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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긋기 행위에 대한 사유 / 김재국의 달동네 드로잉

김영호


김영호 미술평론가/미술사가


김재국을 보면 언뜻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있다. 예술대학 졸업 후 20여년의 침묵을 깨고 나이 50에 첫 개인전을 하겠다고 나선 불굴의 용기나, 강원도 홍천의 풍광 좋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살면서도 굳이 도시의 달동네를 소재로 삼아 연작을 그려온 고집스런 태도가 그렇다. 펜과 잉크를 사용해 판잣집과 계단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그려 올리는 개성적 작업방식은 그동안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왔음을 보여준다. 작업노트에 따르면 작가는 매일 일정한 작업량을 정해놓고 그것을 채우려 애써왔다. 아울러 자신의 편집적 작업이 눈의 피로를 유발하는 가혹한 행위이고 그 행위를 스스로 감내하고 있음도 밝히고 있다. 노동집약적 드로잉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고도의 몰입감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차라리 그를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수행자처럼 여기게 한다. 
   
김재국을 둘러싼 이러한 의문은 그의 홍천 작업실을 방문하면 다소 해소될 것이다. 자연에 파묻혀 살면서 정해진 대지에 환경미술 설치 작업을 실행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영내를 둘러보면 잔디밭에서 토담의 벽에 진열된 농기구 그리고 박제된 새의 형상에 이르기 까지 작가의 치밀한 조형의지가 느껴진다. 농촌의 힘든 육체적 노동의 일과 속에서도 적지 않은 시간을 할당해 드로잉 작업을 해 온 것을 보면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점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달동네가 자리 잡고 있는 연유는 작가의 길을 꿈꾸었던 청년시절 자신이 선택했던 ‘서울이야기’와 ‘집(集), ‘동네’ 등의 주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김재국은 달동네를 그린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요소는 특정한 풍경의 서술이 아니라 선 긋기 행위이다. 선을 긋는 반복적 행동의 결실로 태어난 것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수한 판잣집이며 달동네는 행위를 유발시키는 기억속의 주제일 뿐이다. 끝없이 연속되는 계단과 전봇대 그리고 판자집 이미지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전신줄 역시 그의 화면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달동네의 서정이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보다 반복적 선긋기 행위에 겨냥되어 있다. 달동네는 선의 드로잉을 위한 조건일 뿐 자신이 중시하는 것은 패턴화된 선의 조형이다. 펜과 잉크라는 두 재료의 단순한 조합이 만들어 내는 선, 드로잉의 속성에 의해 일회로 완결되는 선, 지우거나 수정할 수 없는 선, 무수한 집의 형태를 만들며 반복되어지는 선, 면과 색으로 변주되는 선이 바로 그의 작업이 근간을 이루는 행위로서의 선이다.     

김재국의 선긋기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의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펜과 잉크의 드로잉은 지극히 단순하면서 명증한 의도를 연출해 낸다. 그에 있어 선긋기 행위는 원초적인 욕망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가혹한 노동의 행위이다. 그것은 일정한 양을 배정해 나날이 실행하는 의무의 행동이자 몰입감을 충족시키는 자기성취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고난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얻어진 대형 캔버스는 삶을 둘러싼 본능적 사유와 행동의 결실이 된다. 그에 있어 선긋기는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자 자기성취의 결실을 원하는 창조적 소망의 행위라는 점에서 가치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재국의 선긋기 행위를 목적 없는 목적의 행위이자 그 결과물로서 드로잉 작품을 자기 목적적 행의의 산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재국의 이러한 선긋기 작업은 미술사에서 나름의 족보를 지니고 있다. 특히 목적 없는 반복적 행위로서 선긋기는 그림의 기본 행동이자 회화의 본질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다. 선을 긋는 행위가 형상을 만들어내는 수단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사례는 모더니즘 미술의 맥락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사이 톰블리의 ‘낙서화’나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는 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선의 행위를 정착시킨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한편 선긋기가 회화의 본질이 되는 경우는 동양의 서화에서 중시하는 정신과 기운으로서 획의 미학과 연계를 가진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을 비롯한 서체추상의 작가들은 이러한 계보를 뒤따르고 있다. 이렇듯 김재국의 선긋기의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평면 작품은 동서고금의 미술사적 계보을 따르고 있다.  


김재국의 드로잉 작업은 재료와 태도 그리고 관점의 차원에서 흥미롭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펜과 잉크이다. 붓과 먹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재료들이다. 하지만 목탄의 물성이 연필의 그것과 다르듯이 펜의 감각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질감이 아니라 차갑고 이성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특성을 지닌다. 지우개로 지울 수 없음으로 펜화의 선긋기는 일회성을 지니며 따라서 집중력과 긴장이 요구되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펜화의 특성은 작가의 선긋기 태도를 결정지우는 요소가 되고 있다. 나아가 김재국의 선긋기 행위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세계관과 연동되어 있다. 반복적 일상 속에 덧칠하거나 지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보면 그의 드로잉은 이러한 인생노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의 드로잉은 축적된 삶의 흔적이다. 


김재국의 첫 개인전은 반세기의 인생노정을 뒤로하고 자신의 캔버스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다. 그 예술에 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작가의 세계관이라면 김재국의 이번 개인전은 긴 호흡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예술과 삶을 융합하는 하나의 지표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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