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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야수파 화가 블라맹크의 삶과 예술 :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2017.6.3-8.20)

김영호

프랑스 야수파 화가 블라맹크의 삶과 예술 :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2017.6.3-8.20)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I.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k, 1876-1958)라는 이름에는 '강렬한 원색과 자유분방한 필치로 마티스(Henri Matisse)와 함께 야수파 운동을 이끌었던 프랑스 화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프로 레슬러를 연상케 하는 우람한 체격에다 불 같은 성격 때문인지 '야수파 중에서도 가장 야수적인' 기질의 화가로 불리우기도 한다. 블라맹크의 예술세계가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에 대해 쓴 무수한 비평문들을 종합해 정리하자면 '색채의 해방'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야수파 동료들과 더불어 추진했던 색채의 해방이란 색채의 자율성, 즉 풍경이나 인물 따위의 대상에 종속된 색채로부터 벗어나 색채 자체가 지닌 고유한 속성을 표현의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서술적 묘사 없이 소리로 감동을 주는 음악처럼 색채가 주는 자기 충족적 표현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던 '재현'의 책무로부터 해방되어 '표현'으로서의 예술을 실천했던 야수파의 작품들은 서구 모더니즘 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야수파는 짧은 기간의 운동이었지만 곧이어 바통을 넘겨받은 추상미술을 거쳐 추상표현주의와 색면추상 그리고 미니멀 아트로 이어지면서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에 중요한 원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블라맹크의 예술세계는 통과해야 할 관문의 하나가 된 것이다.  

1904년 이래 화산처럼 폭발했던 야수파의 생명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색채에 대한 집단적 열정이 포화점에 도달하면서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블라맹크의 경우 1907년 부터 초기 야수파의 화풍은 일시에 사라진다. 화려한 원색의 향연으로부터 벗어나 엄격한 구성과 어두운 청색을 기조로 한 견고한 화면구성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영향에서 벗어나 세잔(Paul Cézanne)의 영향에 따른 결과로 평가되기도 한다. '거칠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우울한 색조의 입방체가 부조리하게 어우러진 세계', 이는 블라맹크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였다. 1910년 이후의 그림에는 눈이 쌓이고 스잔한 날씨의 마을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강한 명암 대비와 원근감을 보이는 사선구도를 사용해 거칠고 적막한 농촌의 서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에 블라맹크가 표현하기를 원했던 것은 '회화적 진실'을 넘어선 '인간적 진실'의 세계였을 것이다. 인적이 없어 텅 빈 도로의 끝은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노정으로 다가온다. 폭우가 몰아치거나 거칠고 흐린 날의 마을 풍경은 화가의 내면에 흐르는 실존적 불안의 삶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현대적 삶의 열정과 자유의지에 스며들어 차오르는 불안감, 그것은 다가올 두 차례의 전쟁에 대한 예견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 블라맹크가 화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23세가 되던 해에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을 만나면서 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블라맹크는 1900년 파리 근교의 마을 샤투(Chatou)에 작업실을 빌려 이 마을 토박이인 드랭과 함께 지내면서 그와 더불어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미술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독학 화가였지만 실험과 모험의 도시 파리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화가들의 삶은 그의 노정에 더없이 귀한 견인차가 되었다. 1901년 블라맹크는 파리에서 열린 반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그의 화풍에 매료되어 굵고 빠른 필치와 두터운 채색의 화풍을 받아드렸다. 여기에다 화가 자신의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기질이 합해 지면서 표현력이 넘치는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급기야 드랭을 통해 알게 된 마티스의 권고로 1905년 '살롱 데 장데팡당(Salon des  Indépandants)'과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 출품함으로써 그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3회를 맞은 살롱 도톤느에는 마티스와 드랭 외에도 뒤피(Raoul Dufy), 루오(Georges Rouault), 브라크(Georges Braque) 등이 참여했다. 가을에 열려 '가을 미술전'이라 이름이 붙여진 이 전시회를 찾은 평론가 루이 복셀(Louis Vauxcelles)은 출품된 일련의 청년작가 작품을 한데 묶어 '야수'라 조롱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이를 그들의 그룹명으로 받아드렸고 후에 야수파는 20세기 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되었다. 오늘날 야수파가 20세기 미술의 출발점이라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자리잡은 국립근대미술관(MNAM)이 컬렉션의 시작을 마티스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청년화가 블라맹크의 색채에 대한 열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수파의 다른 작가들처럼 실험과 모색의 시대는 그에게 변증법적 변화를 요구했다. 생생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터치로 점철되었던 시기를 지나 1907년 이후 청회색의 어두운 색조 속에 견고한 화면구성을 보이는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잔의 영향 뿐만 아니라 몽마르트의 '바토 라부아르(Le Bateau-Lavoir)'에서 작업하던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이후 블라맹크는 새로운 사실주의 화풍으로 전환하게 된다. 무겁고 울적한 감정을 드러내는 가운데 '고독감과 비극적 긴장감'이 화면을 침잠해 갔다. 흑과 백의 명암대비에다 청색의 토운을 강하게 살려 설경을 그린 풍경화가 많아진 것도 이 시기다. 야수파의 시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차갑고 무거운 화면이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블라맹크의 그림은 큰 변화 없이 자연을 대상으로 삼은 풍경과 정물에 천착했고 1958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블라맹크에 대한 평가는 야수파의 속도감 있는 필치와 청갈색의 중후한 색채를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하고 극적이며 강력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창조해 내었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모더니즘의 이상과 현실적 삶의 리얼리티가 절묘하게 뒤섞인 독자적인 화풍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반영이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III. 이번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선보이는 블라맹크의 작품들은 1910년대에서 1958년에 제작된 것들이다. '강렬한 원색과 자유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 야수파 초기 작품들이 아니라 블라맹크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한 시기의 작품들로 한정되었다. 70여 점의 유화와 판화 작품들의 주제는 폭풍이 몰아치는 농촌의 하늘과 들판 그리고 눈 덮인 마을 풍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작품들의 경향은 야수파 초기 작품과는 대조를 이룬다. 국내에 열리는 블라맹크의 첫 전시임에도 1906년에 그린 대표작 <샤투의 다리(Pont de Chatou)>와 <붉은색 나무들(Les arbres rouges)> 등이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메이저급 미술관이 보물처럼 안고 있는 원작들을 감상하려면 적지 않은 발품을 팔아야 하듯 블라맹크의 이 대표작들을 보려면 소장처인 퐁피두센터 국립근대미술관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무겁고 가라앉은 색조와 더불어 삶의 리얼리티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얻어낸 '또 하나의 결실'을 원작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예술은 본능이다'라고 단언하며 자신의 내적 충동을 과감하게 분출시켰던 화가 블라맹크. 그는 단순한 선과 색채의 해방으로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사의 새로운 물꼬를 튼 전위화가의 한 사람이자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로 표현했던 화가로 기억된다. 모더니즘이 종식되고 포스트모던 미술이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 오늘날 그의 예술이 지닌 의미는 '예술적 진실'이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의 세계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예술에는 파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카바레의 바이올린 연주자, 소설가, 기계공, 프로 레슬러와의 시합, 자전거 경주 등을 전전하며 생업을 유지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숨결이 담겨있다. 또한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열정과 도전으로 현실에 대응했던 한 화가의 본능적이면서도 치열한 예술적 삶이 오롯이 녹아있다는 생각이다. (출처 : 예술의 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 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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