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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땅의 역사와 정신을 찾아서

김영호

 
김영호 (미술사가/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농촌에서 자란 이종구가 화가로서 관심을 가져온 주제는 대지와 그 땅을 사는 농민이다. 72학번인 그가 대학에서 그림공부를 마치고 군에 입대해 반공이념의 국가관을 요구받던 1970년대는 바야흐로 유신과 긴급조치 그리고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되는 한국현대사의 격변기였다. 문화예술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 보면 1970년대의 미술계는 서구화의 물결 속에 구미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다양한 모더니즘 미술양식이 집단적 결속을 과시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종구가 선택한 길은 서구미술의 추상적 개념에 기반한 순수 조형 탐구와는 결연히 거리를 둔 것이었다. 그가 지닌 소명의식은 지금 여기, 자신이 서있는 도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었고 곧이어 이 땅의 역사와 농민의 삶을 사실적 필치로 그려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0년대 초 화단에 데뷔한 이래 이종구가 걸어온 예술노정을 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 화단에 새롭게 등장한 신형상 미술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일상적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표상하는 예술에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1979년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과 같은 동시대 선배 그룹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노선을 정하는데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82년 여름 서울미술관이 소개한 <프랑스 신구상회화>를 접하면서였다고 회고한다. 새롭게 재편되는 국내외 미술계 지형과 형상 미술의 복권을 목도하면서 그는 화가로서 탄탄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땅의 역사와 정신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러한 그의 소명의식은 1982년 <임술년>의 창립으로 이어지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꽃을 피우게 될 민중미술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예술이란 시대의 아들이라 믿었던 이종구에 있어 그림은 당대의 현실상을 보여주며 진정성이 있고 주체적인 것이어야 했다. 농부의 아들로서 작가는 이러한 소명의식을 대지와 그 땅을 사는 농민들의 초상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쌀 시장 개방으로 더욱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투사하는 가운데 삽이나 낫 등의 농기구를 상징으로 삼아 농민들의 묵시적 저항과 분노를 담아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땅에 대한 미시적인 시각으로 씨앗이나 새싹 그리고 그릇과 같은 사물에 주목하면서 생명과 희망의 메시지를 드러내었다. 2000년대에 와서는 드디어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땅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동과 생산의 현장으로서 대지를 넘어 정신적이고 영성을 품은 국토 그림인 백두대간 연작이 이 시기의 결실이었다. 최근 이종구는 국토 풍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월광에 물든 국토의 산야와 사찰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터와 사람이 합일을 이루고 자연과 사상이 함께 어우러진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화면에 표상된 절제된 색과 빛의 효과는 땅의 역사 혹은 땅의 정신과 마주하는 차원으로 보는이를 안내하며 리얼리즘의 또 다른 영역을 펼쳐 보인다.  

    
2. 임술년 
   이종구는 1980년대 새로운 형상미술 그룹의 하나로 등장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동인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주지하듯 1982년 서울시 관훈동 덕수미술관에서 가진 이 그룹의 원명은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Exhibition at '98.992km²' of 1982 Imsul Year)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된 이종구는 이 그룹의 이름을 정하고 창립선언문을 집필함으로써 그룹의 향방을 설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임술년’은 1982년이라는 시간을, ‘구만팔천구백구십이’는 남한 총면적의 수치를 나타낸 것이며, 말미에 조사 ‘에서’를 붙임으로써 출발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임술년>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의 축을 활동의 좌표로 설정하고 이 지점에서 세상을 주시하며 그에 대한 발언을 시도하는 그룹으로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술년> 동인들은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이 서구지향적 사고방식에 의해 양식화되고 제도화되고 있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지금 여기라는 당대의 현실 문화에 대한 반성과 진단을 시도했다.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의 수용과 가치관의 성찰, 그리고 새로운 전통의 모색’은 이들이 내세운 준엄한 강령이었다. 창립전에는 7명이 참여했는데 이종구 외에 박흥순, 송창, 이명복,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이 그들이다. 이후 <임술년>은 1985년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연립전 행사인 을축년미술대동잔치에 합류함으로써 <현실과 발언>과 더불어 민중미술의 강력한 분파의 하나가 되었다. 

   <임술년>의 작가들은 현실문명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 속에 ‘팝 페스티벌과 같은 문화풍속도’를 선보이는 한편 ‘기지촌 풍경’이나 ‘탄광촌 광부의 남루한 옷’을 그렸으며 ‘링 위에 쓰러진 복서’와 같은 인물을 통해 당대의 시대상을 드러내었다. 이종구가 창립전에 출품한 작품은 밤거리의 보도블록과 그 위에 세워진 공사 표지판을 극사실적 어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위험과 금지의 기호로서 삼각 표지판들이 길게 드리운 두 개의 그림자는 화면 밖에 존재하는 빛과 더불어 도시의 은유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평론가 김복영 교수는 1982년 <공간> 12월호에 기고한 리뷰를 통해 ‘이들이 응시하는 삶의 현장은 목격자의 자세에서 관찰된 것이며 어둡고 답답하며 일그러진 것들’이며 그것을 ‘비극적 시각’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서 읽혀지는 삶의 현장에 대한 지시적 의미들은 단순히 사회적 문맥에서 해석되는 차원을 넘어 내면으로부터 분출된 개성적 문맥에서도 동시에 발동되고 있으며, ‘정교하고도 클래식할 정도로 착실히 묘사된 인물과 사물들은 그래서 화면 속에서 매체(媒體)로서의 미적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조치되어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1986년 11월 그림마당 민에서 5회 정기전을 가진 후 이듬해에 해체될 때까지 <임술년>은 정치적 선동단체로 오인될 수 있는 민중미술의 일면을 역사적 예술 장르인 비판적 리얼리즘의 맥락에 자리매김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다. <임술년>의 해체는 갤러리 미술에 대한 반성과 운동권 걸개그림이 실험적 방법으로 대두되는 현실에 대한 각성의 결과였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타블로 그림이 사회적 개혁의 무기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전시장 미술의 매너리즘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머지않은 훗날 199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민중미술 15년전’을 기획하고 옥션이나 갤러리에 의해 미술품으로 유통되는 환경적 변화를 고려할 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임술년> 동인들의 과감한 해체 결의는 당시의 청년세대 작가들의 순수성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직도 한국 리얼리즘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임술년> 그룹은 당시 국제적으로 확산되던 다양한 신형상미술 운동과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적 특수성과 국제적 보편성을 동시에 도출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3. 고향땅 오지리 
   밤도시의 보도블럭과 위험 표지판 그리고 맨홀 뚜껑 따위를 극사실적 형상으로 묘사했던 1982년이 지난 이듬해부터 이종구는 자신의 시선을 고향땅으로 옮겼다. 불길한 도시이미지에서 농촌의 현실로의 주제 전환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시인 고은 선생이 2013년에 쓴 이종구론 「근원에의 의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향과 원초에의 심상을 회복하는 일은 ‘운명적’이었다. 이때부터 이종구의 그림에는 오지리의 농부들과 벗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부친과 실명의 노인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땅을 지키고 있는 죽마고우들이다. 대지에 허리 굽히고 흙을 쥐며 살아온 아낙들의 몸은 노동의 무게로 굴곡지고 뒤틀려 있으며, 태양빛에 바래 구릿빛을 띤 농부들의 굵은 주름은 거친 밭고랑과 다르지 않게 묘사되어 있다. 노동의 현장이며 생산의 땅에 정주한 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초상이다. 하지만 이종구의 시선은 농민의 형상을 진솔하게 묘사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가 표상하려는 것은 비가시적 힘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농촌의 현실에 대한 응시와 비판적 발언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농촌사회는 세계화, 산업화, 현대화의 미명 속에 전에 없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쌀 수매값 폭락, 소 값 파동, 구제역, 광우병, 농산물 수입개방 등 거친 풍랑을 겪으며 참혹하게 붕괴되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목전에 두고 화단에 갓 데뷔한 청년 화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1983년부터 이종구는 정부미 쌀부대 위에 농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연작에 작가는 <오지리 사람들>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때로 농부 이미지는 담벼락에 부착된 정치 선거 포스터나 상품 포장지를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정치적 현실의 객관적 리얼리티를 여과 없이 화면에 등장시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농사의 도구인 낫과 호미를 눈에 띠게 강조함으로써 농민의 분노와 투쟁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농촌 현대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1995년 이후 한차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동안 천착해 오던 농부의 초상에서 한걸음 벗어나 고무신, 사발, 플라스틱 용기, 씨앗, 새싹, 수저 등의 사물을 화면의 주제로 등장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임술년 초기시절의 도시에 대한 비극적 시각이나 오지리 연작에서 발견되는 농민의 수난사와 더불어 땅의 근원을 향한 시선의 결과이며 대지의 생명력과 생태계에 대한 희망적 염원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30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농부 초상은 농촌의 변화와 역사적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림에 빈번히 등장하는 오지리 사람들도 시간과 더불어 늙어간다. 세상을 뜬 몇몇의 인물들은 비어낸 실루엣의 형태로 그림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종구의 작품은 현존하는 실재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그려내기 때문에 사진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사진적 기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시선과 의도가 그림에 강하게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객관적인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현실에 대한 해석이 가해져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의 맥락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희망적이고 건강하고 충실한 노동자 농민의 모습과도 사뭇 다르다. 투박한 손과 무뚝뚝한 표정은 그의 작품이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현실 비판적인 범주 안에서 의미가 작동되고 있다. 2005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정한 ‘올해의 작가’전을 계기로 이종구는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남겼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림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 현실 속에서 그림이 가진 힘이 아주 미미할 지라도 나는 그림을 통해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억압하는 시대의 폭력에 저항하고 싶다.” (2005.5)

   결국 이종구의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는 농민이라는 대상의 표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가 그려내려는 것은 농민의 형상을 넘어 그 형상을 응시하는 시선이 머무는 땅의 역사와 정신이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과 세계관은 작가로 하여금 회고적 향토애의 차원을 넘어 국토 산하의 거대한 세계와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현실의 실경으로 자신의 예술적 노정을 전개하도록 했다. 급기야는 그가 다루는 공간도 국경을 넘어 자신이 방문하고 경험한 제3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전쟁과 폭력으로 상처난 지구촌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      


4. 백두대간과 월하산사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이종구는 자신의 예술적 주제의 범주를 농촌에서 국토로 넓히며 새로운 경지를 담은 <백두대간>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등뼈’로 불리는 백두대간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지리적 공간의 복합체이자 국토의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전파하는 신경계의 상징으로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제공해 왔다. 농토와 대지를 그리던 이종구에게 백두대간은 기존의 주제를 확장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자연스런 결과이자 인물이나 사물을 넘어 풍경으로 다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시기 이후 이종구는 내용적 측면 뿐만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 전에 없는 자유와 실험을 구가했다. 재료로서 한지와 석고가 도입되고 고부조와 입체작업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형식을 통해 구제역으로 집단 생매장된 돼지들을 죽음을 위로하는 입체작업 <진혼가> 연작을 발표했다. 한지 부조에 채색을 시도한 <대지의 손> 시리즈에서는 삽이나 볍씨 같은 사물들이 오브제로써 과감히 도입되고 있다. )

   백두대간은 땅에 대한 시선이 미시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인 차원으로 발전된 것이라 작가는 말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명산들의 파노라마를 한 폭의 평면위에 겹겹이 쌓아놓은  장대한 풍경들은 보는 이들의 심리를 압도하며 영적인 차원으로 안내한다. 실경산수와는 다른 차원의 서사적 풍경이다. 백두대간의 국토 명산을 탐방하게 되면서 작가가 경험한 사찰과 석탑들의 감흥은 이후 작가의 예술적 행보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주었다. 특히 남도의 지리산 법계사 근처의 산장에서 경험했던 달밤의 산사 풍경은 그대로 그의 화폭 속에 들어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푸른 밤, 바람마저 잠들어 적막한 산중. 달빛 아래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가 쉬는데 이 적막을 비추는 석등은 생명의 골짜기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신령스럽다. 화면 전체를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밤으로 이끄는 것은 물론 산야를 비추는 보름달이다. 하늘과 산의 경계를 가르는 능선을 따라 섬세하게 그어진 달빛의 선율은 세밀한 작가의 심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빛의 선이라 할까 아니면 선의 빛이라 할까. 골짜기를 흐르는 수면에 투사된 달빛의 광휘는 천년 암벽의 실루엣과 더불어 보는 이를 신비의 영역으로 이끈다. 달빛이 석탑이나 삼존불 그리고 사찰의 용마루에 비추어지면 그것은 부처의 아우라가 된다. 노랑과 파랑의 보색 대비효과는 그의 그림에서 시각을 영적인 차원의 세계로 변주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달마산 미황사 마당에 새벽이 찾아오면 때맞추어 응답하듯 마당을 밝히는 석등이 달과 교신하며 자연의 메시지를 받아 대지로 전파한다. 잠시 후면 그림 밖의 산 아래에서 새벽 닭이 울 것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했다. 그의 말을 따르면 이종구의 사찰 풍경은 달빛으로 물들어 신화세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의 골짜기가 푸른 평면으로 환치되면서 드러나는 환상의 세계다. 그러나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듯 그의 그림에는 새벽을 몰고 오는 태양의 기운이 느껴진다. 태양 빛을 품은 달의 서정은 그래서 신화적 역사가 된다. 이종구의 사찰 풍경은 이렇듯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공간이자 두 세계가 한데 어우러진 영역을 보여준다.  



6. 에필로그  
   2005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종구를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다. 그리고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기획전시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4년 이후에서 당시에 이르는 이종구의 작품세계를 정리하며 네 마디로 구분했다. 1984-1990년: 고향땅 오지리, 1991-1994년 : 고개 숙인 농민의 분노, 1995-2000년 :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2001-2005년 : 우리 땅, 우리 겨레가 그것이다. 그리고 다시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실험과 모색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의 월하산사 풍경에 천착하고 있다. 

   1982년 <임술년>에서 부터  오늘까지 30년 넘게 펼쳐지고 있는 이종구의 예술세계는 내용과 형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라는 조형이념의 좌표 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종구가 그동안 작품 제명으로 사용해 온 단어들을 일괄해 보면 작가의 조형이념을 어느 정도 갈무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아버지, 연혁, 오지리, 수몰지, 소, 길, 들, 부부, 유산, 종자, 밥상, 그릇, 국토, 강, 백두대간, 진혼가, 대지의 손, 역사, 정수, 석굴암, 삼존불, 월출, 나무 등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연대기로 대변하는 기호들처럼 작동한다. 이들 단어의 대개는 작가의 주변과 일상에서 직접 경험한 대상들이며, 존재에 대한 단순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 작가가 시도하는 이념의 조합에 의해 독자적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2008년 이후 전개되는 월하의 산사 풍경은 말 그대로 독보적인 하나의 양식을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작가의 예술세계가 확립한 독자성은 농부와 국토라는 소재의 측면과 더불어 작가 고유의 조형방식에서 발견된다. 이종구의 그림은 조각처럼 견고한 형태감과 치밀한 묘사력에 의해 평면회화를 삼차원적 볼륨으로 감지케 하는 마력이 있다. 이 견고한 형태의 질감은 그의 붓질에서 온 것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종구가 다루는 형상들은 선묘적 속성에 의해 독특한 표면의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축적된 세필의 표면은 마치 화석이 핀 바위처럼 깊은 물성을 보여준다. 시간을 품은 공간이며 생명과 역사의 공간이다. 이러한 붓질은 그가 그린 소의 연작에서 주제와 형식의 일치를 이루며, 석등과 탑과 같은 석조물의 표면에서 백미를 이룬다. 견고한 형상성과 더불어 그가 구가하는 화면의 구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거기에 극사실적 묘사가 곁들여 지면서 그의 작품은 조각적 볼륨과 고전주의적 구도가 융합된 형상성을 띠게 된다. 이종구의 그림은 신형상 미술의 맥락에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시선이 가해지면서 그가 일구어낸 붓질의 독자성에 의해 새로운 회화예술의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종구의 예술세계는 흔히 농민화, 민중미술, 사실주의 미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땅의 역사와 정신을 향한 근원적 의지를 드러내는 작품세계를 제대로 일관하는데 아직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금 여기라는 시공의 축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표상하는 것이 리얼리즘 미술이고 이러한 미술운동이 저마다 다른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고유성을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 가치를 고려할 때 또 다른 리얼리즘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종구의 예술세계는 바로 한국 리얼리즘의 한 유형을 수립하기 위한 초석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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