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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1

김영호

비엔날레1);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1  

 

김영호 (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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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Ⅱ. 정치적 비엔날레의 탄생

Ⅲ.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 

Ⅳ. 세계화 시대의 비엔날레 

Ⅴ. 신생 모스크바비엔날레의 경우

Ⅵ. 비엔날레의 문화정치학 

Ⅶ.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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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2010년 비인에서 발간된 한 비엔날레 종합연구서2)에 따르면 1989년 당시 30여개였던 비엔날레의 숫자가 1990년대 초에 이르러 60여개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 서적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 비엔날레의 숫자만 하더라도 무려 89개에 이른다. 비엔날레를 보유하는 나라의 숫자는 52개국 이상이다. 2016년 뉴욕에서 발간된 또 다른 비엔날레 종합연구서3)는 1970년대부터 부상하는 유럽출신의 스타 큐레이터들과 1990년대에 팽창하는 아시아지역의 비엔날레, 그리고 비엔날레의 파급에 따라 변화해 온 스폰서와 자선가 그리고 비엔날레 디렉터의 역할 등에 대해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비엔날레가 지구촌의 문화계에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초자료가 된다. 19세기 후반, 베니스에서 태어난 격년제 미술제가 격변하는 지구촌 환경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여전히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특히 1989년 이후 비엔날레의 붐을 주도하고 있는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국가들이 이 국제미술제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의 명제를 미리 말하자면 비엔날레는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엔날레가 특정 집단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국가적 장치로 기능하며 이러한 장치에 자국의 특수한 문화적 유산을 연동시켜 다채로운 이익을 구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엔날레의 원조로서 베니스비엔날레는 탄생에서부터 정치적 이슈를 품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계 각국으로 파급된 비엔날레는 점차 경제, 사회, 외교, 교육, 관광의 전 분야에 걸쳐 전략적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행사로 진화해 왔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적 기능은 120년 이상을 버텨온 비엔날레의 역사성을 이해케 하는 요인이자 비엔날레의 존립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세계의 주요 비엔날레4)를 문화사회학적 맥락에 근거해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와 ‘세계화시대의 비엔날레’라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지구촌의 정치적 환경이 급변하는 1989년을 분기점으로 설정한 것이며, 이후 진행되는 비서구권 지역의 부상과 그에 따른 신생 비엔날레의 증가현상이 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5) 특히 1990년대 이후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의 증가는 전래적 비엔날레의 역할을 변화시키는 한편 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중심주의와 패권주의’, ‘탈중심주의와 복합문화주의’,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 따위의 이데올로기 담론과 더불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일으켰다.6) 이 과정에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 다툼은 점차 대륙과 국가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 내부의 지방과 기관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비엔날레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연구는 비엔날레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다.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장(ground)’이라는 주장은 현대미술제로서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실험실(lab)’로 기능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의 쇼셜 미디어가 되지 못하면 단순히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의 지적7)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비엔날레가 현대미술관과 차별화된 쇼셜 미디어의 장으로 작동하기 위해 각국의 비엔날레 주체들이 어떠한 정치적 전략들을 세워왔는지를 동서양의 주요 비엔날레를 사례로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냉전체제를 종식시킨 소련연방(러시아)이 21세기에 들어와 비엔날레의 행보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한다. 2005년에 창설된 <모스크바비엔날레>의 사례는,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신생 비엔날레의 정치적 기능과 그것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진단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Ⅱ. 정치적 비엔날레의 탄생 


  1894년 4월 6일,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문에서 당시 베니스 시장이었던 리카르도 셀바티코(Riccardo Selvatico)는 이 미술기관에 부여된 임무가 다음의 두 영역, 즉 “지적능력의 편견 없는 개발(unbiased development of the intellect)”과 “만인의 형제애적 유대(fraternal association of all peoples)”에 있다고 선언했다.8)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베니스비엔날레에 부여된 소명이라는 것이 이성과 평등 그리고 박애의 가치를 옹호하는 서구 모더니즘 사상과 일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베니스비엔날레의 창립은 단순히 예술의 진흥이라는 목표를 넘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말하는 국가통치의 수단, 즉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9)로서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베니스비엔날레의 창립 선언문은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유럽세계를 지배했던 이성에 근거한 엘리트중심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1895년 제1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국적이나 활동무대가 대부분 유럽 국가들로 한정되어 있었고10) 후에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무수한 비평문에서 확인된다. 셀바티코 시장의 선언문에 등장하는 ‘만인’이란 곧 ‘유럽인’들을 뜻하는 용어였으며 실제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식민지 국가들의 비엔날레 참여는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도 소외되어 있었고, 먼 훗날 1964년 미국의 로버트 라우젠버그가 비엔날레에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한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베니스비엔날레가 내세운 ‘지적능력의 편견 없는 개발과 만인의 형제애적 유대’는 당시 맹위를 떨치던 만국박람회(World Exhibitions)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베니스비엔날레가 창설되기 44년 전인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Hyde park)에서 출범한 만국박람회는 1855년 이후 파리와 바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11) 만국박람회가 슬로건으로 내건 ‘공동체의 전 세계적 확대’는 자국 이탈리아의 미술행사인 베니스비엔날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12) 여기서 언급한 공동체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럽과 그 주변 국가들이 중심을 이룬 제한된 집단을 의미하고 있다. 유럽국가의 결속이라는 명분과 더불어 각국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기위한 행사로서 만국박람회의 경쟁적 운영방식은 후에 그대로 베니스비엔날레에도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관 운영’과 ‘수상제도’라 할 수 있다. 


  1907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는 주 개최지인 카스텔로 공원 내 10만평 부지에 참가국의 고유한 전시관인 파빌리온(Pavilion)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참가국의 커미셔너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1907년 첫 파빌리온을 세운 벨기에를 시작으로 1909년에는 영국, 헝가리, 독일 등이 줄지어 뒤를 이었다. 1912년에는 스웨덴, 프랑스가 1914년에는 러시아, 1922년에는 스페인, 1926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가 1930년에는 미국이 자국의 고유한 파빌리온을 운영하게 되었고 1995년까지 건축행렬은 계속되었다. 아시아국가로서는 일본이 1956년에 그리고 한국이 1995년에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베니스비엔날레의 국가관 건립은 종료되었고 현재 총 26개 국가관이 운영되고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파빌리온 구성은 이 비엔날레의 건립취지인 정부기관을 통한 정치적 연대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국가의 수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 있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된 국가관 수는 90개국에 달하고, 44개의 병행전시를 베니스시 전역에서 동시에 치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이 비엔날레의 정치적 영향력을 국제연합(UN)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니스비엔날레는 21세기 비엔날레가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New Canon)으로서 세계주의(cosmopolitanism)14)를 무기로 삼아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Ⅲ.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는 유럽 문명권의 중심에 위치하여 서구미술의 주류를 역사화 시키는데 공헌해 왔다. 이 세계 유일 비엔날레의 주체들은 로마의 교황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유럽 지역에서 태동한 현대미술의 경향들을 축성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작가들에게 시상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정치의 독점현상은 1930년대와 이차대전의 전란 과정에서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쓰이면서 극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등 3국의 독점 행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틈타 대륙의 건너편 라틴의 피를 수혈한 브라질이 1951년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창설하고, 이듬해인 1952년 아시아의 유럽을 자처하는 일본이 <도쿄비엔날레>를 출범시켰다. 1955년에는 나치독일의 종식을 선언하면서 <카셀도큐멘타>가 처음으로 개최되었으며 1959년에는 프랑스의 드골 정부에 의해 <파리비엔날레>가 창설됨으로서 국제미술제의 구도는 점차 다변화되기에 이른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비서구권에서 열리는 최대의 미술전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조직과 운영방식은 참가국가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모델로 삼았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초기부터 60개 이상의 국가들이 참가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이차대전 이후 여전히 고립상태에 머물러 있던 브라질의 위상을 해소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남아메리카 지역에 소개하는 창구의 역할을 실행하면서 피카소와 레제 그리고 몬드리안 등과 그 주변의 다양한 추상적 경향들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1969년 이후 국가별 전시에 기초한 운영방식에 대한 논쟁과 정치적 문제가 겹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80년대부터는 주제전과 경향별 작품전의 방식을 개발하고 남미지역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현대미술을 연결하려는 노력으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와서는 서구중심의 문화구조를 극복하고 자국 문화의 화합을 추구하려는 시도15)를 전시기획과 실행과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도쿄비엔날레>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이자 동북아시아 국가 중 근대화의 수용에 가장 빠른 행보를 취한 일본이 창설한 비엔날레였다.16) 이차대전의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패전국 일본이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 기능했던 비엔날레를 아시아지역에서 선점했고, 1990년 18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은 주목해 볼 일이다.


  일간지 신문을 발간하던 주식회사 메이니치(Mainich News Paper Co.)에 의해 설립된 도쿄비엔날레는 청년작가들을 위한 비엔날레로 탄생되었다. 신생 도쿄비엔날레는 아시아 지역의 비엔날레로서 1952년 문을 열었으나 그 위상이 국제무대로 확대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일본의 두 젊은 평론가인 유수케 나카하라(Yusuke Nakahara)와 토시아키 미네무라(Toshiaki Minemura)가 하랄트 제만이 1969년 베른미술관에서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 Form)’ 전시회를 참관하고 귀국한 이후 1970년 10회 토쿄비엔날레에 베른미술관 전시회 참여 작가 대부분을 소개하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17) 이 두 명의 평론가들은 각각 커미셔너와 큐레이터로 비엔날레를 주도했으며 당시의 전시회 이름은 “인간과 물질 사이(Between Man & Matter)”로 정했다. 사빈 B. 보겔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도쿄비엔날레가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18) 도쿄비엔날레가 국내외 미술계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참여 작가들이 당시에 전개되기 시작한 일본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 모노하(Mono-ha), 구타이(Gutai)와 국제적 예술운동으로서 개념미술(Conceptual art), 프로세스 아트(Processes art)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를 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청년세대에게 요구되는 국제적 연대의식과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주최측의 의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전후 독일의 재건사업이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성과로 나타날 무렵 <카셀 도큐멘타>는 독일 연방공화국의 통합과 회복을 염원하면서 1955년에 탄생되었다. 독일인 특유의 결속력과 문화예술분야로 집약된 정부의 지원사업에 힘입어 카셀도큐멘타는 서구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제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설립 배경을 보면 나치 치하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금기되거나 퇴폐미술로 낙인 찍혔던 다양한 추상작품들을 일반에게 공개하여 성장하는 독일의 젊은 세대들에게 모더니즘 미술양식을 소개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 독일에 대한 미국의 지원사업은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끼쳐 팝아트와 미니멀아트를 비롯하여 포토리얼리즘, 개념미술, 영화, 사진, 비디오 등 온갖 형태의 작업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4년 또는 5년을 주기로 개최어온 카셀도큐멘타는 이러한 실험적 시각예술의 양식들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1972년 하랄트 제만 같은 전시기획자의 등용으로 카셀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전시책임을 맡게 된 그는 반형식과 신화적 태도, 개념미술, 프로세스 아트 등의 경향을 전시장에 끌어드림으로서 카셀도큐멘타를 대규모 전시회 이상의 것으로 전환시키는데 공헌했고 그후 이것은 카셀도큐멘타에 있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1950년대 유럽과 아메리카에 불어오는 새로운 문화적 기류 속에서 파리도 침묵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드골 정부가 들어서면서 임명된 초대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현대미술에 대한 국가차원의 진흥정책에 따라 1959년에 <파리비엔날레>를 창설하여 17세기 이래 이태리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예술 중심지의 자존심을 지켜 나갔다. 물론 이러한 비엔날레의 창설은 예술의 패권을 위협하는 뉴욕에 맞서 문화예술 중심지의 위상을 고수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자 유럽과 미국에서 전후의 냉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며 재편되는 정치적 질서에 대한 폭넓은 탐색의 시도였다. 파리비엔날레에 나타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전’은 파리비엔날레가 동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이르는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초청한 사실과 미국에 대한 경계와 견제가 노골화 되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19) 파리비엔날레는 참가자들의 연령을 20세-35세로 제한하여 청년비엔날레라는 특성을 살렸다. 불확실성으로 무장된 파리 비엔날레는 미래를 위한 생명력을 지니며 시대의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1985년 문을 닫기 전까지 국제적인 비엔날레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이 젊은 비엔날레의 장점은 동시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35세의 나이 제한의 규정은 화단의 주류 세대가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동시대 미술의 현상을 보여주는데 실패했고 나아가 1970년대 말에 화단을 휩쓴 ‘아방가르드 미술의 위기’에 의해 그 생명력은 점차 쇠락해 갔던 것이다. 결국 1985년 연령제한을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여 <새로운 파리비엔날레(Nouvelle Biennale de Paris)>라는 이름으로 14번째의 행사를 치루었으나 마지막 전시회가 되고 말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진행되는 동안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과 독일에서 산발적으로 국제 미술제를 탄생 시켰다. 우선 1968년 인도의 뉴델리시는 3년마다 개최하는 <인도트리엔날레>를 창설하여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미술제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 행사는 국가별 전시를 고집함으로서 국가차원의 문화교류를 통한 외교에 의의를 지니는 비엔날레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20) 그 후 1973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비엔날레>가 탄생하여 혁신적인 세계의 현대미술을 소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인 1973년부터 <휘트니비엔날레>는 1932년 창설된 이래 매년 전시행사를 해 오던 전례를 바꾸어 격년제 전시회로 전환하면서 미국의 미술가를 발굴하기 위한 새로운 모습으로 타시 태어나게 된다. 한편 1977년에는 독일의 뮌스터에서는 10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현대조각전 <뮌스터조각 프로젝트>를 창설하여 시내 각지구에 자리잡은 대성당이나 궁전공원의 광장과 그 주변을 비롯해 상업지구에 이르는 수십개의 지역에 작가가 스스로 작품을 설치하고 도시를 조각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도시와 예술 그리고 일상과 관광이 연계된 종합적 프로젝트라는 찬사를 주변국가로부터 받게 된다.



(출처 :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1권 1호, 현대미술학회, 2017, pp.113-149)


1) 이 글에서 사용하는 비엔날레라는 용어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제라는 본래의 의미와 더불어 문맥에 따라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제미술제 일반을 지시하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가령 3년마다 열리는 ‘트리엔날레(triennale)’, 4년마다 열리는 ‘콰트리엔날레(quatriennale)’ 그리고 5년과 10년을 주기로 삼는 카셀도큐멘타와 뮌스터조각프로젝트와 같은 국제미술제가 광의의 의미로서 비엔날레에 포함된다.

2) Sabine B. Vogel, 『Biennials-Art on Global Scale』, Springer Wien New York, 2010

3)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Biennials, Triennials, and Documenta : The Exhibitions that Created Contemporary Art』, Wiley-Blackwell, 2016

4) 세계의 주요 비엔날레에 대한 기본 정보는 아래 글을 참조했다. 김영호, 「세계의 주요 국제미술제 분석」, 『미술평단』, 가을호/62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1

5)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앞의 책, p.3 / 이 연구서는 1989년을 비엔날레 정치의 적법성(The Politics of Legitimacy)을 인정하는 시점으로 규정하고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을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의 부상((Asian Biennialization)으로 꼽고 있다.  

6) 김영호, 「비엔날레 이데올로기」,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1호, 현대미술학회, pp.7-45

7)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인터뷰, 『아트인 컬쳐』, 9월호, 2014. p.139

8) Sabine B. Vogel, 앞의책, p.14에서 재인용된 셀바티코의 아래 선언문 참고 : 'The City Council of Venice has taken on the initiative of this (the exhibition), since it is convienced that art as one of the most valuable elements of civilization offers both an unbiased development of the intellect and the fraternal association of all peoples'

9)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가 정의하는 이데올로기란 “주어진 사회 내에서 역사적 존재에 역할을 부여받은 이미지, 신화, 관념, 개념 등의 ‘재현’이 엄격한 논리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다. 이러한 재현의 체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한 상상, 환상, 허위 의식이 아닌 사회적 전체성의 유기적 일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래 에세이에서 그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종교, 교육, 가족, 법률, 정치,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문화(문학, 예술등) 등으로 간주한다.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역, 솔, 1991, pp.75-130)

10) 1895년 제1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국,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 등 8개국이었다.

11)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방문객은 6백만이고 28개 국가가 참여했다. (1855년 첫 행사에 이어)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6백8십만이 다녀갔으며 참가국은 32개국이었고 1878년에 다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천6백만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Sabine B. Vogel, 앞의책 p.17

12) 1851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시장(wold fair)이 제작한 수상메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귀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 “A community is flouring all over the world”. 위의책 p.17에서 재인용.

13)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는 국가관 86개국, 병행전시 23개로 지난 회기보다 다소 줄었다.

14) Anthony Gardner & Charles Green, 앞의 책, p.183

15) 1990년대 후반의 성공적 비엔날레 사례로는 김영호의 아래 글 참조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카니발리즘으로 배양된 브라질문화의 정체성', 『가나아트』 가을호, 1998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문화식인주의로 조명한 현대미술', 『월간미술』 11월호, 1998 /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역사와 문화의 공존, 복합문화주의에 대한 실천의지', 『미술세계』 11월호, 1998

16) 세계 비엔날레의 창설 년도를 기준하여 랭킹 5위에 속하면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일본작가 위주의 내수용 전시’라는데 혐의를 두고 있으나 평가에 옹색한 면이 있다. 이는 1932년 시작된 휘트니비엔날레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비교된다. 휘트니비엔날레는 휘트니미술관이 매년 개최하는 미국현대미술전인 <휘트니 애뉴얼>로 시작해 1973년부터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로 재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 제10회 도쿄비엔날레는 1970년 5월 도쿄국제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쿄토, 나고야, 후쿠오카 등의 도시로 순회전시 되었다. 커미셔너 였던 유수케 나카하라는 수상제도와 국가관제도를 모델로 삼고 있는 베니스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1960년대의 전통적 회화와 조각의 범주를 넘어선 예술적 접근방식의 다양성을 소개하는 일본, 유럽, 북미의 작가 40명을 선발했다. 포스트미니멀리즘, 아르테포베라, 컨셉추얼 아트, 모노하, 구타이 등 예술의 새로운 경향들을 소개했다. 이들 작품은 인간과 물질, 우주와 시간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광범위하게 탐구하는 공통점을 보여주었다.

18) Sabine B. Vogel, 앞의책, p.37

19) 1966년이 되면 드골 대통령은 미국과 소련의 헤게모니에 대응하여 ‘제3의 전략(Third Way)’을 표방하였고 뒤이어 나토(Nato) 탈퇴를 감행한다.

20) 국가관 운영이나 국가별 전시 운영방식은 주최국의 입장에서 보면 커미셔너나 작가선정 그리고 경비가 초대 대상국의 몫이므로 운영상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이점이 지속적인 행사를 위한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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