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파리로 진출한 한인화가들

김영호



파리로 진출한 한인화가들 1)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사가)







  한국미술 사상 최초의 프랑스 미술유학생으로는 1925년 파리에 도착한 이종우를 들고 있다. 이와 함께 1922년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후 베를린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파리에 도착한 배운성이나 1929년 도불해 6개월간 머물렀던 나혜석도 재불 한인화가들의 기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들의 파리체류는 일제의 압제상황과 다가올 세계대전의 전운 속에서 그 활동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한국 국적을 회복한 작가들의 본격적인 프랑스 진출은 해방과 정부수립의 산고 그리고 전쟁을 모두 치룬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에콜 드 파리>의 고장 파리는 일제시대의 동경을 대신하여 새로운 미술의 꿈을 충족시킬 예향으로 부상하였다. 

  1950년대에 파리에 도착한 작가는 남관(54), 손동진(54), 김흥수(55), 박영선(55), 김환기(55), 함대정(56), 이성자(58), 이응로(58), 이세득(58), 변종하(59) 등이 있으며 이들은 향후 한국의 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인 <살롱 드 메>, <살롱 데 장데팡당>, <살롱 도톤느>과 다양한 국제전 그리고 현지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에도 도불행렬은 계속되었는데 한묵(61), 방혜자(61), 문신(61), 김기린(61), 김창렬(65), 정상화(67)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프랑스 입국 선배들처럼 살롱이나 화랑과 관계를 가지며 자신의 창조적 열정을 묵묵히 다스려 나갔다. 이 시기의 작가 몇몇은 국내파와 연계하면서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1959년에 창설한 파리비엔날레 등의 국제전 참가를 통한 해외진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당시 파리 한인작가들 대부분의 관심은 다양한 경향의 추상미술에 있었다. 1968년에 도불해 파리의 소르본느대학(파리1대학)에서 수학했고 1978년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병관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1970년대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이휘세, 양승권, 오천룡, 김순기, 김희경, 김인중, 이봉렬, 강정완, 오경환, 권영우, 하인두등이 개인전 또는 그룹전등을 통해 전시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추상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한편 성완경은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유학생과 미술가들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자,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문화행사를 통한 외교를 강화시켜 국제 경쟁시대에 부합하려는 시국정세의 분위기에 따른 것이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나온 학생들은 파리국립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 de Paris)”와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Arts Decoratifs de Paris)”로 모여들었다. 또한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 Chaumiere)”와 “아틀리에 17(Atelier 17)”등은 정규과정이 아닌 입학 시기에 제한이 없는 작업실들이었다.

  화가수업을 받는 학생의 수가 많아지면서 얻게 된 이 시기의 성과는 1984년 <파리청년작가회>가 결성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주로 파리의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매년 정기전을 통해 그들의 예술세계를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참여 작가들을 보면 권영호, 김남용, 김선태, 김중식, 박승순, 백진, 변창건, 안종대, 윤봉환, 이용순, 장경염, 정충일, 조용신, 조택호, 차명혜, 홍승혜 등이 있다. 1980년대 이들의 작품 경향은 일관된 하나의 형식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캔버스회화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한편 진유영과 백수남 등은 그룹이나 집단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작품제작을 하면서 현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또한 1973년에 도불해 장식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정보원과 1983년에 도불해 5년간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같은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곽남신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90년대는 파리로 건너와 현지 미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한인 청년작가들이 현지화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시기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재불작가 전체수에 비해서는 아직도 미미한 숫자이지만 예전에 비해 현지의 화랑과 전속 내지는 부분적인 계약과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늘어나게 된다. 이는 초기의 파리체류기간의 문화적 갈등의 단계를 벗어나 고유한 삶과 예술의 틀을 지니기 시작한 세대라는 점에서 당연한 추세로 보인다. 생각나는 데로 적어본다면 최현수가 발렉스(Elisabeth Valleix), 유선태가 라비니으-바스티유(Lavigne-Bastille), 황호섭이 푸르니에(Jean Founier), 안종대가 도르프만(Patricia Dorfmann), 조택호가 레스코(Pierre Lescot) 등 파리의 의욕적인 화랑들과 전속계약을 맺었으며, 그리고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뒤늦게 도착한 고병진이 카지니(Philippe Casini)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고 전시활동을 벌이게 된다. 

  1990년대에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파리 거주 한인작가들의 집단적 작업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들은 1992년 파리의 남서쪽 세느강변에 위치한 길이 150미터에 폭 33미터 그리고 높이가 12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골구조물을 장기 임대하였다. 과거에 탱크 등의 대형 병기 수리를 위해 사용되었던 공간을 50개로 분할해 개인 아틀리에로 내부변경을 함으로서 새로운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집단의 이름은 “아르스날(ARTsenal)”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소나무”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운영했는데 한국 작가에게 배당된 공간은 전체 인원의 반수인 25명 안팎이었다. 앞서 언급한 파리청년작가들 중 몇몇을 포함해 곽수영, 권순철, 김선태, 김성태, 김형기, 박승순, 백진, 변창건, 이영배, 장승택, 정재규, 조용신, 최예희, 홍순명 등이 회원으로 있고 이들은 비디오, 설치 등의 조형방법과 재료사용에 있어 사진, 밀납, 유리, 합성수지등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적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소나무 그룹은 임대기간이 만료되어 새로운 시설을 찾아나서는 2002년 까지 과반수에 해당하는 동료 외국인 작가들과 공동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전시도록을 발간하는 등 나름의 밀도 있는 집단적 활동을 통해 한불의 문화교류에도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화가들은 프랑스 현지의 평론가들과 화상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언론에 보도되는 사례도 점차 늘게 되었다. 미술시장의 차원에서도 이전과 다른 교류가 진행되었는데 1996년 피악(FIAC)이 주최한 <한국의 해>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피악 운영위원회는 매년 한 나라를 초대국으로 정해 집중적으로 그 나라 작가들을 소개해 왔는데 이 해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초로 한국이 선정된 것이다. 이 행사를 계기로 국내 15개의 화랑이 집단으로 초대되었으며 이를 통해 35명의 한국 작가들이 파리의 미술시장에 소개되었다. 이 시기 이후에 국제미술시장 참가를 위한 정부기금이 마련되었고 한국 화랑들의 해외시장 진출이 본격화 되는 현상을 맞게 된다.    

  새천년의 시대에 들어서서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교류는 국가적 차원의 것으로 점차 공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파리외곽에 자리 잡았던 집단적 작업공간인 아르스날이 계약종료와 함께 폐쇄되면서 파리시는 대안적 공간을 건립하게 되었고 2002년 소나무 그룹의 일부 회원들은 이시레 물리노(Issy-les-moulinaux)시가 새로 건설한 창작공간인 “아르쉬(Arche)”로 입주했다. 아르쉬는 전철 교각의 아치를 이용해 10여개의 독립된 반원형 모양의 목조건물을 만들어 놓은 작업실인데 이전의 아르스날에 비해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문화교류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곳에 입주한 화가는 모두 27명이며 그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9명이 한국 작가들에게 배당 되었다. 입주 작가들의 명단을 보면 곽수영, 권순철, 박동일, 손석, 유혜숙, 윤영화, 이민호, 이영배, 정재규 등이 있고 후에 류이섭, 이수영, 전강옥 등이 합류하였다.

  2004년에는 파리 국립주드폼 미술관(Galerie nationale Jeu de Paume)에서 한국 작가를 위한 대규모의 초대전을 갖게 되면서 진정한 교류 차원의 이벤트가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1965년 파리에 건너온 후 프랑스에서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김창열 초대전>이 그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초대된 이우환의 1997년 전시를 시작으로 프랑스 현지 국립미술관에서의 전시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김창열의 초대전시는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정점이 되었다. 2006년은 한국과 프랑스가 한불우호통상조약 체결을 맺으며 수교한지 120주년 되는 해로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양국의 수도 및 주요 지방도시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시간이 다시 흘러 올해 2016년은 수교 130주년이 되었다. 기관의 차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학술행사가 준비가 되고 있다는 소문이 간간히 들려오지만 아쉽게도 미술사적 성과를 발굴하거나 교류사의 실체를 드러내는 행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1990년대 세계화 시대가 펼쳐진 이후 프랑스에서 유학한 작가들 사이에서 체류국의 고유한 문화사회적 속성과 대질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가를 찾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영국 유학생 집단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오늘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실시간으로 접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프랑스의 한인작가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전시나 정보는 듣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작가들의 외국전시가 줄을 잇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제 유학의 의미와 가치평가의 방식은 제3라운드로 접어들었다는 느낌이다. 

  문화교류사적 측면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크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눈에 띤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의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방법이나 규모 면에서 볼 때 진정한 상호교류의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평론가 유준상의 지적처럼 1980년대 이전까지 한불미술교류는 일종의 짝사랑 같은 것이었으며 한국예술은 미지세계를 동경하는 소년기의 환각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립과 자가당착의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세계문화의 구성단위로 동참하시 시작한 것은 경계의 의미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세계의 미술지형도가 재편되는 1980년대부터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국제올림픽>을 계기로 한 각국과의 문화적 접촉은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에 본격화된 국제화의 물결 앞에서 외국과의 문화교류는 일상이 되었다.  

  한국과 프랑스 교류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선 문화교류란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양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에 설정되어 있는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동질성을 찾는 일은 내용의 인식에 있지 않고 내용을 인식하는 형식에 있다. 타자성을 깨닫는 것이 곧 교류의 근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까지 모방 혹은 동일화의 과정으로 여겨온 문화적 교류의 타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경계를 파기하는 일은 문화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서 그 벽을 무화시키는 일이다.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 그것이 교류의 근간이 되는 사연은 여기에 있다. (2016. 06) 





1)  이글은 필자의 논문  김영호, “한국-프랑스 미술교류사 : 문화수용과정의 문제와 대안”, 프랑스문화연구 제16집,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08, pp.119-157 및 필자의 평문 Kim Young-ho, 'Reve de France: Histoire de l'echange artistique franco-coreen', Frontieres, edition Musee du Montparnasse, 2006 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임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