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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의 세계를 향하여 (Forward to Nirvana)

김영호


김영호(전시감독) 





개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니르바나-한국현대미술전”(6.29-8.28)이 막을 올린다. 모스크바시의 대표적 공원인 베데엔하(VDNH)에 자리한 국립동양박물관 전시관(13th Pavilion)에서 열리는 최초의 대규모 한국현대미술전이다. 전시를 주최한 모스크바비엔날레 재단은 2005년 창립된 신생 모스크바비엔날레를 운영하는 조직으로 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해에 특별전을 기획해 왔으며 이번 전시는 러시아 문화계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재정 후원은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과 러시아문화부가 맡았고 현지 모스크바 한국문화원에서는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이라는 주제의 특별강연회를 열어 오늘의 한국미술 동향을 소개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전시장이 자리잡은 베데엔하는 소련(소비에트연방) 50년사가 온전히 숨쉬고 있는 공간이다. ‘전-러시아전시센터’로 소개되기도 하는 이곳은 소련에 속해 있던 다양한 민족과 지역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이래 모스크바 시정부는 이곳에 대한 대대적 보수 계획을 수립해 미래의 문화재로 활용하기로 하고 단계적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거대한 공원에는 이미 항공박물관, 핵에너지박물관 등의 문화 기반시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말에는 약 25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다이나믹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이곳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은 제6회 모스크바엔날레의 주전시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동유럽에서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과제를 수행해 온 자존감을 승계하려는 의욕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러시아에는 과거의 재정러시아 시절에 건립된 역사적 건축유산들과 함께 소련 시대의 근대적 문화유산들이 무수히 자리잡고 있으나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어 지구촌 미술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필자는 모스크바비엔날레 재단의 제네럴 디렉터인 안드레이 마티노브와 함께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이번 전시회의 주제를 ‘니르바나(Nirvana)’로 정했다. 해탈, 열반 혹은 적멸 등으로 번역되는 니르바나는 ‘불어서 끈다’는 뜻을 지닌 범어다. 번뇌의 불꽃을 훅 불어서 제거함으로써 현실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상태가 니르바나의 세계다. 뒤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종교적 언어로서 니르바나의 세계란 예술의 지향하는 목표와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 전시주제로 채택되었다. 전시에 초대된 한국 작가들의 예술세계는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다양하고 개성적인 어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공통 분모는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의 상태에 두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작품이 이념과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치열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기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2014년 11월 러시아의 중부지역에 위치한 노보시비르스크(뉴 시베리아라는 뜻의 지명)에서 열린 <국제사진페스티벌>(Novosibirsk State Art Museum)에 한국측 큐레이터로 참여할 기회를 얻은 이래 러시아와 교류 차원의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기획해 왔다. 2015년 5월의 <모스크바 한국현대사진전>(Gallery of Classic Photography)과 7월의 <러시아-한국 미디어아트의 오늘>(경주 우양미술관), 그리고 10월의 <제6회 모스크바비엔날레 특별전>(Tsaritsyno State Museum)은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 준 기회들이다. 2016년 7월에 시작되는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작은 교류의 결실이자 향후 계속될 러시아 문화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11월 초에는 러시아 현대미술 작가들 7명의 작품을 서울로 들여와 러시아현대미술전이 개최될 예정이다. 이 모든 행사에는 나의 친구인 안드레이 마티노브와 함께 했으며 이 자리를 빌어 그간의 협력과 한국에 대한 열정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니르바나와 예술 

  이번 전시의 주제로 채택한 ‘니르바나’는 범어로 ‘불어서 끈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번뇌의 불꽃을 제거하여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로서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라면 그것은 종교적 명상의 차원을 넘어 예술 실천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번 전시회의 주제로 채택한 니르바나는 이렇게 종교적 명상과 예술적 실천을 접목해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헤겔은 예술을 ‘절대정신의 감각적 발현’이라고 규정하여 예술의 지위를 절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활동으로 격상시켰다. 이후 감각으로 직관해 절대정신을 구현하는 일은 사바세계의 지식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지향하는 니르바나의 세계와 맥을 같이해 왔다. 

  오늘날 예술은 현실에서 형상과 물질을 빌려 오지만 그것을 통해 현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용한다. 현실을 변용하고 형상과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는 이른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살면서도 절대를 추구하는 종교적 세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은 모두가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번뇌의 불꽃을 제거하여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본능의 산물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개의 활동에 놓인 모순과 역설의 구조에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현실이란 제도와 관습 그리고 규범 따위의 이념으로 짜여져 있으며 삶의 기반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정되고 극복되고 해체되어야 할 대상들이기도 하다. 예술이 현실에 근거하고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부정을 통해 종교적 이상을 찾아나서는 모순을 보인다. 이 대목은 예술적 전위와 종교적 질서가 서로 모순적으로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예술과 종교 사이에 놓인 역설적인 구조에 주목해야만 한다.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니르바나는 어떤 모습으로 시각화 되는가? 이번에 초대된 8인의 예술세계는 저마다 고유한 형식과 논리를 취하고 있으며 예술세계를 형성해 온 저간의 환경도 차이가 있다. 백남준을 비롯해 강형구, 박선기, 천경우, 이명호, 한성필, 뮌, 김기철 등 8인(팀)의 비디오 영상에서 회화, 사진, 설치, 음향에 이르는 실험적 작품들은 그 차이와 개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의 본성이 자고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일이고, 그 사이에 놓인 모순과 역설에 대해 고찰하는데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하나의 공간에 모을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니르바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제도와 윤리 그리고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의 상태에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의미하며 전시에 속한 8명의 작가들에게서 그러한 자유의지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전시를 찾은 관객들에게 조차 자유로운 감상의 방식을 권고하고 있다.  




1. 박선기(Bahk Seon-ghi, An aggregation-space 20160507, 2016, 
charcoal, nylon thread, wire thread, wire clip, 700x600x600cm)

  박선기는 숯 덩어리를 재료로 삼아 공중에 거대한 구체의 형상을 만들어 매달아 놓았다. 제명이 <집합-공간 20160507>으로 되어있는 이 작품은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다'는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지름이 6미터나 되는 볼륨은 숯이라는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지만 숯 덩어리의 집합 차원을 넘어 감상자들에게 자유로운 체험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부분이나 요소의 집합이 아니라 전체성에 중점을 두고 파악할 것을 권고한다. 예술 작품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형태나 구조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허상과 실재 사이를 넘나드는 관찰자의 시각 경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무수한 탄소 덩어리가 거대한 원형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에서 관찰자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중력 공간의 일루전이다. 이러한 시각 체험이 관찰자의 기억과 뒤섞인다면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행성이 떠있는 우주공간 이미지일 것이다. 거대한 원형이 우주공간을 상징한다면 작은 숯 덩어리들은 그 안에 부유하는 다양한 모습의 존재들을 나타낸다. 관객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공중에 부유하는 거대한 숯의 볼륨이 일정한 규칙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볼륨의 기획 단계에서 수직과 수평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 고로 박선기의 작업은 기하학적 패턴 속에서 무한하고 변화하는 자연 현상의 배면에 자리 잡고 있는 법칙성과 질서감을 함께 보여준다. 정처 없이 부유하는 미세한 존재들이지만 대자연이 거대한 순리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성을 엿볼 있다. 







  박선기의 작품은 존재하는 미물들 사이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장대한 심리적 파노라마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때로는 투명 크리스탈을 사용해 빛의 구조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나무를 태우고 유기물을 불완전 연소 시키며 만들어낸 숯의 물성이 주는 효과도 작품의 의미 생산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습기를 흡착하고 방출하는 재료적 속성에다 악취를 흡착하고 부패균의 발생을 억제하는 방부효과에다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 효능 때문에 수많은 의미를 생산하는 기호로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술의 본성이 감각을 통해 받아드려진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예술의 창작과 감상의 행위는 허상과 실재 사이에 놓인 평균대 위를 걷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선기의 작품은 허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차원의 세계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니르바나의 초월적 세계와 끈이 닿아 있다.



2. 천경우(Chun Kyung-woo, Unseen 1989, 2016, mixed media,
430x600cm, commissioned by MMCA, Seoul)

  천경우의 작품 <Unseen 1989>은 어떤 사건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댄 사진기자 24명의 모습을 담은 24개의 사진컷 이미지를 벽면에 설치한 것이다. 카메라의 렌즈는 모두 관객이 서있는 정면을 향해 있다. 작가는 1989년 한 해 동안 각종 언론 매체에 올라온 사진 기자들의 취재 현장 사진을 채집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한다. 사진작품이 설치된 벽면은 거울시트로 되어 있어 관객들 자신의 모습이 사진작품 사이로 비추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작품 속의 카메라들에 의해 바라보여지는 존재로 노출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도록 다중적으로 장치해 놓았다.

  천경우의 예술적 니르바나는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 사이의 간극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물네 대의 카메라는 모두 1989년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향해 있으나 작가는 카메라의 시선을 관객들에게 전치시켜 놓았다. 카메라의 눈은 1989년의 사건을 향해 있으나 동시에 2016년의 관객들에게 돌려놓음으로써 사건에 대한 이중적 대면의 방식을 연출하고 있다. 과거라는 시간과 그곳이라는 공간의 개념은 사라지고 관객 스스로는 시공이 통합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관객은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사건의 관찰자이자 그 스스로가 사건이 되는 착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사진을 채취하고 배치하는 기술은 매우 정교하다. 24개의 카메라가 피사체를 향하고 있는 각도는 모두 관객의 서있는 지점으로 집중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 자신이 24개의 카메라에 노출이 되어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체험케 해 주는 결정적 요소로 작동한다. 카메라를 쥔 사진기자들의 손은 긴장되어 있으며 관객을 향한 시선의 방식은 역원근법의 경우처럼 소실점을 관객이 놓이도록 각도를 조정함으로써 사건의 결정적 순간에 노출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느낌을 강화하도록 되어 있다.

   1989년은 작가에게 의미 있는 한 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형식이나 논리에 미루어 볼 때 작가는 사건의 내용을 언술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질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역사적 사건이란 그 때 그곳에서 발생하였으나 시간과 공간이 바뀐 지금 이곳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오래전부터 작가가 연구해 오고 있는 관계와 시간 그리고 존재에 대한 성찰의 맥락에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한성필(Han Sung-pil, Shadow, 2010, 
Latex ink Print on fabric, 270x211cm)

  한성필은 이번 전시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가림막> 시리즈 일곱 점을 내놓았다. 가림막은 건물의 보수공사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설치된 막으로, 보통 그 막의 표면에는 원래 있던 건물의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다. 작가는 가림막이 설치된 현장을 발견하고 사진기로 채집하기 위해 사냥꾼처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가림막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작 설치해 촬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그의 작품은 현장이라는 장소성과 숨겨진 건물의 기억을 담아내며 보는 이들에게 시각적 체험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시간을 기록하는 사진의 속성에 힘입어 재구성되는 사후적 해석은 존재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선사해 주고 있다.

  가림막의 사후적 의미란 보수공사 현장에 세워진 가림막 앞에서 생겨나는 의미로, 원래 있던 건물과 그것을 대체한 가림막 이미지 사이에 설정된 시간과 상황이 오버랩 되면서 만들어 내는 의미이다. 그것은 가상으로 포착된 실재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의미이자, 부재의 상황이 연출해 내는 존재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특정한 대상을 바라 볼 때 망막에 들여온 이미지를 기억 속에 저장된 경험과 통합해 그것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때 지각에 의한 경험의 통합은 개인이 지닌 고유한 기억이나 지식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성필의 <가림막> 작품은 이렇듯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 틈을 주목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성필의 <가림막>은 가상과 실재의 세계를 뒤섞어 놓음으로써 보는이들의 시각을 혼돈에 빠트린다. 가림막의 이미지는 과거에 실재했던 3차원의 건물을 시각적 환영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림막의 환영적 이미지는 작가의 손에 의해 사진이라는 물질적 대상으로 다시 포착되고 작품으로 제시되는 순간 또 하나의 실재가 된다. 3차원적 실재인 건물이 2차원적 실재인 사진작품으로 바뀌고, 동시에 3차원적 실재의 이미지인 가림막이 2차원적 실재의 이미지인 사진으로 바뀌면서 실재와 환영 사이의 틈을 만드는 다중적 구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한성필의 작품은 실재와 가상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전복시키는 시각 체험을 경험케 해 준다.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희열을 맛보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 앞에서 가상과 실제가 다차원으로 뒤섞인 세계로 빠져 들면서 미묘한 혼돈의 실재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상과 허상이 다르지 않게 인식되는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의 세계가 있다.   



4. 강형구(Kang Hyung-koo, Gandhi, 2012, 
oil on canvas, 259x194cm)

  강형구는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거대한 안면초상으로 국제무대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정치인 보리스 옐친과 윈스턴 처칠, 예술가 앤디 워홀, 연예인 소피아 로렌, 그리고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 등 다섯 점의 안면초상을 내놓았다. 작가는 이 대형 초상화들을 감상하는 비평적 도구로 '응시(Gaze)'의 개념을 들여올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일, 즉 상대방을 마주한 채 서로의 눈을 오랫동안 주시하는 일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경험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대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닌 극사실적 초상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림속의 인물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다지 불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정치인이거나 예술가 또는 연예인이거나 사상가라면 안면초상에서의 응시는 대상과의 적극적 대화의 방식으로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만남의 방식은 일방적인 것이며 짝사랑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수단은 감각이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 중에 눈은 세상을 받아드리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망막에 들어온 모든 시각정보를 깔끔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택이 작용하며 ‘응시’는 바로 선택의 효과적인 방식이자 인식활동을 강화시키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응시의 대상으로 역사적인 유명 인사를 선택해 그것을 대상화 시키고 관객들에게 그것을 수용할 것을 요청한다. 강형구의 안면초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응시를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관객들은 초상속의 인물이 보내는 시각정보를 기억과 지식과 통합시키면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정치, 연예, 예술, 사상을 둘러싼 다양한 가치이거나 아니면 그것의 배면에 자리를 틀고 있는 인생의 무상함이 될 것이다.

  강형구의 안면초상이 제공하는 응시의 조건들은 관객의 시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이 응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알루미늄 판을 캔버스의 눈 부위에 숨겨 붙여 안광의 기운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화된 인물이 걸어오는 의미들은 관객의 마음에서 반향 되어 나온 것들이다. 거울 앞에 선 인물처럼 그림과 마주한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때 작가의 안면초상은 특정한 인물로서 타자의 초상이 아니라 바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강형구의 안면초상은 대상화된 초상으로서 나의 영혼을 바라보는 거울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니르바나의 교훈은 번뇌란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나를 성찰하고 스스로를 깨닫는 것에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강형구의 작품에서 대상을 응시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상대방을 대상화시켜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이란 궁극적으로 대상화를 넘어선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5. 김기철(Kim Ki-chul, One Drop, 2016, 
Speakers, Amplifier, CD player, Plexiglass Pipes, Sound installation)

  이번 전시회에 김기철이 내놓은 작품은 30cm 높이의 투명 유리관 60개 위에 스피커를 각각 설치한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작업이다. 작가는 이 설치작품에 <물방울> 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스피커에서는 고요한 동굴 속 연못의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입체음향으로 퍼져 나온다. 사각의 전시장 바닥에 중첩된 두 개의 원형은 물방울이 만들어 내는 파장을 연상케 하도록 되어 있다. 낙하하는 물방울 소리와 바닥에 설치된 파장의 무늬는 상부 공간에 매달린 박선기의 거대한 원형의 숯 작업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경험의 세계로 보는이를 안내할 것이다. 

  김기철은 종교적 화두로서 ‘명상’ 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 오고 있다. 명상은 자신의 마음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높은 수준의 자각을 이루며 동시에 내면의 평안에 도달케 하는 수행의 수단이자 지향점이다. 작가는 명상의 상황을 작품으로 연출하기 위해 대나무 숲이나 연못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매체로 이용해 왔다. 그 중 <소리보기>라는 제명의 설치 작품들은 스피커를 투명 합성수지 줄을 이용해 공중에 매달아 놓은 것이다. 이 때 조명에 의해 빛을 머금은 합성수지는 마치 떨어지는 빗방울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하며 시각과 청각이 융합을 이루는 가운데 명상의 세계로 이끌도록 되어 있다. 빗소리를 전시장 공간으로 옮겨와 재현하는 작가의 작품 의도에는 ‘소리보기’ 즉 관음(관세음)의 불교 개념을 통해 도달하려는 니르바나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종교적 성향의 작품에 대해 ‘소리에 대한 감성적 접근과 음향심리학에 기반을 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모스크바 전시회에서는 전시장 천고가 높은 탓에 합성수지 줄을 사용해 스피커를 공중에 매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적당한 길이의 투명 유리관을 이용해 스피커의 높이를 조정하는 방식을 도입해 빛의 효과를 하단부로 유도함으로써 수면의 일루전을 연출하는 성과를 거두어 내었다. 대나무 숲에 떨어지는 빗방을 소리는 동굴 속의 수면에서 솟아오르는 물방울 소리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합성수지 줄에 반사된 빛으로 빗줄기 이미지를 연출해 내는 대신 거대한 숯의 구체 볼륨을 자리잡게 함으로써 명상의 차원에서 거대하고 불가항력적인 우주공간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다. 두 개의 원과 하나의 물방울 소리가 이렇게 큰 힘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김기철 만이 지닌 예술적 능력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6. 이명호(Lee Myoung-ho, Tree #7, 2015, 
Ink on canvas, 144x372cm)

  이명호가 내놓은 <Tree> 시리즈는 들판에 서 있는 야생의 나무 뒤편에 중장비를 이용해 거대한 캔버스를 설치한 후 사진을 찍은 것이다.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 안에 들어온 한그루의 나무는 그림이나 사진 이미지로 착각하게 되면서 특별한 지각 체험을 선사해 준다. 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조형 원리는 바로 피사체의 공간 영역을 한정하고 잘라내는 프레이밍 작업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이명호의 작품은 이렇듯 사진의 일반적 속성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범주화된 풍경의 기록이자 허상과 실재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이명호의 완성된 작품에는 두 개 이상의 프레임이 자리잡고 있다. 우선 나무의 배경에 설치되어 공간을 구획하는 캔버스가 첫 번째의 프레임이며, 이 나무를 품은 캔버스를 다시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설정한 공간 구성이 두 번째 프레임이다. 작가가 이 사진 작업을 액자에 넣는다면 나무를 둘러싸고 생겨나는 프레임은 다중적 구조를 지니게 된다. 프레임이란 자고로 사물 혹은 풍경에 대한 작가의 선택과 결정의 산물이자 개별적 조형의지와 능력을 나타내는 요소가 된다. 게다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의지이며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빛의 조건과 바람의 정도 그리고 주변의 작업 환경을 총체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명호의 사진 작업은 따라서 단순한 사진 찍기라는 행위를 넘어 다양한 영역들을 작업의 과정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가 동원하는 장비와 인력은 대형 프로젝트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에 이르러야 하며 한 컷의 작품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가 작품 앞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망막에 비추어진 시각 이미지뿐만 아니라 촬영의 기획에서 실행 단계에 이르는 과정들이다. 작가에게 있어 사진 작업은 기획, 섭외, 실행, 평가, 마케팅 따위의 요소가 작동하는 삶의 과정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결과로 생산된 사진 작품을 둘러싼 미학적 논의점은 허상과 실재 사이의 착시와 그에 따른 존재성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명호의 작업에는 허상과 실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사물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이 있다. 세상으로 열려있는 눈이 만상을 보고 있으나 선택에 의해 제한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다. 동양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調) 사상이 말해 주듯이 허상과 실재의 사이에서 사물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것은 선택이다. 사진 예술의 영역에서 그 선택은 프레이밍이라는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이명호의 작품은 만물의 존재성에 대한 성찰은 실재와 허상 사이에 놓인 경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7. 뮌(Mioon, Auditorium, 2014, 5 Cabinet, Objets, 
OMX Controller, LED lights, Small motors, 700x600x320cm)

  부부작가로 활동하는 뮌의 설치작업 <기억극장>은 책장처럼 만든 다섯 개의 라이트 박스로 구성된다. 각각의 라이트 박스는 여덟 개의 칸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다양한 미니어처 조각이나 오브제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비추는 빛은 상자의 표면과 그 주변공간의 벽면에 다양한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구획된 사각의 칸들이 작가가 연출하는 연극 무대라 한다면 모두 40개의 장면이 전시장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기억극장'이라는 제명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 베네치아 궁정에 세웠던 목조극장에서 따 온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비밀을 저장하는 창고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지식을 관리하는 장소였다. 고대로부터 전수된 비밀과 지식을 저장하고 새롭게 체계화 한 공간이 기억극장이라면 그것은 오늘날 도서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뮌은 이 기억극장의 장치를 자신의 울타리로 끌어들였다. 

  작가는 관객들이 어둠속에 설치된 기억극장을 소요하면서 자신이 그 공간 안에 숨겨놓은 예술적 의도에 공감하기를 바랄 것이다. 기억의 정원에 펼쳐놓은 다양한 미니어처 조각과 오브제들 그리고 그것이 연출해 내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상기시키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작가는 기억극장의 사례를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위한 알레고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기억극장은 무엇보다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공간이자 권력에 대한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뮌이 자신의 <기억극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지식이란 언어와 관습으로 축적된 일루전의 세계일뿐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기억극장>을 소요하면서 관객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우주의 숨겨진 질서나 비밀스런 지식들이 아니다. 작가는 우주의 숨은 질서를 담아내는 시설로서 <기억극장>의 안과 밖 모두를 관객에게 공개하고 그것들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출되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란 일상에서 공유되는 작은 오브제들과 사물들의 조악한 조합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루전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규정하는 일은 관객에게 일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뮌의 기억극장은 역사의 무게를 담은 공간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현대적 삶의 조건들에 비판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8. 백남준(Nam June Paik, TV Buddha, 1974/2002,
TV, Camera, Sculpture, 64x280x160cm)    

백남준의 <TV Buddha>는 이번 전시회 “Nirvana-한국현대미술전”의 성격을 규정하고 전시회의 기획의도를 대변해 주는 작품이다. 백남준의 대표작의 하나로 알려진 이 설치작업은 면전에 놓인 텔레비전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부처의 모습을 보여준다. 폐쇄 회로를 통한 자신과의 대면 상황을 위트와 해학과 풍자의 어법으로 변주해 제시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명상체험이 미묘하게 엮어진 이 작품은 정보 미디어의 상징인 TV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과 더불어 거울을 대신해 자리 잡은 TV를 통한 자기성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등장하는 거울을 대체해 TV가 주체를 형성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현대의 상황을 이 작품이 드러내고 있다면 필자의 지나친 억측일까?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이자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 전통 예술에 흐르는 위트와 풍자 그리고 해학이 엿보인다. 거기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견인하는 아이러니한 힘이 담겨있다. 동양의 지혜의 상징인 부처가 TV 모니터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상황이 나르시스의 세계를 넘어 자기성찰의 풍자와 해학의 상황으로 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 개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의미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니르바나의 세계와 갖게 되는 연관성은 새로운 의미구조란 해탈과 열반 그리고 적멸의 세계와 끈이 닿아 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TV Buddha>가 건네주는 자기성찰의 조건과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명증하여 논리나 욕망을 넘어선 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곧 자기를 초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하는 방식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니르바나의 세계가 번뇌의 불꽃을 불어서 끄고 그로부터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그 방식을 자기성찰과 명상의 방식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정보시대의 전자 미디어와 동양 종교의 명상 행위를 접목시킨 이 작품은 그래서 이번 전시의 개념을 이끄는 기반이 되고 있다. 나를 바라보고 주목하며 성찰하는 일, 그것은 세속의 지식과 욕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이며 궁극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주목하며 성찰하는 생각마저도 벗어버리는 일이 니르바나의 세계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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