자연풍경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풍경에 대한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드러내는데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그리기 방식은 전통적 묘사방식을 부정하고 사유의 이미지라는 본래의 시각경험을 풍경을 빌어 회복하는데 있다.  

이종구, 화왕산 관룡사, 73x117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9


이종구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작가로서 농촌의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제시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의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1984년에 결성된 임술년 그룹에 도시풍경을 선보인 이후, 이종구의 작품세계는 고향땅 오지리, 고개 숙인 농민의 분노, 희망의 씨앗과 같은 비평어휘들로 일관되어 왔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이종구는 자신의 예술적 주제의 범주를 농촌에서 국토로 넓히며 새로운 경지를 담은 <백두대간>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농토와 대지를 그리던 이종구에게 백두대간은 기존의 주제를 확장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자 자연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백두대간은 땅에 대한 시선이 미시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인 차원으로 발전된 것이다. 국토 명산을 탐방하게 되면서 작가가 경험한 사찰과 석탑들의 감흥은 이후 작가의 예술적 행보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주었다. 최근의 그룹전 ‘한국현대미술의 눈과 정신2-리얼리즘의 복권’을 계기로 쓴 작가론에서 나는 그의 월하산사(月下山寺) 신작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푸른 밤, 바람마저 잠들어 적막한 산중. 달빛 아래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가 쉬는데 이 적막을 비추는 석등은 생명의 골짜기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신령스럽다. 화면 전체를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밤으로 이끄는 것은 물론 산야를 비추는 보름달이다. 하늘과 산의 경계를 가르는 능선을 따라 섬세하게 그어진 달빛의 선율은 세밀한 작가의 심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빛의 선이라 할까 아니면 선의 빛이라 할까. 골짜기를 흐르는 수면에 투사된 달빛의 광휘는 천년 암벽의 실루엣과 더불어 보는 이를 신비의 영역으로 이끈다. 달빛이 석탑이나 삼존불 그리고 사찰의 용마루에 비추어지면 그것은 부처의 아우라가 된다. 노랑과 파랑의 보색 대비효과는 그의 그림에서 시각을 영적인 차원의 세계로 변주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달마산 미황사 마당에 새벽이 찾아오면 때맞추어 응답하듯 마당을 밝히는 석등이 달과 교신하며 자연의 메시지를 받아 대지로 전파한다. 잠시 후면 그림 밖의 산 아래에서 새벽 닭이 울 것이다.” 

정영한, 우리時代 神話 Myth of our time, 162.1X97.0cm, oil on canvas, 2014

           
정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공모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당시의 국내 화단은 모더니즘 계열과 민중미술의 계열이 대립적 구도가 심화되면서도 이러한 화단의 이분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실험적 경향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있던 때였다. 극사실 회화를 비롯한 리얼리즘 계열과 페미니즘 미술, 그리고 영상 미디어의 총아로서 컴퓨터가 새로운 예술로 흐름을 형성하면서 미술계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정영한은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의 뒷받침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2000년대 극사실 회화 물결의 중심에 있었다. 이른바 정영한은 한국 극사실 회화의 2세대를 형성하는 자원이 되었다. 1970년대의 극사실 회화가 주로 도시산업사회의 일상적 단면들을 담아내었다면 2000년대의 극사실 회화는 디지털 미디어로 파생된 이미지와 그 시각적 표현에 관심을 두었다. 소비사회에서 정보화시대로의 진입은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등이 탄생시킨 가상 이미지에 대한 관심으로 정리될 수 있다. 원상이 없는 이미지로서 시뮬라크르가 양식화 되고 있었다.
정영한이 일관되게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풍경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허공에 거대한 꽃이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고 있다. 때로는 고대 석조유물이나 마네킹 같은 상징물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려진 이미지는 사물의 재질감은 물론 중량감을 품고 있다. 파도를 일게 하는 바람과 촉촉하게 젖은 이파리는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감각의 돌기를 자극한다. 그의 캔버스에 그려진 파도나 거대한 꽃의 이미지는 배열된 문자와 더불어 이미 통속적 모방과 재현의 양식을 부정하고 있다. 낯선 공간으로 전치(depaysement)된 사물과 언어들이 이미지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며, 재현된 이미지들을 통해 현실이 추상적으로 각인되는 지각의 전도를 유도하고 있다. 정영한의 작업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걸맞는 회화의 유형으로 정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미지-시대의 단상> 혹은 <우리시대의 신화>라는 제명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정영한의 작품이 동시대의 리얼리티에 대한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상에서 보듯 이번 3인전에 초대된 작가들은 감관지각과 이미지에 기초한 신형상 미술의 범주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이미지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2010년대 들어와 문화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예술의 본성에 대한 물음이 다시 제기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이미지를 둘러싼 질문이 주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번 필갤러리에서의 3인전은 1970년대에 태동되었고 2000년대에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맞은 리얼리즘 혹은 신형상 미술의 새로운 국면을 가늠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3인전에서는 두 명의 선배화가가 고향을 등지고 다시 서울로 귀경한 후배의 미래를 위해 건네는 충고와 격려의 따스함도 함께 느껴진다. (2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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