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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규의 ‘빛과 희망의 노래’ 시리즈

김영호

정용규의 ‘빛과 희망의 노래’ 시리즈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사가)

정용규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는 신화, 전설, 선녀, 무등산, 지리산, 산골마을, 모자(母子), 가족, 산수유, 해바라기, 부엉이 등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대부분 작가가 유년시절 경험했던 특정 공간이나 대상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연유된 것들이라 한다. 냇물과 물고기의 추억, 댓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마당에서 피어나는 흙내음 그리고 귀가하는 어머니 등의 기억이다. 그의 작품은 어릴적 추억의 저장고다. 심연(深淵)에서 퍼 올려진 기억의 종자(種子)들은 그의 캔버스 위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때 작가의 역할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른바 꿈, 자유, 희망, 빛, 사랑 등의 개념을 덧입혀 추억의 이미지를 다른 차원으로 변주시키려 한다. 정용규의 작품세계는 유년시절의 기억에다 현실의 체험을 개입시켜 과거와 현재를 맥락화(脈絡化) 시키려는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신앙 공동체에 입교한 이후 그의 개념은 종교적인 지향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노정에서 겪게 되는 불가피한 현실적 어둠과 방황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찾은 또 하나의 성취가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에 ‘빛과 희망의 노래’라는 시리즈 제명(題名)을 붙이고 있다.  

정용규의 작품은 기법과 조형형식에서도 몇 개의 특징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캔버스에 오일 채색을 사용하지만 패각분(貝殼粉)을 도입하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조개껍질이 지닌 석회성분의 특성을 이용해 브론즈처럼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안료를 개발해 낸 것이다. 소통의 미디어로서 재료의 성질이 바뀌면 작가의 작품 형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작가는 이러한 조개껍질 안료로 견고한 화면을 만드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입체적 볼륨의 양각 선묘를 실험해 왔고 독자적인 화풍을 일구어 내었다. 그가 패각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재료가 지닌 견고함을 넘어 표면이 주는 질감효과에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분벽화처럼 물성이 강조되는 재료와 기법은 바위산이나 토지의 소재와 잘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조형형식의 실험을 가능케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정용규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등산이나 주상암(柱狀岩) 절벽 그리고 돌담 따위가 소재로 즐겨 등장하는 것도 재료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패각분 재료가 지닌 특수성은 촉각적 질감이라는 측면 외에도 ‘시간성’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마치 고분벽화에 새겨진 이미지들처럼 패각분이 드러내는 시간성은 자연스레 신화와 전설 그리고 유년기의 추억을 현시적인 작품으로 표상(表象)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정용규가 작품을 위해 채택한 소재나 조형 방식은 서사적인 어법으로 표현된다.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모자상이나 동물들은 갈등하는 모습이 아니라 설명과 해설이 깃들여진 일상의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그 이야기는 신화적 상상력에 근거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적 실재성에 기반하고 있다. 시리즈로 제작된 무등산의 경우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선녀들이 비상하는 하늘 아래 펼쳐진 농촌의 풍경은 현실적인 풍경에 가깝다. 그의 그림 속에서 무등산은 신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뒤섞인 이중적인 서사구조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주상절리 바위의 부분은 때로 거인의 얼굴로 그려져 있고, 벚꽃과 산수유로 뒤덮힌 마마을 위로 펼쳐진 하늘과 땅과 바다가 뒤섞인 공간에는 십장생(十長生)의 도상들이 요란하게 얽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릴 무렵 울어대는 부엉이 가족은 외출 나간 어머니의 귀가를 알리는 파수꾼 노릇을 하고 있다. 이렇듯 정용규의 화면에는 신화와 현실이 한데 어우러지고 상징과 은유의 세계가 뒤섞인 한편의 장편소설처럼 보인다. 신화적 상상력에 근거해 경험적 실재를 드러내는 작가의 세계는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어떤 공간이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서로 어우러지는 서사구조의 이중성은 작가가 지향하는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통합되거나 일원론적(一元論的) 세계관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정용규의 작업이 지닌 서사구조는 장식적인 도상을 통해 독자적인 화풍을 확보하고 있다. 캔버스 유화에서 장식적인 도상 이미지는 작품이 지닌 회화성을 절감시키는 요인으로 작동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용규의 작업은 장식적 도상에서 특수성을 얻으려 한다. 이는 작가가 회화성을 버리고 장식적인 도상 어법을 택함으로써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식적인 문양과 도상은 전통회화가 지닌 특성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실험적 작품세계는 민화의 현대적 발현을 위한 실험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십장생도는 한국의 토속 자연물 숭배사상에다 중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결합시켜 수복과 강녕과 부귀와 다남을 염원했던 그림이다. 정용규의 신화도는 무등산이라는 모태성징과 그 산자락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현세적 평안을 희망하는 기원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그가 새롭게 실험하고 있는 모자도(母字圖)와 가족의 초상화 역시 배경에 자리잡은 장미와 복숭아 따위의 이미지들이 장식적 도상을 이룸으로써 의미가 한층 선명해 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정용규의 작업은 소재와 기법과 조형형식의 측면에서 남다른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아울러 서사구조와 장식적인 요소들도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선택하고 있는 낯익은 소재와 서사구조에 기반한 조형형식이 관객들에게 친절한 해석의 도구로 작용함으로써 자율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가령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해바라기와 그 주변을 비행하는 비둘기 무리들 그리고 나발을 불며 비행하는 자화상이 형상을 구체화하는 상상력을 절감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도 있다. 또한 장식적이고 디자인 감각이 넘치는 색상과 도상들이 관객의 들어가 머물며 쉴 공간을 축소하지는 않고 있는가 하는 것도 고려해 볼 사안이다. 또한 산수유 핀 지리산 마을 연작에서 보여주는 소박한 풍경이 소박한 소재주의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도 있다. 예술적 감동은 숨겨지고 가려진 의미들을 관객들이 스스로 찾아 채움으로써 커지게 마련이다. 관객이 참여할 여지를 스스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용규의 신작들이 지닌 가치는 진솔하고 평온하며 건강한 삶과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분명 좋고 선한 삶으로부터 혹은 그것을 지향하는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닌 건강성은 이제 원숙기를 맞이한 상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가 탐구할 일은 작품의 완성을 관객과 함께 나누어 하는 것이다. 이 때 완성이란 작가와 관객이 함께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용규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이러한 향후 비전은 화면에서 주제를 비워내고 형식을 간소화하는 일이며 그것은 작가가 실험하는 작품세계에 또 하나의 성취를 이루는 기본적 요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20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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