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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조각상 30년의 오늘

김영호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1987년에 제정되어 30년을 맞고 있는 김세중조각상은 우리나라 미술상의 면면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배출한 조각상 수상자들의 위상은 곧바로 한국 현대조각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90년대 이후 국내 화단에 미술상들이 급증하고 그것이 미술생태를 바꿔놓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상의 기능과 역할을 되짚어 보는 일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식이 열악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미술상은 작가의 길에 용기를 북돋아 주는 문화적 장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화가나 조각가 지망생이 화단에 공식 등단하는 통로는 유일하게 국전의 입상이었다. 1980년대 초 국전이 폐지된 이후 신문사 등이 주도하는 민전시대가 열렸으나 여전히 공모전은 작가의 입문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작가 개인의 주체의식이 강해지고 공모전이 실험적 예술경향을 수용하는데 한계를 보이자 유망 청년작가들은 공모전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이들은 개인전을 통해 직접 관객들과 만나거나 각종 단체가 운영하는 레시던시 프로그램을 찾아나서는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내외 미술시장의 메커니즘을 이용하거나,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미술전에 참여하기 위해 기획자들과 협력하는 것도 자구적 노력의 하나였다. 미술상은 이렇듯 다변화되는 미술환경에 부응해 특정 작가의 화단 활동에 드라이브를 거는 강력한 동력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김세중(1929-1986)은 국전을 통해 데뷔했으니 관전의 등용문을 거쳐 작가의 반열에 오른 국내파 조각가 세대의 한사람에 속한다.1)해방 후 정부가 주도하는 국전은 곧바로 관학적 통치이념과 연계된 공모전이었으며 수상작가들은 국가의 예술관련 사업들을 떠맡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국가적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66년부터 시행한 ‘애국선열조상건립사업’을 비롯해 국가가 추진하는 대형프로젝트는 조각가 김세중의 역량을 발휘하는 배경이 되었다. 김세중 예술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종교미술은 작가 자신의 존재와 초월적 가치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해방 1세대 조각가로서 자신의 예술에 몰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으나 종교미술 분야에서 거둔 업적은 독보적인 것이었다. 김세중은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과 국토재건의 격변기를 살며 그에게 주어진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작가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김세중의 이름에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 낸 것은 그의 유족과 지인들이 제정한 미술상이었다. 김세중조각상이 제정된 1987년은 앞서 언급했듯이 공모전인 국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민전이 그 자리를 대신해 신인 등용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새로운 실험적 예술을 전개해 오던 작가들에게 격려와 전환점이 될 무엇이 요구되는 시절이었다. 김세중조각상은 공모전의 관학적 울타리를 넘어 실험정신에 근거해 현대미술의 노정을 개척해 온 조각가들의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김세중이 꿈꾸었던 ‘자신의 예술세계’를 찾아 창조적 열정을 불사르는 작가상은 그가 타계한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조각상의 제정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김세중조각상 30년의 역사는 한국 현대조각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김세중조각상 수상자 30명2)의 작품세계 면면이 한국 현대조각사의 얼개를 이루는 요인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게다가 1990년에 제정되어 26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김세중청년조각상>의 수상자 34명3)의 이름들을 더하면 수상사와 조각사의 일치감은 더욱 견고해 질 것이다. <한국미술저작·출판상> 수상자4)의 면면은 이 상의 공동체적 파급력을 더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한국현대조각사의 단면이란 어떤 것일까. 세계미술사의 경향에 빗대어 이해를 구하자면 앵포르멜과 미니멀 아트에서 개념미술, 설치, 뉴미디어 그리고 새로운 형상성을 내세우는 구상조각에 이르는 제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다. 수상자 각각이 자신의 영역에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은 김세중조각상이 한국 현대조각사의 얼개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케 하는 대목이다.

김세중조각상은 1990년대 이후 급증한 미술상에 하나의 범례를 제시하며 국내화단의 새로운 지형도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 국내의 미술상 중 타계한 작가의 이름을 내건 주요 미술상들은 <김세중조각상> 외에도 <이중섭미술상>(1988), <김종영조각상>(1990), <이인성미술상>(1999), <문신미술상>(2002), <이동훈미술상>(2003), <박수근미술상>(2015) 등이 있다. 기업이 주관하는 미술상으로는 <에르메스재단미술상>(2000), <송은미술대상>2001), <양현미술상>(2008), <연강예술상>(2010) 이 있는데 대부분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경향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정한 <올해의 작가상> 역시 젊은 작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미술상이다. 김세중조각상의 위상은 운영위원들의 구성에서 확인된다. 이른바 ‘재단법인 김세중기념사업회’의 이사진은 유족인 김남조 시인을 비롯해 12명의 예술계에서 존경받는 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5)2015년에는 효창동 자택을 재단 소유로 기증하여 소박한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을 건립했다. 전시실과 세미나실의 확보는 김세중조각상의 지속과 나눔의 의지를 실천하는 결단이라는 점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오늘날 미술상은 현대미술을 이끄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명심해야할 일이 하나 있다. 미술상의 위상과 권위는 수상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이치를 따르는 한 김세중조각상은 국내의 미술상을 대표하는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2016 김세중미술상 30년 도록 서문)  






1) 김세중은 해방후 1946년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제1회 입학생이었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 대학생의 신분으로 <청년>을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조각가 김종영에게 배웠고 화가 장발의 영향을 받아 종교조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2)
 심문섭, 강태성, 엄태정, 이종각, 최만린, 박석원, 강은엽, 조성묵, 한용진, 박종배, 전준, 김효숙, 김청정, 임송자, 최인수, 김영원, 박충흠, 김인겸, 안규철, 이상갑, 김광우, 정관모, 윤영석, 임충섭, 이용덕, 이불, 서도호, 정현, 윤석남, 이승택 (이상 30명)

3)
 박상숙, 원인종, 신현중, 김희성, 김유선, 문인수, 신옥주, 이상현, 문주, 최승호, 정재철, 이수홍, 김영진, 이기칠, 이지효, 김석, 김종구, 정서영, 유영호, 김주현, 김상균, 김태곤, 천선명, 노준, 최우람, 양혜규, 박종빈, 홍영인, 김신일, 권오상, 최수앙, 이완, 박재영 (이상 33명)

4)
 오광수, 최열, 조요한, 안휘준, 강우방, 허동화, 장충식, 맹인재, 서성록, 김리나, 최태만, 이성미, 홍선표, 김영나, 이기웅, 김달진, 김홍희, 노명호 (이상 18명)

5)
 김남조, 이경성, 이준, 이어령, 최만린, 유준상, 박세일이 창립이사진이며 엄태정, 이종각, 심문섭, 문주, 김범이 추가로 선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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